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X와 고무장화
GEOX와 고무장화
  • 김종희
  • 승인 2008.04.28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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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 살아가는 사람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의 차이

3월초 멕시코 선교지 취재 여행을 갔다 온 뒤 한 달 20일 만에 다시 갔다 왔다. 이번에는 카메라 렌즈를 보강하고, 멕시코 치아파스와 사파티스타를 소개한 DVD 몇 개와 책도 미리 주문해서 살펴보는 등 나름 사전 준비를 했다. 신발도 한 켤레 새로 샀다. 지난번에 까만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발등이 뜨거웠다. 그래서 꼭 여름 신발을 신고 가리라 생각했었다.

출국 날짜가 임박했다. 다른 건 미리 다 챙겼는데, 신발 사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출국 직전에 서둘러 매장에 가서 살펴봤다. 이것저것 둘러보는데, 눈에 딱 들어오는 신발이 하나 있었다. 아주 가볍고 시원해서 여름에 신으면 무척 좋을 것 같았다. 가격표를 보니 $99. 웬만한 운동화의 두 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비싸다 싶어서 다른 것들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마음은 이미 거기에 꽂혀 있었다. 공연히 시간 끌 필요 없다 싶어서 눈 딱 감고 얼른 샀다. 매점 직원은 신발을 물로 빨면 안 된다면서, 신발에 뿌리는 스프레이를 사라고 했다. 그것까지 사니 $100이 넘었다.

   
 
  ▲ 신발 바닥에서 산소가 팍팍 뿜어져 나온다. 이런 명품 신발을 신고 똥밭을 누빌 생각을 했다.  
 
내가 산 신발의 이름은 GEOX. 한국에서는 제옥스라고 불린다. 명품에 관심 없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은 이 신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캐주얼 부문에서 이탈리아 1위, 세계 3위의 브랜드란다. 세계 최초로 숨을 쉬는 기능이 있는 신발로 특허를 받았다고 한다. 이 신발을 신는 사람에게는 건강과 쾌적함이 제공된다고 선전한다. 국내에서는 일부 연예인들이 신는다고 나와 있지만, 국내 인터넷 쇼핑몰에 상당히 깔려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산 신발의 국내 가격을 보니 16만 원이었다. 태어나서 가장 비싼 신발을 사서 신은 것이다.

마음에 부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선교지의 농장이나 숲을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취재하려면 이 정도 기능의 신발을 사서 신는 것은 그리 큰 죄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억지로 생각했다.

멕시코 치아파스의 농장을 갔다. 밭으로 들어가려는데 안내하는 장로님이 신발을 갈아 신으란다. 발이 푹푹 빠지기 때문에 장화를 신어야 한단다. 뙤약볕 아래 소들이 싸질러놓은 똥밭을 헤집고 다니려면 고무장화를 신어야만 했다. 고무장화를 신으면 신발 안이 엄청 덥겠지만 별 도리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농장에는 내 발에 맞는 장화가 없었다. 비싼 명품 운동화를 신고 소똥밭으로 들어갔다.

2시간 좀 넘게 걸으면서, 이 농장에서 어떤 곡물을 재배하는지, 소가 어떻게 자라는지, 기후 상태나 물 조건은 괜찮은지, 이것저것 물어볼 마음이 도무지 생기지를 않았다. 똥이 묻지는 않을까, 가시덤불에 긁히지는 않을까, 머릿속에는 온통 신발 걱정뿐이었다. 똥밭에 빠지지 않으려고 땅바닥만 내려다보느라, 저 멀리 펼쳐진 목초지나 옥수수 밭이나 소떼들의 상태를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아무튼 신발이 무사한 상태로 선교센터로 돌아왔으니 천만다행이다.

   
 
  ▲ 하지만 똥밭은 이런 고무장화를 더 환영했다. 참기 어려운 열기가 장화 안에 가득하다. 하지만 그래야만 거기서 일어나는 생명의 기운을 공유할 수 있다.  
 
저녁 식사 시간에 얼마 전 한국을 다녀온 집사님이 한국 얘기를 들려주었다. 호텔 음식 값이 왜 그리 비싼지, 사람들이 얼마나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지 탄식하면서 얘기하다가, 자기가 지금 입고 있는 남방은 한국에서 1만 원 주고 석 장을 사온 것이라고 했다. 옥수수나 사탕수수 밭을 다니다 보면 억센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찢어지기 일쑤기 때문에 싸구려 옷을 입어야 마음 편히 돌아다닐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치면 한국에서 손가락 안에 들 만한 부자였다. 먼 땅 멕시코의 시골을 개간하기 위해서 수십억 원을 쓰고 있지만, 그가 입고 있는 남방은 3,000원짜리였고, 그가 입고 있는 바지는 1만 원짜리였다.

딴에는 선교 현장을 맘껏 취재하겠다는 좋은 뜻으로 비싼 신발을 사서 신었지만, 현장에서 사는 사람들은 맘껏 일하기 위해서 싸구려 신발을 신고 싸구려 옷을 입고 있었다. 선교를 ‘머리’로 살아가는 사람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기자들에게 카메라 좋다고 좋은 사진 나오고, 노트북 좋다고 좋은 기사 나오는 거 아니라고 누누이 얘기했건만, 누워서 침을 뱉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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