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 사각지대'에 있는 한국 교회
'지휘 사각지대'에 있는 한국 교회
  • 김명곤
  • 승인 2008.10.04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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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개성' 목회의 폭력

30여 년 전 군대에서 나는 소위 '특과'라는 보도 사진병으로 근무하면서 제대할 때까지 내무생활을 하지 않았다. 다섯 명의 사진병들은 헌병대가 제공한 별도의 건물에서 24시간 상시 대기 상태에서 부대 내의 행사뿐 아니라 본부대는 물론 예하 부대의 각종 사고 사진을 촬영하고 밤늦게까지 암실에서 현상과 인화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한 대한민국 남성들은 모두가 알 듯 내무생활만 하지 않아도 얼마나 '한량한' 군대 생활인가!

그러나 다른 병사들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중대 본부 선임하사나 '애비' 중대장은 물론 영외 거주를 하는 직계 선임하사도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때로 '돌림빵'식 린치가 가해지고 누군가 반병신이 되어나가고 '아이고, 대고!' 곡소리를 내어도 따로 떨어져 폐쇄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으니 알 턱이 있겠는가. 아마도 '특과'에서 파견 근무한 사병들은 나와 같은 경험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리 새로울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30년도 넘은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한마디로 현재 한국의 교회의 상황이 마치 '지휘 사각지대'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같은 비유에 대해 '너무 심하지 않은가'고 벌컥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격이 떨어지고 심하다고 생각되더라도 용서하시라. 어디 육체적 고통만이 고통이랴! 모두가 끄덕끄덕 군소리 없이 따라가던 유신 시대에도 숨 막혀 못살겠으니 '겨울 공화국'을 폐쇄하라, 폐쇄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한국 교회가 얼마나 폐쇄된 집단인지. 아니, 스스로를 폐쇄시킨 집단인지. 한국 교회는 '특과' 중에서도 희한한 '특과'다.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밖으로 새어 나오는 법이 별로 없다. 모두가 '덕이 되지 않는다'며 쉬쉬하거나 윗선에서 직·간접으로 요구한 대로 '순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은 덮어진다.

어렸을 적 바로 앞집에 살던 친구의 순박하기만 하던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새벽기도부터 시작해서 삼일예배 금요철야기도 주일예배 등 시도 때도 없이 교회를 드나들며 신앙생활에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도 존경하던 '주의 종'에게 당한 뒤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쫓겨나듯 고향을 등졌고, 주의 종은 그 이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년을 목회하다가 다른 교회로 옮겨갔다.

나는 이후로도 기가 막히게 유사한 일들을 교회 안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지만, 단 한 번도 시시비비가 제대로 가려져 처리되었다는 일을 들어 본 적이 없다. 한국 교회의 '치리와 권징'은 액자 속에 고이 담겨진 유물이 된 지는 오래고, 설사 이를 적용시킨다 하더라도 '수령님'은 예외가 되고 말았으니. 그래서 교회 밖의 세상이 교회를 청소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수백 년 내려 왔다는 무슨 '신조'나 '고백'이라는 것을 볼수록, 그 유명하다는 신학 사조들을 뒤적여볼수록, 성서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는 교파와 교단의 헌법이나 규정을 볼수록 현실 교회에 관한한 실망을 넘어서 '의혹'만 키울 수밖에 없었으니. '지구는 네모났어! 아멘?' 하고 강요한 종교 법정을 나오며 '그래도 지구는 도는데…'라고 중얼거렸다는 갈릴레이 갈릴레오의 고백처럼 '이건 아닌데'라고 속으로만 주억거리던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런데, 이 같은 '지휘 사각지대'에서 가장 큰 문제는 병사들이 잘 안 따라준다는 생각으로, 그래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간단없이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군대는 목적 지향적 집단이므로 '안 되면 되게 하고,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러나 군대에서의 물리적 폭력은 국방부 시계만 고장 나지 않는다면 30개월(지금은 20여 개월) 후면 자유를 얻을 것이기에 성격이 무던하다든가, 나의 경험처럼 그 무슨 신념이라는 것만 있으면 그런대로 견뎌낼 수 있는 것들이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곳에서 체험한 것들은 요모저모로 '약'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종종 우리 시대의 어른들은 '저놈 군대갔다 와야 사람 될 것이여!' 그랬었다.

교회가 군대와 다른 점

그러나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성취는 관계적 공동체 속에서 맺어진다는 정당한 '고백'이 있는 신자들에게 교회는 '갔다 오는' 곳이 아니고 '가서 죽도록 머물러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군대와는 다르다. '전출'은 가능하다 해도 웬만해서는 '탈영'을 할 수 없는 곳이 교회라는 공동체일 것이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죽을 때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것이 평신도들의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물론 견디다 못해 제도 교회를 뛰쳐나와 '나 홀로 교회'나 '가정 교회'에 머물게 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언젠가는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평신도들의 신앙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개성' 목회에 시들고 있는 영혼들

그런데 이 같은 교회에서 지도자를 잘 만나면 더할 수 없이 즐겁고 신바람 나는 일이겠으나, 엉뚱한 지도자를 만나면 죽을 맛이 아니겠는가. 마치 군대에서 재수 없게도 성질이 고약한 선임을 만나면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이곳저곳에 생채기만 남게 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지도자를 잘 못 만나면 사람이 되기는커녕 돈 내고 시간들이고 정력을 있는 대로 쏟아 내고 상처만 남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현실이니…

군대만큼이나 폐쇄된 집단인 교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라는 것이 나의 오랜 교회 생활의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고, 현재 교계 자체의 자성어린 분석이며,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어느덧 '교회 문제는 목회자의 문제다'라는 명제가 성립될 정도로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는 '문제'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하여 '요즘 세상에 목사가 되려는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이다'는 우스갯소리가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목사의 권위와 위신은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물론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목회자 혼자서 꾸려가는 곳은 아니다. 목회자와 많은 지체들이 상호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체험되고 일궈지고 가꾸어 지는 공동체가 교회다.

그런데 이 관계 공동체에서 '목사'라는 직분은 인정하던 인정하지 않던 가히 절대에 가까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정신세계를 다루는 종교 집단의 특성상 힘의 불균형한 관계가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곳이 교회인 것을 감안하면, 더구나 전통적인 예배 형식과 각종 '영적' 모임에서 '사로잡힌 청중'(captive audience)이 될 수밖에 없는 평신도의 처지를 감안하면 이 같은 목사의 위치는 그리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만큼만 자란다'는 말이 나온 것도 바로 목사의 '끗발'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목사가 왜 이렇게 '문제'가 된 것일까. 돈을 너무 밝혀서인가. 여자 문제 때문인가. 아니면 교회 운영의 전횡 때문인가. 모두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정도는 현재 교회 안은 물론 교회 밖에서 조차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 되어 버렸을 정도로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이같이 외피적인 '죄과'에 해당되는 것들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목회자의 문제와 관련하여 따로 떼어서 반드시 화두로 삼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목회자의 유별난 '개성'이다. 여기서 '개성'이란 죄성 가득한 인간 특유의 못된 캐릭터는 물론, 특정 은사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개성'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일반 신도들의 일상에서 젓줄이 될 영성 생활과 직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신도들은 목회자의 '개성'이 교회의 흐름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일찍이 종교 심리학자 리처드 기어츠는 한 개인의 신앙의 출발과 신앙의 심화는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해서만 아니라 종교적 심볼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기어츠의 주장에 따르면, 이 같은 종교적 심볼들은 신자들에게 '강력하고 침투적이고 오래 지속되는'(powerful, pervasive and long-lasting) 무드와 동기들, 그리고 헌신을 가져 준다. 기어츠가 구체적 목적을 갖고 따로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심볼들 가운데 아마도 목회자의 '개성'이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한 인간의 '개성' 자체는 그 자체로 있을 때 그리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나, 그것이 전 교인과의 관계에서 장기간 행사되어질 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기어츠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신자들에게 강력하고 침투적이고 오래 지속되는 것이 바로 목사의 '개성'이 될 것이기에 문제의 소지를 안게 된다는 말이다.

마치 군대에서 성질 고약한 고참을 만났을 때만큼이나, 마치 '겨울공화국'에서 만난 검은 안경의 대통령만큼이나 성격이 지나치게 강하고 위압적이라거나, 걸핏하면 단상에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질타나 저주를 한다거나, '정직'을 덕목으로 내세워 말을 함부로 한다거나, 똑같은 실수와 회개의 눈물을 분열증적으로 반복한다거나, '지혜'를 내세운 거짓말이나 이간질에 길들여져 있다거나… 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랴.

물론 이런 반박도 가능하다. "목회자의 '개성'이 무슨 대숩니까. 하나님만 만나면 되지요" "목사도 사람 아닙니까. 우리 목사님은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이처럼 영성이 고결하고 순수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거기에는 삶에 지쳐서 위로받기 위해 나온 초신자들도 있고, 나처럼 일요일이 지나 월요일 화요일까지 개성 강한 목사의 잔(잡)소리에 시끄럽고 짜증스런 기분으로 지내는 믿음 안 좋은 사람도 있으니.

피학적 영성에 길들여진 한국 교회 신자들

나는 묻고 싶다. '성질 목회'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신자들이 만나는 영은 과연 하나님의 영인가 목회자의 영인가. 다시 묻는다.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의 '개성'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인가.

간단히 말해 '개성' 목회의 문제는 이것이다. '개성' 목회는 가당치않게도 신자 개개인들 사이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목사의 '개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와 반비례로 하나님의 영의 활동은 그만큼 약화된다는 말이다. 하여 '개성' 목회에 시달리고 있는 신자들은 종말론적으로 열려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하기보다는 자연스레 '목사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마치 사회주의 이상론에 천착하기보다는 '수령님의 말씀'에 늘 눈을 돌리는 타락한 사회주의자들처럼.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진배없으니 그저 순종하라고 권유하는 신자들이 있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한가지만은 자문해보기를 청한다. 혹 나는 인간의 강력한 영에 지배 받기를 즐기는 '피학적 영성'에 길들여진 것은 아닐까? 혹 나는 자아와 타아의 실체를 구분하지도 못하고 리얼리티를 볼 수 있는 눈이 멀어버린 거짓 사랑에 함몰된(fall-in-love) 것은 아닐까.

'개성' 목회의 폐해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목회자의 '치유'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겠다. 얼마 전 어떤 목적으로 제법 크다는 이민 교회의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머리가 혼란해져 X 클릭을 하고 나와버렸다. 그 교회 프로그램을 보니 하여튼 좋다는 프로그램은 모두 총 망라되어 있었다. 대략만 훑어보면 일대일 성경공부, 제자훈련 DT, 2:7 제자훈련, 새가족 성경공부, 주일 장년 성경공부, B.C.F. (성서적 제자훈련), 은사개발 성경공부, 바나바 성경공부, 이슬비 사랑의 편지 훈련, 스데반 사역 훈련, 전도 폭발 훈련, 4영리 전도 훈련, 다리 예화 선교학교, DTS 제자훈련, 디모데 성경연구원…. 모두가 일반 신자들의 영적 성장과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들이며, 이들 중 골라잡아 하나만 제대로 해도 쑥쑥 자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과문한 탓인지 나는 아직 일반 목회자들의 성장과 치유를 위한 프로그램이 이처럼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고 목회자들이 그 같은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다는 얘길 들어본 일이 없다. 그나마 희년 제도에 따라 7년째 이 같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데도 이 조차 이런 저런 이유로 넘기는 목사들이 태반이라는 소식을 접한 지는 오래다. 다시는 성장과 치유가 필요 없을 정도로 '완성품' 목회자를 쏟아 놓을 만큼 신학 교육이 그리도 탄탄해서일까. 아니면 목사가 되는 순간 '완성품' 도장이 콱 찍혀 나오기 때문일까.

나는 감히 '개성'이 판치고 있는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영이 과연 '하나님의 영'인지를 묻고 있는 중이다. 여러 형태의 '개성'에 의한 폭력을 당하고 있음에도 사랑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그리고 '주의 종'을 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폭력에 '공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있는 중이다.

어찌어찌하여 잘 견디어 내서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할지라도 다른 신자들은 다리가 부러지고 여기저기 멍울이 진채 억울하게 '전출'을 가야하고, 심하면 '탈영'을 하는 것을 보고도 나는 짐짓 모르는 채 방조한 죄를 범해온 것은 아닌가? 도대체 나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질서를 생각해본 일이나 있었던가.

사랑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행사되는 '개성' 목회의 폭력은 사라져라. 피학적 영성에 길들여져 자신뿐 아니라 이웃까지도 파멸케하는 자기도취적 거짓 사랑도 사라져라. 껍데기는 가라.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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