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있을지언정 좌절은 없단다"
"고통은 있을지언정 좌절은 없단다"
  • 김종희
  • 승인 2008.12.11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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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전신마비 할아버지가 자폐아 손자에게 보내는 편지

▲ "샘, 너는 상처받은 두 영혼이 찾아낸, 위대한 사랑의 보물이다. 내 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서 정말 고맙다. 샘, 사랑한다. 매일, 매순간 널 사랑한다."
온몸이 마비되어서 전동 휠체어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날 날씨가 하도 좋아서 앞뜰에 나가 산책을 했다. 그런데 그만 휠체어 바퀴가 구멍에 빠져버렸다. 주변에 휠체어를 꺼내줄 사람 하나 없는 평일 오후였다. 도와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그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좌절했다.

그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지 못할 때도 좌절했다. 음식점 입구에 있는 계단 앞에서도 좌절했다.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느낄 수 없는 사소한 일들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좌절했다.

좌절은 분노로, 분노는 과격한 행동으로 옮아가기 마련이다. 좌절한 할아버지는 분노를 못 이겨 휠체어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손에서 피가 났다. 그걸 보고는 다시 무력감에 빠졌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체념했다. 휠체어에 가만히 앉아 있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환한 빛이 내리비치더니 예쁜 천사들이 날갯짓하면서 내려와 할아버지의 휠체어를 옮겨주었을까. 천만에.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입 다물고 있던 새들이 갑자기 떠들어대기 시작했을까. 천만에. 새들은 이전부터 지저귀고 있었다. 하지만 구멍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좌절감과 싸우느라 새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을 뿐이다. 평화의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 "내 아버지의 장례식 날이었다. 우린 이제 막 육 개월이 된 널 장례식에 데려갔지. 나는 슬픔에 잠겨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네가 기어와서 자꾸 내 무릎 위로 기어오르려고 하더구나. 마치 내가 슬퍼하는 걸 알고, 가까이 다가와 날 어루만져주려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넌 날 볼 때마다 내 무릎에 앉고 싶어했다."
할아버지의 좌절은 이유가 충분했다.

그는 20대에 템플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해서 박사가 되었다. 공부하던 중에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조기 결혼을 했다. 젊은 정신의학 전문의로서 중독 증세 분야에서 잘나갔다. 교외에 좋은 집을 샀고, 두 딸도 낳았다. 남부럽지 않은 행복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여행은 너무 짧았다. 결혼 6주년을 앞둔 어느 날, 할아버지의 아내는 암에 걸렸다는 판정을 받았다. 길고 긴 투병 끝에 암은 완치됐지만 부부 관계는 완치가 어려울 만큼 금이 많이 갔다. 결혼 10주년을 맞아 할아버지는 아내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멋진 새 차를 아내에게 선물하기로 한 것이다.

새 차를 찾으러 가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런데 맞은편 차도를 달리던 화물 트럭에서 커다란 타이어가 튀어나와 건너편 차도를 달리던 할아버지의 차 지붕을 덮쳤다. 한참 동안 잃었던 의식을 되찾은 할아버지는 얼굴의 감각만 살아 있었고, 목뼈가 부러지고 경추가 끊어져서 전신 마비가 되었다. 그때 나이가 33살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부부 관계는 회복은커녕 더 이상 유지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에 빠졌다. 사고가 난 지 꼭 10년 뒤에 아내는 할아버지 곁을 떠났다. 이혼한 것이다. 그리고 아내는 혼자 외롭게 병과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교통사고를 겪은 지 20년 뒤, 아내와 이별한 지 10년 뒤, 할아버지가 53세 되었을 때다. 할아버지의 작은딸이 예쁜 아기를 낳았다. 좌절의 늪에 빠져 있던 할아버지에게 손자 샘은 조잘조잘 지저귀는 새처럼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 할아버지는 손자와 깊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샘은 두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부터 자폐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 하고, 화가 나면 머리를 바닥에 찧고, 말을 걸면 악을 쓰고 소리를 질러댔다.

할아버지는 딸을 보고 울었고, 손자를 보고 또 울었다. 하지만 더 이상 좌절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자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들을 편지로 쓰기로 했다. 자폐아인 손자가 할아버지의 얘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수 있을까, 처음엔 기대가 안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샘에게 해줘야 할 이야기가 훨씬 많아졌다는 사실을 할아버지는 이내 깨달았다. 그래서 한 통 두 통, 4년 동안 32통의 편지를 썼다.

▲ "샘, 우리 이렇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몸에, 저는 마음에 사고를 당했어요. 하지만 우리 영혼이 다친 건 아니에요'."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말해주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날마다 겪었고, 샘도 앞으로 날마다 겪어야 할 역경을 알려주고 싶었다. 역경에 맞서 싸우면서 깨달은 것들을 들려주고 싶었다. 싸움을 멈추는 것만으로 어떻게 평화가 찾아오는지도 말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좌절을 벗어던지고 평화를 누리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산속에서 참선하다가 득도를 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였다. 할아버지는 자기의 인생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전신마비로 살고 싶지도 않았고,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죽고 싶기만 했다. 마취 기운이 조금씩 가시는데,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조금도 돌릴 수 없으니 누군지 알 길은 없었으나,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간호사에게 들었는데요, 혹시 심리 치료하시는 의사 분이세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 여자는 속삭이듯 말했다. ‘한 남자를 너무나 사랑했다. 그런데 그가 떠나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니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이 엄습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자살의 강한 충동에 휩싸였다. 그런데 그 순간, 그런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라 겁이 났다.’ 이런 얘기였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자기 고통을 듣고 있는 사람의 끔찍한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고통이 전부였고, 오직 고통 받는 자신을 도와주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 여자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듣는 내내 깊은 연민으로 가슴이 아팠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정작 자기 자신의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거였다. 당시 할아버지는 오로지 그녀의 고통에 집중했고, 그녀만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좌절은 사라졌을 것이다. 그때 할아버지는 전신마비로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잃고 절망에 빠진 낮은 목소리가, 당신은 여전히 세상에 쓸모 있는 존재라고 들려준 것이다. 그날 밤 그녀와 할아버지는 서로를 살려낸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샘에게 들려주면서, 우리의 연약함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연약함은 마음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나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도 열어줄 수 있는 열쇠 말이다. 할아버지가 좌절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힘이 바로 이것이었다.

샘의 할아버지 대니얼 고틀립이 쓴 편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다. 작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샘에게 보내는 편지>(Letters to Sam)가 그것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국 전역의 독자들에게 큰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 "상처받기 쉬운 여리고 약한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비상 깜빡이를 켜고 "제게 문제가 생겼어요. 하지만 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라고 표현할 수 있을 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이 훨씬 안전한 길이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며칠 전 미군 전투기가 추락하는 참사로 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아내의 어머니, 15개월 된 큰딸과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된 작은딸을 하나님 품에 먼저 보낸 윤동윤 씨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아직은 그에게, 그리고 그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 것이 무척 이른 것 같다. 하지만 대니얼 할아버지가 깊은 좌절을 딛고 희망의 새소리를 들은 다음 손자 샘과 수많은 ‘샘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어주었던 얘기를 그에게 전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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