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그마한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조그마한 실천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이승규
  • 승인 2008.07.18 2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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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아이 입양해 키운 미국인 제니퍼…'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먼저 없애야'

   
 
  ▲ 제니퍼가 자신이 그리고 있는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니퍼는 25년 전 한국 여자 아이 두 명을 입양해 지금까지 키우고 있다.  
 
50대 중반의 백인 여성 제니퍼는 25년 전 한국 여자 아이 두 명을 입양했다. 두 아이의 한국 이름은 이은조와 이영란. 미국 이름은 조앤과 래니다. 둘은 그동안 잘 자라 지금은 부모 곁은 떠나 샌프란시스코와 뉴햄프셔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제니퍼는 현재 벽화를 그리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크리스찬이다. 제니퍼를 7월 11일 롱아일랜드에 있는 '샌안토니고등학교' 예배실에서 만났다. 제니퍼는 약 6m 높이 정도 되는 벽천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니퍼가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 결정은 어떤 계기나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대가족으로 살았던 제니퍼는 막연하게 결혼해서도 가족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하면 대가족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한 제니퍼는 입양을 하기로 했다.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은 힘들었고, 그 대신 좋은 방법이 입양이라고 생각했다. 제니퍼는 이렇게 결심을 한 뒤 입양에 대한 공부를 하고, 생각을 정리했다. 괜히 마음만 앞서 덜컥 입양을 했다, 아이를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입양을 하기로 결심을 굳힌 뒤 제니퍼는 전화번호부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화번호부에는 주로 아이를 잠깐 봐줄 수 있는 베이비시터를 구한다는 광고만 가득했다. 그녀는 잠깐 아이를 맡아서 봐주기보다는 직접 데리고 살기 원했다.

대가족 이루고 싶어 입양

제니퍼는 굳이 한국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과 상황이 맞는 아이라면 미국 아이든 아시아 아이든 남미 아이든 상관없이 입양을 할 생각이었다. 사실 그녀는 입양을 결정할 당시 결혼을 했고, 아이도 2명이 있었다. 그래서 조건이 매우 까다로웠다. 친자식이 있으면 입양한 자녀를 차별할 수 있기 때문에 입양이 힘들다. 처음에 입양을 시도한 아이는 이런 조건 때문에 입양에 실패하기도 했다.

제니퍼는 실망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렇게 수개월을 기다린 끝에 만난 아이들이 은조와 영란이다. 제니퍼는 이 아이들에 대한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우리 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 순간도 기다릴 수 없었다. 미국과 한국 사이에 시차가 있다는 생각도 못하고, 한국 시간으로 새벽에 전화를 해 낭패를 보기도 했다. 결국 그녀의 부탁을 받은 입양 기관 관계자가 한국으로 날아가, 이 두 아이를 데리고 왔다.

입양 당시 은조는 3살, 영란이는 1살이었다. 둘은 자매였다.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딸 4명을 모두 키우기 힘들어, 은조와 영란이를 입양 기관에 보냈다. 제니퍼가 낳은 자녀들은 7살과 5살이었다. 가족 모두가 입양에 대한 생각이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돼왔던 터라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더 반가워했다고 제니퍼는 말했다.

   
 
  ▲ 입양한 딸들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공부했던 한글. 제니퍼는 이 공책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은조와 영란이 역시 어려서 그랬는지 적응을 잘했다. 자신과 눈 색깔이 다르고, 머리 색깔도 달라 이상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들은 미국에 온 첫날부터 제니퍼와 그 가족들을 낯설어 하지 않았다. 제니퍼는 당시 한 살이던 영란이의 경우 자신을 보자마자 안겨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3살이던 은조는 큰딸과 큰아들 사이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큰아들은 영란이를 '프로비'(소방관들이 쓰는 말로 부사수란 뜻이 있다)라 부르며 특히 예뻐했다. 아이들 역시 언니와 오빠를 잘 따랐다.

제니퍼가 입양을 결정할 당시 고려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녀들의 나이. 그녀는 아이들이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입양을 원했다. 혼자 생각으로는 결혼하고 나서 당장 입양을 하기 원했지만, 큰 딸이 5살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제니퍼는 아이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우려와는 달리 아이들은 모두 흔쾌히 제니퍼의 결정을 지지했다.

이는 입양한 은조와 영란이도 마찬가지다. 제니퍼는 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자신들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결과는 마찬가지. 이 아이들 역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제니퍼와 언니, 오빠와 함께 살기로 했다.

물론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린 건 아니었다. 은조는 백인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적응에 애를 먹었다. 그래서 은조는 지금도 그 때 기억이 남아 모든 일에 남보다 두 배 더 열심히 일한다는 게 제니퍼의 설명이다. 둘째 영란이는 여러 인종이 다니는 학교에 다녀 힘든 점은 별로 없었다.

제니퍼는 주변의 사람 중 아직도 입양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그녀는 직접 낳은 자식들과 입양한 자식들 사이에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나지 않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며, 매우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제니퍼는 이 아이들을 자신이 키웠기 때문에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러면 좋겠지만, 제니퍼는 만약 지금이라도 은조와 영란이가 친엄마를 찾겠다고 하면 적극 도와줄 생각이다.

제니퍼는 1960년대를 미국에서 보냈다. 당시 전 세계를 휩쓸었던 히피 문화의 영향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 작은 일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입양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입양이 매우 큰일이지만, 제니퍼의 경우에는 아주 작은 일일 수 있다.

제니퍼는 자신의 막 결혼한 첫째 딸 역시 입양을 하겠다고 했다며, 비록 조그마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계속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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