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만한 존재로 살기, '카르페 디엠(Carpe Diem)'
충만한 존재로 살기, '카르페 디엠(Carpe Diem)'
  • 정병선
  • 승인 2008.06.22 09:3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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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태복음 6장 25~34절

하나님이 지으신 숲을 거닐면 생명의 교감이 있습니다. 숲의 향기가 코를 자극합니다. 나무가 내뿜는 생명의 기운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면 몸과 영혼의 모든 것들이 살아나는 것 같은 상쾌함과 풍요로움을 느낍니다. 또 숲을 걷다보면 나무하고 말을 주고받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제가 나무에게, 때로는 나무가 저에게 말을 겁니다. 이렇게 나무하고 말을 주고받다 보면 사람이나 책에서 들을 수 없는 큰 가르침을 배우는 게 있습니다. 제가 나무에게 배우는 큰 가르침 중 하나는 충만한 존재로 사는 태도입니다.

나무는 존재와 삶이 하나입니다. 사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요 존재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한국의 봄을 수놓는 진달래를 보세요. 진달래는 소나무나 플라타너스처럼 키가 크지 않다고 불평하는 법이 없습니다. 키 큰 나무들 속에 못난이처럼 숨어 있지만 한 번도 소나무가 되겠다고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그저 봄이면 제일 먼저 산을 붉게 물들이는 것으로 한없이 행복해합니다. 진달래는 오히려 키 큰 나무들 속에 숨어서 피기 때문에 더 아름답고 더 빛이 납니다. 목련처럼 꽃잎이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진달래만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진달래는 진달래로서 훌륭하게 존재하며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존재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뭔가를 성취해야만 만족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고 소유해야만 비로소 웃습니다. 사람은 자기 존재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유와 성취를 향해서 내달립니다. 끊임없이 비교합니다. 나는 왜 키가 작은 거냐고, 장동건처럼 꽃미남이 아니냐고, 삼성 회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여, 사는 게 힘들고 피곤합니다. 이런 인간을 향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 6:34).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사람들이 내일 일을 염려하느라 오늘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 사는 걸 한번 보세요. 온통 내일을 꿈꾸고 내일을 위해서 삽니다. 오늘 만족스럽지 못한 것을 내일은 채우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하면서 앞만 보고 달립니다. 정작 살아있는 순간은 오늘인데 내일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속은 온통 과거나 미래로 꽉 차있습니다.

대학 생활도 요즘에는 졸업 후 취업이 어렵다보니 입학하자말자 취업 때문에 고민하며 취업 준비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십년 전만 해도 대학 생활은 오늘에 충실했습니다. 대학 생활 자체를 즐겼고, 당시의 사회 문제를 놓고 고민도 하고 데모도 하면서 대학 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학 생활은 졸업 후 취업에 붙잡혀 있습니다. 오늘이 없습니다.

사실 대학 시절에 생각하고 배우고 경험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아 발견, 세상의 평화와 빈부의 문제, 신앙의 재정립,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 새로운 도전과 경험, 깊이 공부해야 할 전공, 젊어서 꼭 읽어야 할 수많은 책들, 정말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취업 준비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학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졸업 후 취업 준비하느라 정작 대학시절에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은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내일 염려는 내일 해도 충분하니 오늘은 오늘의 삶에 충실하라고. 내일 일을 염려하느라고 정작 오늘을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라고.

주님은 또 말씀했습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29절). 솔로몬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와 영광을 다 누린 사람이지만 그가 누린 영광도 들에 핀 꽃 한 송이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성취한 것들이 결코 시시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컴퓨터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놀랍고 경이롭습니까. 사람이 우주를 왕래하는 것도 놀랍고, 인공위성을 쏘아서 각종 정보와 전파를 송수신하는 것도 경이로운 일입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빌딩 숲을 보고 있으면 그 위엄에 압도당할 정도입니다. 첨단 과학으로 만든 무기의 정확성과 파괴력도 놀랍고, 의료 기술의 발달 또한 감동적일 만큼 뛰어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할 수 없는 진실은 그 모든 업적이 길가에 피어있는 꽃 한 송이의 영광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언뜻 들으면 이해가 잘 안 됩니다.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의 수고와 성취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뭘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이미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충분한 세상, 영광으로 가득한 세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괜히 나서서 뭔가를 이루겠다고 입에 거품 물고 달려들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셨고, 충분한 세상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알베르 까뮈의 유명한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은 삶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이기지 못해 애꿎은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감옥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던 주인공은 어느 날 독방 침대에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다가 천장에 뚫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푸른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그의 눈에 들어 온 하늘은 마치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하늘을 보았지만 하늘이 하늘로 보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이 사형수는 분노와 절망이 사라지면서 기적 같은 환희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시간이 되면 정확하게 들어오는 세끼 밥도 그냥 밥이 아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마다 감격이 복받쳐 올랐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가운데 사형 집행일이 다가왔습니다. 관례대로 한 신부가 최후의 미사를 인도했습니다. 신부가 미사를 끝내고 돌아가는데 참 이상했습니다. 신부에게서 사물에 대한 어떤 자각이나, 순간을 깊이 바라보며 사는 삶의 흔적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형수가 느끼기에 신부야말로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후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질 자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죽음을 위해서 성사를 드리고 있는 신부가 오히려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기억하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란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야. 니콜라이야,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란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야."

저는 톨스토이가 말한 것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닷가 언덕 위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것이 정말 사는 것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라고. 그런데 사람들은 한결 같이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이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산다고.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를 살지 못합니다. 교실에 앉아 있지만 친구하고 영화 본 생각하고 있는 학생. 밥을 먹고 있지만 눈과 마음은 온통 텔레비전 연속극에 빠져 있는 가족. 산책을 하면서 사업 구상을 하고 있는 사람. 이렇게 몸과 마음이 따로 입니다. 현재 속에 미래가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잘 살 수 있다고,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살아야 내일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내일에 대한 꿈이 있어야 현재를 열심히 살 수 있고,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만 내일의 발전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의 꿈에 집중하고 몰두해서 내일의 꿈은 이룰 수 있을지 몰라도 삶이란 것이 꼭 그 꿈 하나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톨스토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감사하고, 자유하고, 당당하고,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하지, 꿈을 이루는 것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삶은 삶으로서 삶의 충분한 목표가 되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세상에서 삶보다 더 큰 목표, 삶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삶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은 끝없이 과거나 미래로 달아나려는 마음을 지금 여기로 끌어와서 지금 이 순간 내 존재를 깊이 통찰하고 내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선물들을 깊이 바라보며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제가 몇 전부터 현재를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현재를 살아보려고 연습을 좀 해봤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디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것에 집중해서 반찬의 짠맛, 매운맛, 신맛, 단맛을 음미하고, 나물의 향기도 맡고, 밥알 하나 속에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방울과 햇빛과 비가 깃들어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마음은 그저 이일 저일, 과거와 미래로 자유롭게 떠다닙니다. 마음먹고 현재에 집중하다가도 어느새 마음은 현재를 떠나 구름처럼 둥둥 떠다닙니다. 마음을 현재에 붙잡아 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저는 배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꽉 찬 존재가 되어 살아가는 것임을. 먹을 때나, 마실 때나, 숨을 쉴 때에나, 앉아있거나 서있을 때에나, 일을 할 때에나,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줄 알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깊이 바라보며 사는 것보다 더 온전한 삶은 없다는 것을.

시인 정현종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는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 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아! 정녕 그러합니다!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할 수만 있다면 모든 순간은 다 꽃봉오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앞에 충만한 것들로 꽉 채워 놓았습니다. 더 나은 무언가를 찾아 뛰어다닐 필요가 없을 만큼 이미 모든 것이 충만합니다. 뭔가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실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한데 존재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취하겠다고 뛰어다니다가 나도 죽이고 너도 죽이고 있지 않습니까. 욕망이 존재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를 파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인생의 슬픈 현실입니다. 이런 슬픈 인생을 향해서 주님은 존재의 충분함을 역설하셨습니다. 이미 충분하다고.

정병선 목사 / 수원한길교회를 개척하고 15년 동안 목회하다가 최근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고 몸을 돌보며 글쓰기에 힘쓰고 있다. 저서로는 대장간에서 만든 <어느 목회자의 고백>, <신앙의 마스터클래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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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장성도2 2010-10-22 04:31:20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책도 구입해서 읽어 볼려고합니다.
나빠질려고 하는 제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