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숲속을 황금빛으로 밝히는 작은 꽃처럼
어두운 숲속을 황금빛으로 밝히는 작은 꽃처럼
  • 김민수
  • 승인 2008.05.16 13: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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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이야기] 괭이눈을 만나다

   
 
  ▲ 4월의 숲에 서면 어둑한 습지에 환하게 피어나는 꽃이 있습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보석함처럼 노랗게 무리지어 피어난 괭이눈입니다. (사진제공 김민수)  
 
"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아라." (눅 11:34~35)

4월의 숲에 서면 어둑한 습지에 환하게 피어나는 꽃이 있습니다. 마치 황금으로 만든 보석함처럼 노랗게 무리지어 피어난 괭이눈을 보면 나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사가 터져 나옵니다. 괭이눈의 종류도 상당히 많습니다만 그동안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만난 괭이눈을 정리해보니 괭이눈·산괭이눈·애기괭이눈·흰털괭이눈 모두 네 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다지 큰 꽃은 아니지만 옹기종기 모여서 무리를 지어 피어나면 어두운 숲을 환하게 밝히는 등불 같은 꽃입니다.
 
아시겠지만 '괭이'는 '고양이'입니다. 괭이밥은 고양이가 배탈 났을 때 속을 다스리려고 뜯어 먹는다고 전해지므로 '괭이밥'이 되었고, 괭이눈은 보석함처럼 생긴 꽃 모양이 고양이의 눈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노란 보석함이 햇볕 한 줌을 머금고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봄날 양지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게슴츠레 뜨고 있는 고양이의 눈과 똑같습니다.

고양이는 쥐의 천적입니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고양이의 번뜩거리는 눈을 보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치지 않는 쥐가 있으려고요. 고양이와 쥐가 마주쳤다 하면 무조건 쥐는 줄행랑을 쳐야 겨우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요즘이야 도심에 애완용으로 기르던 고양이들을 버려서 개체 수가 늘어나 문제가 되고 있긴 하지만 예전에는 곳간을 지키는 지킴이로, 집안의 쥐들을 몰아내려는 방편으로 고양이를 키우곤 했습니다.

요즘 도심에서 사는 고양이들은 쓰레기를 뒤져 먹고 살아간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을 것은 도심 하수구나 음습한 곳에는 쥐들도 많다고 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이 잠든 어둔 밤에서 고양이와 쥐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쓰레기봉투를 뒤지는데 이력이 난 고양이는 쥐를 잡는 법조차도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죠. 쥐, 그놈들은 애써 농사지어 곳간에 쌓아놓은 곡식을 야금야금 먹습니다.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도둑질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쥐라고 부르기보다는 쥐새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회를 돌아보면 쥐새끼 같은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수고를 훔쳐가고,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당당하고, 빼앗긴 놈이 바보라고 비웃습니다. 쥐새끼처럼 남의 수고를 훔친 것들이 큰소리치고, 벌건 대낮에 활보를 하는 것을 보면 망조가 난 모양입니다. 사이비가 그렇게 하는가보다 생각하시면서 위로받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버젓이 교회의 이름을 달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주장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포장해서 신도들을 현혹합니다. 그런 쥐새끼를 잡을 수 있는 고양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 혹시 쓰레기 뒤지는 맛에 길들여져 쥐새끼들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는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많은 쥐새끼가 판을 칩니다.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쥐새끼들이 판을 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그들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상징적으로 말하자면 쥐 잡는 고양이 같은 이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 숲 속에 피어 있는 괭이눈처럼 어둡고 음습한 숲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그런 교회, 그런 교인들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진제공 김민수)  
 
얼마 전 지인이 수술을 받아 병문안을 갔습니다. 마침 주일이라 병원에서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예배실에는 입추의 여지없이 가득했습니다. 그 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은 다양한 교파에 속해 있는 기독교인들일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어느 교단 목사님인지 저는 관심이 없었고, 목사님도 자신이 어느 교단에 속해 있다는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가 시작되니 "아멘! 아멘!" 소리가 터져 나오는데 말 한마디 끝나면 "아멘!", 아무 내용도 없이 "믿습니까?" 하면 "아멘!"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제대로 설교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환자분들의 절실한 문제들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런 쥐새끼들을 양산한 것은 다름 아닌 신도들이었구나, 맨 처음 시작이야 사이비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이젠 그것이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가며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구조가 되어버렸구나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교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교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하면 그만이겠구나, 그것이 병원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만이 아니라 개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예배에도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표류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물론 어느 한 쪽의 문제는 아니겠지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눈이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몸이라고 성할 리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눈, 교인들의 눈은 건강한지, 제대로 보는 것인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피어 있는 괭이눈처럼 어둡고 음습한 숲을 환하게 밝혀줄 수 있는 그런 교회, 그런 교인들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두운 숲속을 환하게 밝혀주는 작은 꽃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오늘날이야 황금 하나의 물신이 되어버려 마치 하나님나라가 순 황금길로 만들어졌네 뭐네 하는 상식이하의 복음성가도 유행을 타긴 했지만 황금이 가진 성질, 본질이 변하지 않는, 올곧은 신앙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갉아먹는 쥐새끼 같은 것들을 모두 몰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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