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의 찬송가
순교자의 찬송가
  • 양국주
  • 승인 2008.11.10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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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국주의 하늘 백성 이야기, '남한 성도를 위한 굳센 당부'

그의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다. 순교자의 딸로 북한에서 살아온 그녀는 이제 85세의 할머니가 되었다. 할머니가 건네준 아버지의 찬송가는 내 숨을 멎게 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고,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전해준 증표였으므로…. 9월이 저무는 어느 날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다시 단동으로 갔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들었다. 할머니는 이 찬송가를 건네며 남한 성도들의 굳센 신앙을 당부하였다. 할머니의 육성을, 그 의미가 살아 있는 범위에서 정리하였다. (필자 주)
 

   
 
  ▲ 아버지가 마지막 유품처럼 남겨놓은 찬송가. (사진 제공 : 양국주)  
 
아버지가 평양 집을 떠나시던 1949년 4월 어느 봄 날. 집 안팎에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땅거미 어둑한 8시 무렵 보위부에서 소련에 보낼 벌목공으로 차출되었다며 아버지를 데리러 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하셨던 것일까. 아쉬운 작별 인사조차 변변히 나누지도 못한 채 이제 떠나면 마지막 길이려니 싶으셨던지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를 남기셨다.

우리 가족들은 그 이후로 아버지 소식을 접할 길이 없었다. 보위부는 모른다며 아버지 소식에 관해 일절 함구했다. 찬송가는 우리 가족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유품이요 마지막 정표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고를 접했던 것은 6.25전쟁으로 전세가 뒤죽박죽이던 1951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영수' 한 분이 아버지의 최후라며 들려주신 게 고작이었다. (영수란 지역 교회 안에 장로나 지도자급의 인사를 가려 치리자로 세우기 위해 선택하고 별도의 신학 교육 과정을 이수하도록 하던 제도를 말한다.)

“왜 장로는 고집스럽게 죽음을 택했는지 모르겠어. 나처럼 죽지 않을 방법도 있었는데 말이지. 다시는 예수 안 믿겠다고 눈 한번 찔끔 감았으면 자유롭게 풀려날 수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살기보다 죽기를 택한 사람 같았어. 소나기가 오면 일단은 피하고 봐야 하는 건데. 나는 아버지가 왜 그리 험하게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그렇다. 당시 북에서는 조선 해방 전쟁으로 남북이 통일되어 하나가 되는 줄 알았는데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집혀지고 말았다고 여겼다. 아버지는 6.25전쟁 직전에 끌려가셨던 곳에서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순교를 선택하신 것이다.

60년이 지난 지금 찬송가를 꺼내보이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살기를 택했던 아버지의 동료를 신앙의 변절자로 몰아세우거나 내 아버지의 우직하셨던 신앙 절개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도 아니다. 세상천지가 자유로운 곳에서 사는 믿는 자마다 변절하지 말고 올곧은 믿음을 지켜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당시 아버지는 우리가 살았던 평북 지역에서 평양으로 내려와 3개월씩 계속된 영수들의 신학 교육과 성경 학습을 받곤 하셨다. 당시 아버지가 평양으로 내려와 받던 영수 교육에는 16명 정도가 한 그룹으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이후 우리는 공화국에서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혀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다고 형제들이 아버지의 올곧은 신앙을 무책임한 행동으로 비난하지도 않는다. 우리 모두는 정말 힘들고도 험한 인생을 살았지만 주님을 저버렸다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46년, 조카와 큰언니는 엄마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조카의 나이가 이제는 67세를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겠다. 큰언니가 살아 있다면 지금은 구순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을 텐데…. 개성 출신의 형부는 공부하느라 늦장가를 가는 바람에 언니와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서울로 내려가 의학계의 큰 인물로 활동하다가 대학교의 종합병원장까지 지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어진 피붙이의 운명이 긴긴 겨울 꽁꽁 얼어붙은 손마디처럼 앙상하게 느껴지지만 이제 내 나이 85세. 본향을 찾아 갈 그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 
 

   
 
  ▲ 피고름을 빨고 말리는 지난 60년, 순교자로 삶을 마친 아버지의 찬송가를 지키며 우리 온 가족은 신앙의 유산을 지켜나가고 있다. (사진 제공 : 양국주)  
 
지난 60년 동안 아버지의 유품인양 지켜온 찬송가. 검열이 심해지면 땅 속에 파묻고 파내기를 반복했다. 촉촉이 젖어 곰팡이가 낀 찬송가를 말리고 또 말렸다. 정말 피고름을 빨고 말리는 60년이었다. 순교자로 마치신 아버지의 찬송가를 지키며 우리 온 가족은 신앙의 유산을 지켜나가고 있다. 마치 바로 앞에선 야곱이 자신의 120년의 삶을 '험한 세월'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험한 세월이 우리에게는 아버지를 찾아 갈 기쁨이요 소망이 되었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마지막 길도 지켜드리지 못하고 가시밭 광야 같은 어느 천지에서 진토가 되었을 아버지의 육신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오지만 하늘은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뎌 텬사여 찬송하세 찬송 셩부셩자셩신"
"하나님은 복의 근원 텬하사람 모도찬송 텬군들아 찬미하라 찬미할이 부자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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