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선교는 공사 중
한국 교회 선교는 공사 중
  • 백운영
  • 승인 2008.06.18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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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흔히 길을 가다보면 ‘Under Construction’ 사인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 선교는 완성된 작품이 아니다. 서구 선교와 비교하여 비판하는 것은 조금 성급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 한국 선교가 이런 ‘대공사’ 사인을 유난히 보여주는 것 같다.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하지만 성인이 되기 위한 틴에이저의 꿈틀거림이 선교에 열정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여름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 사태를 통해 한국 선교를 점검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은 귀한 유익의 대공사 기간이었다.

한국 선교가 본격적으로 사역을 한 것이 이제 30년 남짓하다. 아직 인프라 구축도 제대로 못했으며, 행정적 기반이나 조직은 미약하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한국 선교는 아직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틴에이저에게 어른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또한 선교가 필요 없다는 목소리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오히려 제대로 훈련받고 올바른 자세와 준비를 통한 선교가 지속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늦게나마 아픔을 통해서 선교의 성숙으로 들어선 것이다. 한국 선교가 이제는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바란다. 좀 더 겸손하게 공사 기간의 다듬어지는 손길을 거치면서 멋있는 모습으로 성장해주기를 원한다.

아픔을 통해서 성숙하고 시행착오를 통해서 깨닫는 한국 선교는 당연히 미래가 있다. 우리는 오늘의 한국 선교를 보면서 실망하지 말자. 내일의 한국 선교가 가질 역량을 기대하고 그것을 만들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자. 그러면서 우리는 한국 선교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비록 아픔이 따르지만 바르게 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을 갖기 원한다.

서구 선교도 거쳐 간 성장통

우리는 흔히 서구 선교의 전략과 선교 방법, 선교의 성숙도를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간헐적으로 일방적이고 과시적이며 자신들의 고집스러운 방법을 쓰는 서구 선교사도 많이 있다.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서구 선교는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진 성숙한 모습을 갖춰왔다. 한때는 "Yankee Go Home"이라는 야유적인 멸시를 들어야 하는 과정도 있었다. 서구 위주의 문화를 심어놓고 현지인들에게 강압적인 요구를 하고 서구의 문화적인 옷을 입어야 교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일방적이고 과시적인 선교의 형태가 세계 각국에서 기독교의 편견을 심어주고 서구와 함께 기독교에 대한 마음의 담을 쌓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오늘날 선교지에서 한국적인 교회를 심는 모습보다 더 강도 높은 서구 제국주의 교회 뿌리 내리기 운동이었다.

그러나 서구 선교의 일방적인 선교도 현지인들의 반발을 통해서 도전을 받으며 교만이 꺾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겪으며 회개하기 시작하였다. 서구 우월의식도 한풀 꺾이고 서구적 형태의 교회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서구도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성숙했고 위기를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가 생겼다. 지난 200년의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통을 겪으면서 서구 선교가 오늘에 이룰 수 있었다

성장통의 다양한 형태들

1. 속도 위주의 과시적 선교
한국 교회는 지난 몇 년간 상상을 초월하는 도약을 했다. 선교사 숫자도 엄청난 속도로 계속 늘어가면서 당당 세계 2위를 자랑하고 있다. 17,000명의 선교사 숫자를 내세우고 이제 세계 선교는 한국 교회가 다 감당할 것 같은 기세로 허황된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선교사로 파송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건물이 올라가는 프로젝트와 다양한 센터, 학교, 병원 등등, 한국 선교는 성장 속도에 있어서 타 민족 선교가 따라 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왔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빨리 진행하는 우리 민족성이 선교 사역에도 여지없이 나타났다. 속도 위주로 일의 성취에 도취되어 현지인 동역자들을 제대로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옆에 있던 현지인들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우리가 세운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을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서서히 현지인들의 뇌리에 한국 선교사들의 진취적이고 경쟁적인 사역이 또 다른 서구 제국주의적 선교와 비교가 되지 않았을까?

2. 눈에 보이는 숫자 우선
숫자적으로 선교사가 많이 있다고 선교 사역에서 우위를 점하지 않는다. 일을 많이 하고 주위에 많은 사람이 들끓는다고 성공한 선교사라고 할 수도 없다. 혹은 큰 건물 세우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잘하는 선교 사역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과 관심 없이 맨몸으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선교 방법은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한국 선교의 가장 큰 시행착오는 영혼을 사랑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어주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사역에 집착한 것이다. 그러면서 선교사들은 사역 성과에만 초점을 맞추어 거두는 선교를 지향해왔다. 파송 교회도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교회 몇 개 세웠는가, 몇 명 세례 주었는가, 성과를 요구했었다. 선교사는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열매를 세고 그 열매를 보고하고 칭찬 받기에 급급했다. 현지인들의 언어를 배우고 문화를 익히는 과정을 생략하고 통역을 사용하여 한국적인 예배를 접목시키고 강요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때론 그들의 언어로 사영리나 달달 외워서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자기 성취에 도취되어 복음을 외치지 않았는지? 눈에 보이는 건물과 다양한 현대 설비로 교인들을 모으고 값비싼 선물을 나눠줌으로 물량주의적인 방법으로 교인 숫자 부풀리기에 더 관심 있는 모습도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히 현지인들은 선교사들을 돈 많은 부자로만 보게 되었다.

3. 쉬운 동역자 선택
선교사가 현지인 동역자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은 평생 걸려서 해야 하는 긴 여정이다. 한 사람을 키워내는 일은 그만큼 삶으로 가르치고, 본을 보이며, 삶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일이며,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현지 동역자를 발굴하고 키우는 시간을 기다리기보다는 돈을 바라고 몰려드는 현지인들을 고용하는 쉬운 길을 선택했다. 그런 과정에서 돈의 힘에서 오는 능력을 자신의 영적인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까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여 감동을 주지 못하고 당장 주머니에 있는 재정적인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하는 사역을 해왔다. 이런 현지인 동역자는 쉽게 몰려들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유익이 없으면 쉽게 배반도 한다. 그들은 일시적인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관계가 나쁠 때는 영구적인 해를 입히기도 한다. 자신의 비위나 맞추는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여 사람 키우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선교사들은 자신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4. 교단과 파송 교회의 요구가 우선
한국 선교를 뒤돌아보면 현지 교회와 현지 지도자가 필요한 사역보다는 내가 필요한 사역이 프로젝트로 자리 잡은 것이 많았다. 파송교회가 요구하는 일을 위해서 현지의 필요성이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지는 일도 많이 있었다. 선교사는 재정 지원하는 교회의 눈치를 보다가 필요 없는 프로젝트를 세우는 유혹을 받게 된다. 일단 건물이 있어야 사람이 모이고, 그 숫자에 따라 성공한 선교사로 인식된다는 생각에, 각종 선물을 주며 교인 숫자 늘리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 되었다.

다른 교단이 신학교를 운영하면 우리 교단도 신학교를 세워서 체면을 세우고 서로 경쟁하며 학생 뺏어오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서로 숫자가 많음을 위해서 재정 투자를 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파송 교단과 교회는 이런 선교사의 사역 사진과 사역의 숫자를 자랑스럽게 선교 과시와 홍보용으로 사용하는 일도 생겨나면서 한국 선교가 또 다른 형태의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모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성장통의 과정에서 깨닫는 것들

1. 고차원적인 예술
선교는 하나의 긴 과정의 연속이다. 심는 자가 있다면, 물을 주는 자도 있어야 하고, 거두는 자도 있다. 모두가 다 거두는 일만 할 수는 없다. 실적보다는 그 과정을 더 중요시 여겨야 한다. 열매를 따는 것보다는 열매가 영그는 과정 속에서 농부의 땀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선교 사역에 대한 평가가 숫자적으로 열매의 많고 적음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아픔을 통해서 배웠고 기다리는 것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선교 사역은 하나의 고차원적인 예술이다. 타문화권 사역은 다른 문화를 뛰어넘어 그들과 호흡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긴 여정이다. 그들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고, 그들의 문화가 내 것이 되고, 그 여정에서 그들과 친구가 되어주는 과정은 모든 선교사에게 뼈를 깎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몇 년이 되어도 때론 영혼을 얻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 채 단기간에 선교지에서 열매를 맺는 것을 기대한다면 너무 허황된 꿈이 아닐까? 이제 한국 선교는 서서히 이 부분을 깨닫기 시작했고 이러한 성장통은 현지 문화에 가까이 접근하는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다.

2. 현지 지도력 개발
선교사가 혼자 모든 일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독불장군 식의 선교는 이제 손가락질 받는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프로젝트 세우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시대는 이제 지났다. 현지인들이 내 사역을 이루어가는 데 보조자가 절대 아니다. 선교사가 주인이 되고 왕이 될 때 현지인 지도력 개발은 구호에 그치고 만다. 우리는 현지인들을 내 마음대로 고용하고 돈으로 부려먹을 수 있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현지 교회가 하는 일에 조력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론 현지 교회가 아직 능력이 안 되는 일은 우리가 채워주고, 현지 지도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우리가 보완해 주는 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지에서 사역은 현지인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선교사는 밑거름 역할을 하는 데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현지인이 다윗이 되고 선교사는 빛도 없이 물러나는 요나단의 역할만이 정당하다. 그리고 노력 끝에 현지인 지도력이 세워질 때 우리는 그냥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져버리는 것이 선교다. 선교사의 현재 사역을 언젠가는 현지 교회에 넘겨주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현지 교회가 주인의 역할을 감당하시기를 원하신다. 선교사는 죽고 현지 교회가 살아야 현지의 사역은 희망이 있다. 현지 교회는 흥하고 선교사는 그 열정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쇠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계획하고 필요한 사람을 키워내는 사역은 지금 하고 있는 사역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이제 한국 선교는 시간이 지나면서 현지 지도력 개발의 중요성을 서서히 깨닫고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선교사가 키워낸 현지 지도자들이 일하는 시대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다.

3. 현지 교회 선교 자원화
서구 선교가 최근 가장 후회하는 것은 현지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세우지 못한 것이라 한다. 최근 한국 교회는 우리가 선교의 주역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현지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도전하고 세워주고 개발해주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 선교는 앞으로 다른 민족의 교회가 선교할 수 있도록 밑거름 역할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서 세계의 다양한 선교 세력이 계속 일어나야 한다. 이것은 당장 효과가 나타나는 사역이 아니며 열매의 숫자를 자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뿌리를 잘 내리면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잠재력이 무한하다.

한국 선교사들을 통해 현지 교회가 우리를 뛰어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서구 선교는 초창기에 선교지에 가서 자신들의 피선교국이 언젠가 선교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인색했다. 선교사는 항상 큰 코에 파란 눈의 서구인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은 한 민족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의 교회들에게 주신 것이다. 이제 한국 선교가 성숙해지는 지름길은 우리만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깨어나 다른 민족 교회들과 함께 하고 그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들의 선교적 열정을 일으키고 그들도 하나님의 선교적 명령에 순종할 수 있도록 깨우치는 일을 우리는 하여야 한다. 이러한 변화도 성장통 과정을 거치며 만들어지는 한국 선교 발전의 기쁨이다.

4. 함께 일하는 협력 정신
세계 선교를 위해 다양한 자원이 있지만 그 자원은 현지 교회와 선교사에게 적절하게 분배되어 주어졌다. 그리고 모두에게 다 같은 자원과 은사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협력만이 이러한 한정된 자원을 공동 자원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쓸 수 있다. 이제 한국 선교도 함께 일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장점을 다른 민족이 가진 장점과 함께 연합할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을 아는 것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이제 사역 현장에서 이러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교단을 초월하는 하나의 신학교를 만들어서 다른 단체와 교단 선교사들이 함께 일하며 하나 된 현지 교단을 위해 일하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에 아름답다. 현지 교회를 섬기고 다른 민족의 선교사들과 함께 연합하여 일하며 함께 필요한 자원을 나누고 있다. 아직도 우리에게 맡겨진 남겨진 과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사역은 한 단체나 한 교회가 맡아서는 감당할 수 없는 협력과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일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세계의 모든 교회들이 이것을 위해서 같이 일하시기를 원하시며 그 협력에 주님 자신도 함께 포함되신다고 약속하셨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한국 선교는 자신을 낮춰야 한다. 다른 배경과 다른 세계관을 가진 민족을 품어야 하며, 그들의 것을 존중하여 한국 것을 강요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 재정의 많고 적음, 혹은 교육의 높고 낮음으로 인하여 남보다 위에 올라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며 헌신하는 모습은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현지인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진실한 모습으로 접근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진실함이 알려진다. 결코 성급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는 삶으로 먼저 그들의 마음의 빗장을 여는 모습이 더 필요하다. 성경적인 선교는 이상이 아니고 사랑과 섬김으로 만들어지는 현실이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서 오늘날까지 한국 선교를 개발해오셨고 많은 실수투성이 한국 선교가 그 나름대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 선교는 철저한 회개와 겸손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위기를 주셨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다고 우리는 위축될 필요가 없다. 고쳐야 할 것을 고쳐서 제대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 위기를 통해 아픔의 모습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성장통은 성숙을 낳는다. 아픈 과정이 지나면 더 많은 유익을 얻게 된다. 위기가 기회가 되어서 한국 선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을 갖춰가는 과정으로 들어서고 있다면 이것은 큰 복이다.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통해서 선교의 접근이 어디에서 잘못되어 있는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의 목적이 결코 열매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는 것을 늦게나마 아픔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탈레반에게 피랍된 팀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비교적 잘 준비되었던 샘물교회 팀이 한국 선교 전체를 대신하여 아픔을 통한 성숙의 산파 역할을 감당하게 된 것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올바른 선교 목적과 방법이 한국 선교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는 단체나 교회들에 의해서 계속 확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손길에 예민한 북미 한인 교회, 선교단체 및 선교사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백운영 / Global Partners 선교회 미주 대표
* 이 글은 LA 기윤실 소식지에 실린 것으로, LA 기윤실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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