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티스타 취재 불발기
사파티스타 취재 불발기
  • 김종희
  • 승인 2008.05.05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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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전사' 마르코스의 리더십…자립 모델 창출할 수 있을까

뉴욕에서 아침 9시 비행기를 타서 밤 11시 멕시코 치아파스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갈아타고, 중간에 몇 시간을 기다리고, 공항에서 3시간을 차로 달리는 등, 하루를 꼬박 채우고서야 가까스로 멕시코 치아파스 코미탄 익투스선교센터에 도착했다. 주위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들이 방해하는 바람에 지난번처럼 쏟아져내릴 듯한 별들의 환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은 별들이 가까이 다가와 조촐하게 환영 인사를 해주었다.

지난번에도 멕시코시티에서 하루를 머무는데도 머리가 아팠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뭔가 골치 앓는 일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그럴까, 멕시코시티의 대기오염 때문일까.

아마 탁한 공기 때문일 거다. 비행기가 멕시코시티에 도달했을 때 비행기 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리가 온통 뿌옇게 보인다. 해발 고도가 더 높은 지형이 도시 한가운데를 둘러싸고 있는 분지인데다가, 낡아빠진 버스와 트럭들이 뿜어대는 매연들은 달리 흩어져 갈 곳이 마땅치가 않다. 그래서 외부인이 멕시코시티의 매캐한 공기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챙겼던 타이레놀을 한 알 입에 털어 넣을까 하다가 그냥 참았는데, 코미탄에 오니까 두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서늘한 바람이 쉬지 않고 불어대고 있으니, 도시에서는 뭉그대던 매연들이 이곳에서는 잠시라도 머물 새가 없을 것이다. 도시가 주는 혜택과 시골이 주는 혜택은 이렇게 질적으로 달랐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준비를 조금 더 했다. 카메라 렌즈를 몇 개 추가했고, 스트로보도 새로 장만했다. 치아파스와 사파티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 DVD를 두 개 사서 지금도 진행 중인 이곳 농민들의 아픈 역사와 투쟁하는 모습에 대해 미리 공부했다. 멕시코 한인 이민사에 대한 책과 자료도 틈틈이 읽었다. 농장과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기 편하라고 가벼운 신발도 새로 샀다.

기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지만, 땅을 깊게 파려면 먼저 넓게 파야 한다. 진실에 가까운 좋은 글과 좋은 사진을 만들어내려면 주변 지식도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 물론 카메라 좋다고 좋은 사진 나오는 거 아니고 컴퓨터 좋다고 좋은 기사 나오는 건 아니지만, 마음가짐을 그렇게 가졌다는 말이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현지에서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어야 할 사람이 내가 도착한 다음날 새벽 일찍 한국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곳에서 스페인어를 가장 잘해서 통역을 도맡고 있는 조 목사가 한국으로 가버렸으니 앞으로 누구 도움을 받아야 하나. 순간 아찔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사파티스타 사람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스페인어 통역 없이 만나봐야 서로 눈만 껌벅거리다가 아무 말 못하고 헤어질 것이 뻔했다.

나의 영어 실력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스페인 선생이랑 함께 가면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걸 두고 전호후랑(前虎後狼)이라고 한다. 스페인어보다야 낫겠지만, 영어로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다 묻고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사파티스타 취재를 도와주겠다고 나선 조수아는 그쪽 사람들에게 취재에 응할 의향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고 인터뷰 약속을 해야 한다면서 나의 인적사항을 가져갔다. 그러면서 사파티스타에는 두 부류가 있는데, 하나는 정부와 적절히 타협을 해서 정부가 주는 모든 혜택을 받되 일정한 지역을 벗어나지 않기로 한 온건파가 있고, 이를 거부하고 사람들을 납치해서 돈을 요구하거나 살해하는 강경파가 있다고 했다. 2시간 거리 내에 사파티스타 마을이 있고 거기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기에, 일단 그쪽 의향을 묻고 오케이하면 인터뷰를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곧 알아보겠다고 하고는 헤어졌다.

나중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가 온건파를 만나는 것인지 강경파를 만나는 것인지 분명하게 확인하지를 못했다. 게다가 조수아가 사파티스타를 직접 아는 것이 아니고 사파티스타를 잘 아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었다. 은근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사파티스타가 탈레반과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안다고 불안감이 삭지는 않는다.

이런 저런 화면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갔다.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인질로 억류되거나 피살된 기자들 얘기가 떠올랐다. 미얀마 민주화 운동 현장을 취재하다가 군인의 총에 맞고 쓰러져서도 숨이 끊어질 순간까지도 카메라 셔터를 눌렀던 일본인 기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다가 아내와 두 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에이, 재수 없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고는 얼른 생각 머리를 딴 데로 돌리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러는 사이 조수아가 왔다. 그가 한 걸음 두 걸음 내게 다가올 때 그가 이렇게 말해주기를 속으로 바랐다. “걔들이 안 만나겠단다.”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 된다. 하지만 조수아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만나기로 했다.” 북쪽으로 차를 타고 4시간이나 가야 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게 먼 곳이라면 험한 정글이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이로군.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한 분이 동행하겠다고 했다. 혼자 보내는 것은 안심이 안 되니 같이 가겠다고 했다. 불안을 가라앉히기보다는 가중시키는 셈이었다.

마을은 관광지로 변신?

다음 날 아침 7시에 차에 올랐다. 햄버거로 아침을 때우고 4시간을 달려 사파티스타 마을에 도착했다. 걱정하던 정글은 전혀 아니었고, 평화로워 보이는 고지대의 시골 마을이었다. 사파티스타 사람들 특유의 그림과 글씨들이 길가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드디어 본부에 도착했다. 경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철문을 두 명의 남자가 지키고 있었다. 사파티스타의 트레이드마크나 마찬가지인 스키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군복도 안 입고 무기도 안 가지고 있었다.

조수아가 그들과 얘기를 했다. 지도부랑 약속이 다 되어 있을 텐데 경비랑 무슨 얘기를 오래 하나 싶었다. 경비는 10분만 기다리라고 하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 사이에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것이 보였다. 대개 이곳 주민들로 보였지만, 그중에는 방문객도 있었다. 경비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왔다. 들어가라고 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생각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지도자를 만나려면 이 정도 수고는 감당해야 했다.

철문을 통과한 다음 나무로 된 첫 번째 건물에 들어섰다. 일종의 경찰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역시 복면을 한 남자 네 명이 있었다. 일반 복장에 비무장 상태였다. 지위가 높아 보이는 두 명은 40대이고, 나머지 두 명은 20대로 보였다. 우리를 앉혀 놓고 신분증을 받아들고는 이름, 주소, 소속 등을 적는다. 글씨를 참 천천히도 쓴다. 그렇게 앉아 있기를 한 시간. 슬슬 긴장이 풀렸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고개를 돌려 이리 저리 살펴보고는 취재 수첩을 꺼내서 메모를 했다.

통과 절차가 대충 끝났나 보다. 그들은 신분증을 돌려주면서, “사진은 찍을 수 있지만, 마을 사람들과 얘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사진 찍을 맘도 없고, 얘기할 실력도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오로지 지도자와 인터뷰를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바깥으로 나왔다. 조수아에게 어느 건물로 들어가서 인터뷰를 하는지 물었다. 여기에는 지도자가 없다고 조수아가 대답했다. 으잉, 그게 무슨 말이람? 여기는 그냥 사파티스타가 자치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마을이지, 지도자들이나 무장 병력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자기도 지금 그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오, 마이 갓!

체게바라와 마르코스, 누구 인기가 더 높을까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니었지만, 원망의 마음만 품고 맨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단 경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파티스타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이 보였다. 안을 슬쩍 훔쳐보니 사람이 안 보였다. 몰래 들어가서 사진 몇 장을 얼른 찍고 나왔다. 건물 안에는 몇 개의 병실과 치료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병이 낫게 될 거라는 기대보다는 병이 악화될 것 같은 염려가 앞섰다.

병원 앞에는 작은 앰뷸런스가 한 대 서 있었다. 사파티스타가 유럽과 친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 앰뷸런스를 통해서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앰뷸런스는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인터 밀란에게 받은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는 몇 년 전 인터 밀란에게 친선 축구 시합을 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인터 밀란은 그동안 치아파스에 축구공, 물 등을 꾸준히 선물하면서 사파티스타와 교류해왔다. 돈을 보내기도 했다. 사파티스타는 이밖에도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유럽과 아시아의 국제연대기구들과 결속을 꾸준히 다져왔다. 이런 안목은 프랑스의 소르본대학교를 나와서 멕시코의 명문 우남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마르코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30분이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경내에는 마을회관, 구멍가게 등 있을 것은 다 있어 보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학교였다. 이들은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자기들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교사 뒤에는 기숙사도 보였다. 낡은 축사 같은 곳에서 학생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다. 마침 학생들이 마당에서 야외 수업을 하고 있기에 조심스레 학생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어느새 누군가가 달려왔다. 자신을 학교 책임자라고 소개한 이 젊은 남자는 사진을 찍는 것에 항의했다. 디지털 카메라의 기능을 몰랐는지 찍은 사진을 보자고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청하는 악수도 마지못해 하고는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내가 재범을 하지나 않나 하고 경계했다.

곳곳에 외국인이 보였다. 이 지역의 중심 도시인 산크리스토발에서 6개월은 민박집을 운영하고 6개월은 여행을 다닌다는 일본인을 만났다. 그는 사진만 찍을 뿐 사람들과 얘기할 마음은 아예 없어 보였다. 유럽에서 온 백인 남성 한 명과 미국에서 온 백인 여성 두 명은 작은 책상에 앉아서 이곳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인터뷰는 안 된다고 했는데, 어떻게 얘기를 나눌까 궁금해 하면서 가까이 다가갔다. 백인들은 별로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나누었지만, 같이 있던 사파티스타 사람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카메라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다.

백인들은 학생 자격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학생으로 이곳에 와서 그들로부터 사파티스타에 대해서, 멕시코 농민 혁명에 대해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머리 좋은 프랑스 기자도 있었다. 그는 기자라는 신분을 숨기고 학생으로 들어와서 그들에게 배우고 있었다. 기자라는 신분을 밝힐 필요도 없었고, 미리 취재 신청을 할 필요도 없었다. 사진만 안 찍을 따름이지 편히 앉아서 모든 정보를 다 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나중에 책을 쓸 계획이라고 했다. 물론 나의 경우는 스페인어를 모르기 때문에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그들의 육성을 직접 들을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었던 것이다.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면, 그는 탁월한 문장가에다가 달변가요 인터넷에 능한 50대 초반의 백인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총 못지않게 글로 사람들의 마음을 달구어서 혁명운동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으로 전 세계 동지들과 교신을 했고,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전사(戰士)’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가 쓴 책 중에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해냄) <분노의 그림자>(삼인)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다빈치) 등은 사파티스타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알 만한 번역서다.

마을 건물 곳곳에 체게바라 사진이나 그림 옆에는 마르코스 사진이나 그림이 있었다. 털로 짠 마르코스 인형도 있었다. 스키마스크를 써서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마스크 사이의 뚫린 구멍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고, 귀에는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총을 찬 채 말에 앉아 있는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카리스마틱한 이미지 때문에 그는 멕시코 젊은이들에게 체게바라와 같은 ‘인기 상품’이 되어 있었다.

이곳으로 올 때의 불안한 마음은 허탈한 마음으로 바뀐 채 돌아가야 했다. 코미탄으로 돌아가는 길에 산크리스토발이라는 도시를 들렀다. 사파티스타의 손길이 미치는 몇 개의 큰 지역 중 한 곳이다. 스페인의 전통 양식이 보존되어 있는 도시로, 유럽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서점이나 기념품 가게에는 사파티스타 관련 상품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이 만든 인형, 커튼, 옷, 관련 사진과 책, 음악 CD와 동영상 DVD 등이 즐비했다. 사파티스타도 어느 정도 상품화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자치권을 확보한 가운데 정부와 맞서 싸우려면 자급자족 문제를 해결해나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방인들의 호기심을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것을 ‘상업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색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는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와 맞선 이들의 싸움이 오래 갈 것이라는 예측은 그들이 병원과 학교를 자치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의료 문제와 교육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을 볼 때 가능해진다. 어느 정도까지 목표를 설정하고 현실성 있게 실현해나가고 있는지, 짧은 시간에 대충 훑어서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으랴만, 자신들의 병원과 학교를 갖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들의 의지와 지혜와 미래를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름에 다시 오면 꼭 제대로 살펴보리라.

취재를 못 했다는 무거운 마음과 앞으로 취재할 거리들이 산더미 같을 것 같은 묵직한 마음을 품고 선교센터로 돌아왔다. 사람들마다 잘 다녀왔냐고 묻지만, 딱히 뭐라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어 문법을 가르치는 미국 선교사는 그런 내가 안되어 보였는지, 다음날 익투스학교 학생 중에서 가족이 사파티스타였던 두 명을 소개해줬다. 그들과 한 시간 가까이 얘기를 나눴다. 하지만 고등학생인 그들에게 자신들의 할아버지나 친척들이 왜 사파티스타 활동을 해야만 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를 기대한 나의 바람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이들이 익투스학교에서 영어만 유창하게 공부해서는 곤란하고, 멕시코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할 이유를 새삼 느꼈다.

익투스선교센터도 장기적으로는 사파티스타와 연계해서 사역할 의지를 갖고 있다. 치아파스가 갖고 있는 중요한 문제인 가난과 무지는, 부패하고 무능한 멕시코 정부와 NAFTA로 대표되는 미국과 캐나다의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인해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 고리를 끊으려면 경제적으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기틀을 갖춰야 한다. 익투스선교센터는 그 마중물 역할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열악하게나마 교육과 의료 시스템뿐만 아니라 행정 자치 조직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양성 평등의 가치를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서 실천하는 등 남성 중심적 멕시코의 낡은 가치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자선을 베풀듯이 섣불리 접근했다가는, 아예 시작을 아니 한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들은 이미 제국의 군홧발과 종교의 비인간성을 오랫동안 경험하고 거기서 나름의 교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무엇을’ 주고받을까 고민하기에 앞서 ‘어떻게’ 주고받을까를 더 많이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왼쪽 사진은 사파티스타 경내를 바깥에서 본 것이다. 오른쪽 사진은 철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간 다음 철문 쪽을 찍은 것이다.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어린아이와 엄마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 경내에는 마을회관, 어린이 놀이방, 구멍가게 등 다양한 기능을 하는 나무 건물들이 많다. 공통점은 마치 우리의 민중벽화와 같은 그들만의 그림으로 예쁘게 장식했다는 것이다.  
 
   
 
  ▲ 병원 모습이다. 왼쪽 위는 외관, 중간은 내부, 아래는 앰뷸런스다. 오른쪽은 병실 같은데, 다른 짐들도 잔뜩 쌓여 있다. 여건이 매우 열악해 보였고, 안에서 환자나 의사는 보지 못했다.  
 
   
 
  ▲ 왼쪽 위는 초등학교 교실이고, 오른쪽 아래는 중학교 교실이다. 왼쪽 아래는 외국인(오른쪽)이 사파티스타 사람(왼쪽)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모습인데, 카메라의 출현을 꺼리는 반응을 보였다. 오른쪽 위는 멀리서 학교 교실들과 마당을 찍은 것이다.  
 
   
 
  ▲ 사파티스타가 한때 점령했던 산크리스토발이라는 관광 도시를 가면 서점이나 상점에서 사파티스타 관련 상품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 좌우는 털실로 짠 사파티스타의 지도자 마르코스 인형이다. 가운데는 마르코스의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는 파이프 담배만 물고 있지만, 다른 사진을 보면 헤드폰도 끼고 있다. 선글라스 낀 사진은 보지 못했다.  
 
   
 
  ▲ 오른쪽은 마르코스가 쓴 책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해냄)이고, 왼쪽은 말을 타고 멕시코시티를 도는 마르코스의 모습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우는 마르코스의 사진 배경에 맥도널드가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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