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좁은 제자들, 넉넉한 예수님
속 좁은 제자들, 넉넉한 예수님
  • 박득훈
  • 승인 2008.04.21 09: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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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아 증후군'을 극복하려면…막 9:38-41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넓어질까요, 아니면 더 좁아질까요? 어떤 예수님을 믿느냐 혹은 어떻게 예수를 믿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이 좁아졌는지, 마음을 넓히려면 어떤 깨달음이 있어야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다시 한 번 엇박자 현상이 일어납니다. 앞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향해가고 있는 예수님과 높은 자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제자들 사이에 큰 간극이 있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선 마음이 좁아져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사람을 품지 못하는 제자들과 그를 품으시는 넉넉한 예수님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넓은 마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잘 배울 수 있길 바랍니다.

   
 
  ▲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속이 좁아터진 요한

갈릴리 지역을 지나면서 제자들은 어떤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가 제자들의 눈에 띈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점에 마음이 몹시 불쾌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그가 더 이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는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요한이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은 제자답게(막 3:17)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여 자초지종을 예수님께 보고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름이 함부로 도용되는 것을 잘 막아냈다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것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뜻 밖에도 '막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너무 좁아져 있는 것을 나무란 셈입니다. 왜 그들이 마음이 이렇게 좁아진 것일까요?

첫째, 제자들은 은연중 자기와 남을 비교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도 그들은 서로 비교하면서 누가 더 탁월한가를 놓고 논쟁을 벌인 바가 있습니다. 이들은 얼마 전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은 무명의 사람이 그 일에 성공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비교의식이 그들의 마음을 좁혀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취능력에 따라 우리를 비교하지 않으시고 우리 마음의 진실을 보시고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들도 이런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피차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보다 남을 더 훌륭하게 생각해야 합니다(빌 2:3). 한국 사람은 '배고픈 것은 잘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죠. 남보다 앞서야겠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비교의식을 과감히 버립시다. 내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해내면 마음속으로부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길 바랍니다.

둘째,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하기야 했겠지만 자신과 집단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들의 관심이 예수님의 이름이 오용되지 않도록 방지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그렇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힌트는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 효과가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진정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9장의 사건과 대조해보면 이 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에베소에서 바울이 2년 동안 하나님나라를 전하고 주의 말씀을 증거할 때 반응이 좋았습니다. 바울의 손을 통해 희한한 일들도 일어났습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갔습니다.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의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악귀를 쫓아내고 싶었습니다. 하여 악귀 들린 자들에게 명령했습니다.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그 중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큰 봉변만 당했습니다. 악귀가 냉소하듯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그리곤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겼습니다. 옷도 벗겨버렸습니다.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 벗은 채로 도망쳤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에베소엔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혹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오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를 저지할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거짓되면 이렇게 봉변을 당하고 더 큰 역사가 일어날 판이었습니다. 하물며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가 비록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고 해도 막을 일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를 저지한 것은 왜곡된 집단 혹은 공동체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충성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속한 공동체에 더 충성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집단에 대한 충성이 예수님에 대한 충성보다 상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그 집단의 리더가 예수님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때론 특정 집단을 초월해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집단이기주의의 노예가 된 한국 교회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게 될 때 교회는 심각한 병폐를 앓게 됩니다. 지난 번 소개했던 <킹덤 오브 헤븐>이란 영화에 이 점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기독교 측 전쟁광이 왕권을 장악하게 되자 회교도들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슬람 진영 쪽에서 십자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십자군 진영 한 가운데에선 거대한 금 십자가가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 번쩍이고 있었습니다. 십자군을 이끄는 왕은 그 십자가 때문에 전쟁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과 평화의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군사적 상징으로 전락된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을 초월한 왜곡이 일어난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들의 권력과 통치 영역을 확장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한 달콤한 집단이기주의와 치열한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매우 배타적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이기면 참으로 너그러운 모습을 갖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아름답게 빛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투옥되자 그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더욱 신바람 나게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을 더 괴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그들과는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속내를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빌 1:18)
      
한국 교회는 바울의 이런 마음과 자세를 시급하게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세인의 신망을 잃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각종 권위 있는 조사를 통해 잘 밝혀진 것처럼 한국 교회가 진리보다 자기 교회, 자기 교단의 교세 확장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자기 교회와 교단에 대한 병적 집착을 벗어버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더 깊은 사랑을 보이기 시작할 때 잃어버린 명예를 서서히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이 집단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그룹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의 귀신 좇아내는 일을 금한다면 그 만큼 갈릴리 지역의 귀신들린 사람은 고침 받는 것이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엔 그런 문제의식을 담아낼 넉넉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해 집단이기주의에 빠지면 이렇게 가슴이 좁아지고 차가워집니다. 자기 집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연약한 사람들로부터 눈길을 쉽게 돌립니다. 우리는 행여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길 바랍니다. 이렇게 좁아질 대로 좁아진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넓히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애를 쓰십니다.

마음이 넉넉하신 예수님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주도한 공동체 밖의 사람이 자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것을 인정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을 넓혀 자기 공동체 밖의 사람이 행한 소중한 일을 높이 사는 훈련을 시키시고 계십니다. 이는 쉬운 것 같지만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다른 교회나 다른 교회 교인이 하는 아름다운 일에 애써 눈을 감으려할 때가 많지요. 어떤 때는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 폄하하기도 합니다. 먼 나라 교회가 잘 하는 것은 그런대로 쉽게 배우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교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인정하고 배우는 데는 인색합니다.

둘째,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사람을 우군으로 받아들일 것을 가르치십니다. 우선 그가 예수님 제자 공동체를 헐뜯거나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바로 예수님 제자 공동체를 지지해주는 우군이요 동지라고 설득하십니다. 제자들은 적극적으로 자기들을 따르며 일거수일투족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을 동지나 우군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좁아진 제자들의 마음을 넓혀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사람들에게 우리와 모든 면에서 똑같아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요구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을 갖게 되고 동지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질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널찍한 마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동지와 우군의 범위가 훨씬 넓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나치게 외로움을 탄다면 우리의 마음이 혹 좁아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아 증후군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엘리아는 우상을 숭배하는 수백 명의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홀로 맞서 통쾌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뿌리가 뽑힐 확실한 전기가 마련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웬걸 야합의 아내 이세벨은 기세가 더 등등해졌습니다. 이에 엘리아는 기가 팍 꺾여 주저앉고 맙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은 자기 혼자 밖에 안 남았다고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전혀 달랐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이 7,000명이나 된다고 말씀하십니다(왕상 18:16~19:18).

셋째,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물 한 잔이라도 주면 그것을 매우 귀하게 여길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겉으로 드러나는 양보다 내면에 담긴 질을 중요시 여기십니다. 물론 물 한 잔도 목이 마를 때 무척 귀한 것입니다만 그렇게 값나가는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구하기가 쉽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해서 물 한 잔을 건네주는 사람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와 우리는 이 점을 예수님으로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마음의 질보다 외형적 크기와 양을 더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데 익숙해져 왔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 담겨 있다면 아무리 사소한 일, 작은 일, 하찮은 일이라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 십자가 지신 예수님. (출처 : 뒤레 판화집)  
 
제자들은 권좌로, 예수님은 십자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어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좁아 그를 품지 못하고 예수님은 그를 넉넉한 마음으로 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향하여 가고 있었던 반면 제자들은 권좌를 향하여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좁은 마음을 버리고 넉넉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향하여 걸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니 윤동주의 ‘십자가’란 시가 새삼스러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좇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우리가 좋아해 좇아가던 햇빛은 우리를 결국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너무 높아 머뭇거리게 되죠. 윤동주가 이 시를 쓰던 해는 1941년 그러니까 신사참배를 교회 안에서 하던 때입니다.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데'란 표현은 바로 교회가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어둡고 슬픈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의 마음이, 십자가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결국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하여 그도 십자가를 조용히 짊어짐으로써 어두운 시대를 밝히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늘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십자가를 짊어질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하늘처럼 넓어지게 될 것입니다.  

박득훈 / 언덕교회 목사·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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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o 2008-04-22 15:27:19
옳으신 말씀입니다만,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예수님에 대한 충성보다 상위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는 말씀이 집단주의를 포기하지 말라는 이기심아닐까요?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당장에 철저하게 버리고, 그 자리에 이웃 사랑을 앉히면 되겠지요. 사람이 한군데만 선택할수 밖에 없다면, 교회대신 이웃입니다. 그게 개혁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