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
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
  • 박지호
  • 승인 2008.11.29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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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국 교수와의 '일문일답'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모범 정관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이런 질문을 ‘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엮어봤다. 백종국 교수의 LA 기윤실 건강 교회 포럼 강의 내용, 그의 저서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백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를 토대로 일문일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1.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

제도 개혁은 논외로 하고 인간의 의식만 탓하는 것은, 마치 교통 체계가 엉망인 교차로에서 계속 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운전자의 빈약한 인식만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간혹 교회의 특정 문제를 비판하면 제도 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제도 개혁을 강조하면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보자고 말하면서 개혁의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합하여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고가 잦은 교차로에서 ‘긴급 구난’과 ‘제도 개선’과 ‘의식 개혁’은 모두 필요한 수단이다.

2.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로막는 인간적인 처사다.

한인 교회도 이미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민주적'이란 말은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행사되어야 하는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인간적인 처사라는 오해도 더러 있다. 이러한 생각은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물들어 있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조직과 운영 체제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의적으로 개념을 설정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3.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

먼저 각종 개념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대체로 개념들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주의며, 왕정의 반대는 공화정이다. 흔히 교회 정치를 비유할 때 사용하는 신정(theocracy)의 반대는 세속정(polity)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신정(神政)이라는 개념은 역사상으로나 신학적으로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했으므로 현 시대에서 비유로만 쓰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현재 존재하는 체제들과 비교해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민주주의 독재주의
신본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가톨릭 교회
인본주의 민주 국가 독재 국가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신교의 조직과 운영 체제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영적인 계급에 속하며, 이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는 직무상의 차별 외에 다른 취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이 여러 차례 명백하게 강조했다. 신학자이며 정치학자인 니버(Niebuhr)와 템플(Temple)도 이와 같은 입장이며, 한국의 교회 정치 전문가인 박병진 목사나 임택진 목사도 개신교의 교회 정치가 '기본적으로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물론 일반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표상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표상이므로 만일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통치를 위임해도 좋다. 그러나 개신교의 입장은 이 직접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종료되었으며, 지금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느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는 더 이상 개신교의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올바른 운영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도록 계시된 성경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직접 계시를 대치하는 차선의 체제이다.

4. 교회 정치 체제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 없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을 원칙으로 삼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죄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교회 안에 퍼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니버(Niebuhr)는 이에 대해 “인간은 정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설파한 바 있으며, 템플(Temple)은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정당하게 다루는 형태의 구조이며, 민주적 원리는 기독교의 산물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 교회 운영은 성경적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충분하다. 한국 교회가 과거에 목회자 중심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사가 가장 근대적 교육을 많이 받고 대부분의 일에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회중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과거처럼 교회의 특정 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정치학 교수가 포함된 회중 앞에서 극단적인 정치적 편견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근본적으로 사회가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 다 통달한 지도자를 찾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전문적 분업 체제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점이다.

5. 개교회 정관과 노회, 총회 법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노회와 총회의 법이 상위법이다.

한국의 교회 정치 전문가인 박윤선 목사나 임택진 목사는 '상회'나 '하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으로 세워진 개혁 교회는 치리회의 높고 낮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설치하지만 이들 사이에 등급이 없고,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노회나 총회가 당회의 상회가 아닌 것처럼, 교단 헌법도 교회 정관의 상위법이 아니다. 교단 헌법은 공동의 신앙고백과 질서를 위한 일종의 협정문이다. 개 교회의 정관이 이를 상위법으로 인정할 때에만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도 각 교단의 헌법은 각급 치리회가 헌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자체의 규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예장통합 제 63조, 예장고신 제77조, 기장 제 43조). 이 규정의 활용 폭을 각 교단이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교회 정관을 둘러싼 다양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단이냐 그리스도냐를 결정해야 한다면, 개혁적 그리스도인은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교회는 일반 사단에 준하는 지위를 갖기 때문에 개별 공동체의 정관은 갈등 국면에서 중요한 사법적 판단 기준이 된다. 매우 혼란스럽고 비민주적인 정관은 교회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촉발시키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이면서도 잘 정비된 정관, 즉 모범 정관에 가까운 정관의 존재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갈등을 예방하거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에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6. 모범 정관을 채택하면 담임목사의 권위가 위축된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목사의 권위다. 설교단 위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그러나 목사의 권위는 영적일수록 바람직하다. 대체적으로 영적인 권위를 갖춘 목사는 제도적인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적인 권위가 떨어질수록 그 목사는 제도적인 권위로 보호를 받고 싶어 한다. 영적 권위의 한계는 무한하지만, 제도적 권위의 행사는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제도적 권위를 추구할수록 그 목사는 성경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칼빈(Calvin)의 제네바 통치는 때로 가혹했다. 그러나 칼빈이 어떤 직위를 기반으로 그러한 통치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칼빈은 가르쳤고, 시민들은 복종했다. 한국의 목사들은 칼빈을 본받는 게 바람직하다.

7. 모범 정관이 오랫동안 축척되어온 교회의 전통과 충돌할 수 있다.

개혁이 혹여 개악이 아닌지 자세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통의 힘을 들어 개혁을 위한 논의 자체를 방어할 일은 아니다.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단 헌법들을 연구해보면 교단 헌법들이 가진 난맥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헌법에는 규칙이 가져야 할 요건조차도 미비할뿐더러, 지난 100여 년 세월을 거치면서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제주의를 강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보수주의 이론가인 버크(Burke)가 지적한 대로, 문화는 역사의 축적물이므로 무조건 바꾸거나 파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좋은 점은 살리고 나쁜 점은 부단히 바꿔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현재의 체제를 방어하려는 자는 전통이니 바꿀 수 없다고 억지를 쓰기보다는 개혁주의적 논지에 비추어 현재의 내용이 어떻게 옳은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8.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잡음은 없겠지만 교회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민주적 조직과 운영은 조직원들의 자발적 헌신과 참여를 높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재 체제는, 만일 그 독재자가 유능하다면, 확실히 단기간의 운영에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전문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민주적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는 장기적 관점에서 효율적인 운영을 기할 수 없다. 특히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창조적 발상과 역동성은 민주 체제가 보장하는 열린 의사소통과 기회의 균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동구의 공산주의 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서구의 민주주의 체제가 동구의 공산 독재 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것인데, 핵심은 체제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보장했는가에 달렸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에 급속한 경제 성장에 대한 오해로 독재의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독재가 급속한 성장에 유익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 소모사 치하의 니카라과, 김일성 치하의 북한이 가장 빨리 발전한 나라가 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리어 독재의 파멸적 구렁텅이에 빠져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박정희의 독재 때문에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이룩한 기적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인 교회는 선교의 대상인 모든 지구촌 공동체에게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와 번영의 문화를 보여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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