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신자유주의에 감염되다
한국 교회, 신자유주의에 감염되다
  • 김종희
  • 승인 2008.05.1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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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문제를 개인 문제로 왜곡…사교 집단에까지 넋 빼앗기나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학을 공부한 이은영 씨는 작년 1월 ‘신자유주의와 1990년대 이후 한국 대형교회의 변화’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90년대 이후 빠르게 성장한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 두 곳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는데, ‘신자유주의’라는 관점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은영 씨는 하용조 목사의 온누리교회와 김동호 목사의 높은뜻숭의교회를 분석 대상으로 꼽았다. 이 두 교회가 교인들의 수평 이동으로 인해 성장했고, 한국 교회에서 미래지향적인 교회의 본보기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은영 씨에게 신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그 어떠한 제재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시장을 구축하고, 그 흐름의 질서에 따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맹신한다. 무한 경쟁이 긍정되고, 그로 인한 양극화가 용인된다. 전통적인 가치는 효율성과 이익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적 가치로 대치되며, 국가의 사회 복지가 축소된다. 사회 안전망이 줄어든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은 혼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하고, 이러한 때에 공동체란 자신의 가족으로 한정된다.

우리 사회가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변화에 직면해 있을 때 교회는 ‘교인 숫자 정체 극복’이라는 내적 요구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변화는 교회에도 작용해 구조와 운영 원리에서 기업의 경영 원리와 마케팅 전략을 적극 도입하도록 했다.

첫째, 소비자 만족을 극대화하는 예배를 제공한다. 모두가 ‘참여’하기보다는 전문적인 인력에 의해 하나의 완벽한 공연과 같이 제공되는 예배에 부담 없이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둘째, 신자들의 삶의 다양한 필요성을 채워줄 특화되고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 셋째, 교단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 성장을 도모한다.

이러한 교회에서 목사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어떠한 신자유주의적 특징이 담겨 있을까. 첫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자본주의의 현 체제를 긍정한다. 둘째, 개인의 성공을 위해 자기 점검과 관리를 독려한다. 셋째, 정직한 개인과 행복한 가정이 건강하고 안정된 사회를 만든다는 신보수주의적 가치를 설파한다.

이러한 교회의 변화는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 첫째, 목회자와 교회 간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 둘째, 개인적인 불안을 일시적으로 감소시키는 기능을 한다. 셋째, 개인과 핵가족 중심의 신자유주의적 공동체성을 야기하고, 가족 이기주의를 조장한다. 마치 가정이 살아야 사회가 살아날 것처럼 얘기한다.

이상이 이은영 씨 논문의 기본 줄거리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까지 읽고 나서 “어쩌자고 교회까지 이 지경이 됐나” 하고 한숨을 쉴지 모르겠고,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문젠데?” 하고 되따질지 모르겠다. 신자유주의의 광풍(狂風)이 한국 사회를 강타한 다음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사회 양극화다. 양극화는 경제 영역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사회를 보는 눈,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양극화가 일어났다. 그래서 누구는 한숨을 쉬고, 누구는 아무 문제 없다고 대꾸할 것이다.

정확하게 언제라고 콕 찍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옛날에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 대할 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큰 교회 목사는 작은 교회 목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내 가정이 행복할 때 불행한 옆의 가정을 보면서 동정심을 가졌다. 다 같이 부족하고 다 같이 찌들어 살 때지만, 그 안에는 그래도 겨자씨만한 공동체 의식, 연대 의식은 남아 있었다.

신자유주의 광풍은 이 모든 미덕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게을러서 가난하게 살고, 무능해서 작은 교회 목회하고, 인격에 병이 있어서 가정도 제대로 못 꾸린다고 정죄된다.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네가 못난 탓’이다. 반면 내가 부를 누리고, 내 가정이 행복하고, 내가 큰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듬뿍 받은 ‘잘난 나 덕분’이다. 철저하게 다른 ‘너와 나’와 같은 개인들로 양극화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무서운 증세다.

온누리교회와 높은뜻숭의교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교회들은 교인들을 소비자로 보고 있다. 소비자는 숫자로만 무리일 뿐이지 의미로는 철저하게 각자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필요한 것보다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기업이다. 목사는 CEO다. 질 좋은 예배와 설교와 각종 세련된 프로그램들은 제품이다.

교인들은 교회가 제공하는 수십 개의 프로그램 중에 자기의 필요나 입맛에 따라 선택한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들이 원 없이 제공된다. 세상에서 못나게 굴지 말고 잘나게 살 수 있게끔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도록 독려하는 메시지로 충만하다.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불안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보다는 개인 생활의 변화를 강조한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지와 프로그램들이 일시적으로는 불안을 심리적으로 해소해줄 수 있을지 모르나, 불안의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한다. 마약의 일종과 같은 것이다.

가정 문제와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도 모두 ‘개인’의 문제가 된다.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사회가 엉망이 된 것인지,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 가정이 엉망이 된 것인지,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부지런을 떨어서 인터넷으로 논문 몇 개만 검색해도,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가정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붕괴되고 해체되고 있는지 금세 확인할 수 있다.

신자본주의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희년’도 이러한 교회에 오면 그럴듯한 프로그램으로 둔갑한다. 희년 사상도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점만이 강조된다. 귤이 희수를 건너면 탱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은영 씨는 “희년이 가지는 의의 왜곡과 그 실천의 개인적 차원으로의 축소는 사회적인 문제들을 탈정치화하고 개인들에게 책임을 부여한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교회의 60% 이상이 교인 50명 미만의 미자립 교회이다. 해마다 3,000곳 이상의 교회들이 문을 닫거나 장소를 옮기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누리교회가 선교를 위장해서 지역의 벽을 허물고 문어발 확장을 해서 지역 작은 교회들을 초토화하는 것은, 오늘날 제국(帝國)이 자본과 무기를 앞세워 국가의 벽을 허물고 들어가 힘없는 나라들을 초토화하는 것과, 신자유주의라는 동일한 사상과 가치에서 나온 똑같은 형태이다.

이 두 교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증세가 두드러지기에 연구 대상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들도 능력만 되면 이 가치를 따라가지 거스를 의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세련되게 포장해서 대중을 그럴듯하게 설득하는 능력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능력이 없으면 신자유주의 체제 내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안에서 살아남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할 힘을 기르는 것이 대안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성경적이다.

마지막 하나만 첨부하자. 피터 와그너, 로버트 슐러, 노만 빈센트 필은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목회에 접목해서 대량 유통한 서구의 선구자들이다. 신학적으로는 마이클 노박이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이은영 씨는 설명하고 있다. 한국 목회자들의 우상 빌 하이벨스와 릭 워렌은 이것을 훨씬 세련된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미국의 초대형교회 목회자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가치는 기독교를 가장한 신흥 사교(邪敎)라고 할 수 있는 조엘 오스틴에게서 만개했다. 그의 책은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베스트셀러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는 하용조 목사가 조엘 오스틴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한국의 몇몇 목사들이 조엘 오스틴을 비판하지만, 하용조 목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설마 이런 패거리 의식을 연대 의식이나 공동체 의식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국 교회는 신자유주의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 못해 사교 집단에까지 넋을 빼앗겨 있다. 미친 소를 먹고 인간 광우병에 걸릴 경우 증세는 10년이 좀 지나서 나온다고 한다. 조엘 오스틴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를 집어삼킨 한국 교회는 10년도 안 되어서 심각한 증세를 보일 것이다. 그런 징조를 우리는 이미 곳곳에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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