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
  • 김기현
  • 승인 2008.08.18 20: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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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이면 저를 찾아오는 형제가 있습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저랑 일대일로 잠시 만나 책을 소개해주고, 읽은 것에 대해 몇 가지 코멘트를 해줍니다. 그 중간에 이런저런 신앙적 의문을 묻기도 하지요. 이번에는 “저런 사람도 구원 받았을까요?”라고 물어옵니다. 그리스도인이 거듭났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사람들이 지탄하는 이들, 명백히 부정한 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그런 질문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구원은 철두철미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선물입니다.(엡 2:8)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더하거나 보탤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는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분만의 고유한 결정입니다. 하여,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옹기장이의 주권이라 했습니다. 흙으로 어떤 그릇을 만들 것인지, 같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모양과 색깔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옹기장이에게 달려 있지요. 어떤 사람을 구원하건 말건, 그를 사용하건 말건, 심지어 축복하건 말건, 그것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그것을 혹여 의문이 아니라 시빗거리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입니다. 우리가 누구관대 홀로 하나님께만 속한 권한에 대해 논란을 한단 말입니까.

둘째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르며, 하늘의 시각과 땅의 관점이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이 먼 것처럼 멀며, 순간과 영원이 같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삼상 16:7) 우리는 외형으로 판단하는 우를 자주 범합니다. 하나님은,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사람의 외모로 차별을 두는 일이 없습니다.”(골 3:25)

물론 우리 인간의 지성과 영성으로 성서를 근거로 미루어 짐작할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리 틀리지 않는다는 것도 맞습니다. 인간이 다 틀리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해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을 비하하는 위험한 반대편 오류에 봉착합니다. 게다가 구원은 내적이거나 사적인 것이 결코 아니고, 제자도라고 보는 저로서는 타인의 신앙에 대해 헤아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타인의 구원을 가늠할 위치에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셋째, 불건전한 질문입니다. 누군가 성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은 창조 이전에 뭘 하고 계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지.” 실제로 지옥 간다는 악담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라는 깨우침의 말입니다. 그런 물음은 백해무익입니다. 알 수도 없고,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하나 없고, 간절히 대답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쓸 데 없는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하라는 게지요.

<가룟 유다 딜레마>에서 저는 정반대 질문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유다는 자살했으니 지옥 가는가?”(72-82) 위의 질문 속에 은근히 저런 나쁜 놈은 지옥 가야 마땅하다는 심보가 작용한다면, 이는 반대로 지옥 가야 하는 유다가 불쌍하지 않느냐는 심리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없었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테니 불가피하게 악역을 맡은 자라는 인식이 널리 그러나 옅게나마 퍼져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는 그 책에서 역설했습니다.

그런 질문의 이면에 놓인 아마도 속뜻은 그런 인간은 구원받지 않았으면 바람일 것입니다. 그건 구원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설령 그렇게 보이더라도 우리 할 도리는 구원 여부가 아니라 그의 영적 삶과 상태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형의 시각으로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잃은 아들 되찾은 아비의 심정으로 환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구원을 기뻐하고,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여간에, 그곳에서 저는 천국 가면 세 가지 놀랄 것이 있다는 존 뉴턴의 말을 인용했지요. 뉴턴에 따르면, 우리는 당연히 천국 오리라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 놀라고, 정말이지 오면 안 되리라 한 사람이 있어서 놀라고, 다름 아닌 내 자신이 천국에 있다는 것으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의 초점은 누가 왔나, 안 왔나가 아니라 ‘나’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은혜로 그곳에 있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입니다. 그것으로 놀라고 노래하면 됩니다.”(80)

넷째, 건강한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베드로는 요한의 장래와 운명에 퍽 관심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요 21:22) 요한복음이 해설한 바와 같이 방점은 그가 영원히 산다는 것이 아니라 후자, 곧 쓸 데 없는 일에 상관하지 말고 예수 따르라는 것입니다. 시니컬하게 말한다면, ‘너나 잘해라’입니다. 베드로의 질문 이면에는 요한에 대한 걱정과 안타까움이 아니라 비교 의식과 경쟁 심리를 예수님은 간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불건전한 질문을 건전한 사역으로 시선을 이동시킵니다. 그 맥락에서는 건강한 일이란,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입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 곧 우리 각자에게는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 일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남을 돕기 위해서 그가 어떤지를 물을 일입니다. 타인의 구원 운운에 몰두하는 것은 높아지고자 하는 심리로, 보이지 않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탓이라면 지나친 걸까요?

마지막으로 누군가 나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은 내가 다른 이를 보면서, 저런 사람도 그리스도인이냐, 어떻게 저렇게 행하고, 살면서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라며 혀를 끌끌 찰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느 곳에서는 그런 나를 두고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하는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런 것도 예수 믿는다고, 그것도 목사라니, 허참 나 원, 말세로고.”

실제로 제 경험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교회 홈페이지에 저를 두고 독설로 도배를 합니다. 저를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저랑 같은 교회 대학부를 다녔던 분인데 저로서는 전혀 종잡을 수 없습니다.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제가 그 형제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지 않아 아직 모릅니다.

그 경험을 통해 복음의 본질인 용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나의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내게 원수가 있듯이, 나도 누군가의 원수”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용서해야 할 하나의 이유입니다. 주님이 원수 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마땅합니다. 동시에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나를, 나를 원수로 여기는 이들에게 용서를 받는 길입니다.

“저런 사람도 구원받았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는 날, 혹은 그분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 날에는 묻지도 않을 것이고, 알려줄 필요도 없을 것임에 틀림없지만, 딴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나 같은 놈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도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질문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나요?” 예서 멈추면 안 되지요. “나 같은 죄인 구원하신 주 은혜 놀라워!”

김기현 목사 / 수정로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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