이제는 볼 수 있다, [은하철도 999]
이제는 볼 수 있다, [은하철도 999]
  • 김종희
  • 승인 2008.04.1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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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큰 복 '상상력'을 거세하는 교회

먼 옛날 <은하철도 999>가 주일 아침에 방송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머리가 좋아서? 아니다. 친구들이 <은하철도 999> 보느라고 주일 예배에 지각하는 꼴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이해를 못했을까. 믿음이 좋아서? 아니다. <은하철도 999>는 '뻥'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뻥'을 별로 안 좋아했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같은 뻥 영화(수준 있게 표현하자면 '판타지' 영화)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살인의 추억>, <그때 그 사람>, <화려한 휴가>처럼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거나 역사적 개연성이 아주 짙은 영화들이다.

기자가 천직인 것 같은 기질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뻥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씩 없애가기 시작한 것이다. 뻥에는 안 좋은 것보다 좋은 것이 더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것을 제대로 즐길 때 내 인생이 더 풍성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더 관대해지고, 세상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생겨났다.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중에 <웰컴 투 동막골>이 역사적 사실과 뻥이 적절하게 섞인 영화라면,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은 종교적 교리와 뻥이 조화를 잘 이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둘 다 아이들과 함께 가서 보았다.

   
 
  ▲ 옥수수가 열에 의해 폭발하면 그냥 시커멓게 탈 뿐이다. 하지만 상상력이라는 양념이 들어가면 미국 사람에게는 팝콘도 될 수 있고 한국 사람에게는 강냉이도 될 수 있다.  
 

   
 
  ▲ 상상력에 의해 재창조된 팝콘은 긴장과 분열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는 상황에서 웃음을 던져주는 화해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 인민군과 국군이 말싸움을 하다가 실수로 날아간 수류탄이 옥수수 보관 창고에서 터진다. 하늘로 치솟은 옥수수 알들이 열 받아서 팝콘으로 변하는 장면이 나온다. 옛날 같으면 '뻥 치고 있네' 하면서 하품을 했을 장면인데, 작은 감동이 마음 한 곳으로 스며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수수가 팝콘으로 변하는 장면을 가지고 글을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TV 오락 프로그램에서 그 장면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것이 아닌가. 유심히 봤더니, 옥수수가 팝콘은커녕 강냉이로도 변하지 않고 그냥 시커멓게 타버리고 말았다.

전 같으면 과학적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득의만만한 표정을 지었을 텐데, 이번에는 불편한 마음으로 "방송이 별 쓸데없는 짓을 다 하고 있군" 하고 중얼거렸다. 과학적 사실이 주는 객관적 지식과 상상력이 주는 주관적 정서 중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에는 고대 서양 신화의 요소가 많이 등장한다. 루시가 옷장을 통해 동물의 나라 나니아 땅으로 들어가서 처음 만난 반인반수 툼누스를 비롯해서 마법, 마녀 등은 모두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들이다. 이교(異敎)적 요소가 많은 이 영화에 대해 '뉴에이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표현을 동원해서 비판하는 기독교인들도 제법 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선과 악의 대립 구조를 너무 선명하게 나누고, 기독교 교리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드러낸 점이 불편했다. 이런 점에서는 <반지의 제왕>이 더 낫다는 견해도 있다. 그래도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도 기독교세계관의 강요를 받지 않으면서 즐길 만한 좋은 작품이라고 넉넉하게 생각했다.

   
 
  ▲ 나니아 연대기에는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괴물인 반인반수도 등장한다. 이것을 가지고 '신화적'이니 '이교적'이니 비판한다면, 그것은 내가 볼 수 있는 시야가 그만큼 좁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 사자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는 "결백한 자가 반역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돌 탁자는 깨지고 죽음 그 자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원초적인 마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녀는 그걸 몰랐다. 그것도 역시 상상력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 동화를 쓴 C. S. 루이스는 이 책을 대할 때 상상력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아이 때에 읽을 가치가 있는 모든 이야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다시 읽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루이스의 말은 옳다. 어른이 되면서 점점 사라져가는(나의 경우는 어려서부터 아예 없었던 것 같은) 상상력은 어린아이 같아야만 회복될 수 있고, 그래야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아야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공감할 수밖에 없다. C. S. 루이스도 하나님나라와 어린아이의 상상력을 연결시킨 것이 틀림없다.

원작 동화의 해설서라고 할 수 있는 <나니아 나라를 찾아서>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정영훈은 “마녀는 이 마법을 왜 몰랐을까? 아슬란은 마녀가 태초 이전의 고요와 어둠이 존재하던 때를 조금이라도 더 내다볼 수 있었다면 다른 마법이 있다는 것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마녀라고 해서 이 마법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마녀의 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그 무지는 마녀 자신의 상상력의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고 했다.

여기서 다른 마법이란 '태초 이전의 심오한 마법'을 말한다. 그것은 "결백한 자가 반역자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바치면 돌 탁자는 깨지고 죽음 그 자체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심오한 마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죽음, 부활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마법을 얼마나 편하게 받아들이느냐 여부가 하나님나라에 얼마나 가까운지를 보여주는 잣대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열 살배기 큰딸에게 이 장면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아이기 때문에 심오한 이 마법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 보다.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점에서 하얀 마녀와 나는 닮은꼴이다.

그런데 다들 교회에만 왔다 하면 상상력이 거세된다. 예수님이 '들에 핀 꽃을 보라,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고 하니까, 죽어라 꽃만 보고 새만 본다.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모양이다. 예수 믿기 전에는 잘 나가던 가수, 소설가, 미술가가 예수를 믿었다 하면 '맛'을 잃어버린다. 바울이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해서 그런가? 다들 십자가만 부르고, 십자가만 쓰고, 십자가만 그린다. 그리고 과거를 모조리 부정해버린다. 역사 청산은 이럴 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천국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라.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화장실에서 황금으로 만든 변기에 앉아서 진주로 만들어진 똥을 싸는 얘기뿐이다. 휴지는 비단 휴지일까? 그런 천국, 그렇게 가고 싶을까. 천국에 대해 더 기가 막힌 상상을 할 수는 없을까.

기독교가 상상력을 거세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교회 문화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교리적 절대주의, 문화적 권위주의, 기복적 세속주의가 삼위일체를 이루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리다는 것만 가르치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곳에서 상상력이 태어나겠는가. 대화와 토론은 실종되고 오직 순종과 오직 충성만이 난무하는 곳에서 상상력이 성장하겠는가. 물질적 복과 성공만을 갈구하는 곳에서 상상력이 꽃을 피울 수 있겠는가. 일그러진 기독교가 상상력의 발기 불능을 자초한 셈이다.

물론 상업주의가 판타지 세계에서도 기승을 부리는 바람에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저질 판타지 상품들이 판을 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상업주의, 즉 돈에 환장한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판타지 자체가 무슨 몹쓸 죄를 지었겠는가.

상상력은 21세기 문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탁월한 솜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려면 제대로 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우리가 마음껏 재창조할 수 있으려면 풍부한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미 이것들을 우리에게 복으로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상상력의 복을 누리면서 살자. 그러려면 교회가 변해야 한다.

* 이 글은 2006년 1월 월간 <복음과상황>에 썼던 내용과 2008년 4월 필그림교회 청년부 테마수련회 때 강의한 내용을 섞어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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