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민 사역도 좋은데, 이제 목회를 하시지요'
'빈민 사역도 좋은데, 이제 목회를 하시지요'
  • 이태후
  • 승인 2008.12.03 17: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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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왜 빈민 사역인가?

사람들은 나를 보면 가끔 이런 말을 한다. “목사님, 빈민 사역도 좋은데, 이제는 목회를 하셔야지요.”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이 목회가 아니라고?’ 그래서 조심스럽게 대꾸한다. “이게 제 목회지요.”

좋은 뜻으로 권유하는 그들의 생각 속에는 '목회'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사역이라는, 매우 제한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지역 교회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기존 교회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돌보는 빈민 사역은 목회가 아닐 수밖에.

문제는 이런 생각이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목회자들도 빈민 사역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은 양육, 전도, 해외 선교에 비해서 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심하게 말하면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행사 정도로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빈민 사역은 교회에서 감당해야할 일들 가운데 비교적 덜 핵심적인, 하면 좋고 형편이 안 되면 안 해도 그만인 사역인가?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의 삶을 통해 선포된 복음의 핵심이 바로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억눌린 자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지,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기로 하자. 

   
 
  ▲ 이태후 목사는 주민 대부분이 흑인이고 절반 가까이가 절대 빈곤층에 속해 있는 North Central에 살고 있다.  
 
복음과 빈민 사역

빈민 사역은 우리 신앙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너무나 친숙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 중의 하나가 복음이다.

복음은 헬라어 Ευαγγελιον에서 유래한 말이다.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당시 로마 제국의 어휘들을 사용해서 하나님나라의 메시지를 설명했다. 주님으로 번역되는 Κυριοσ, 하나님의 나라로 번역되는 Βασιλεια 등이 그 예이다.

Κυριοσ는 로마 황제를 일컫는 호칭이었고, Βασιλεια는 그 황제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우리에게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하나님의 아들 (the Son of God, ο υιοσ του θεου)도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를 일컫는 어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 저자들은 제국의 어휘인 Ευαγγελιον을 사용했다. 이 단어는 황제와 연관된 소식 중, 제국 시민들에게 좋은 일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황제가 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황제의 대를 이를 태자가 태어난 일이 곧 Ευαγγελιον이었다. 그런 일이 있을 경우, 로마의 광장에서는 팡파레를 울린 후, 시민들에게 그 소식을 선포했다. '황제께서 전쟁에 승리하셨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축제를 선포하고, 1인당 밀가루 1자루와 올리브기름 1단지를 배급합니다.' 축제 기간 동안, 시 곳곳에서는 다양한 볼거리가 제공되었고, 유지들은 추렴해서 잔치를 벌였고, 음식과 포도주는 무상으로 공급되었다.

이렇게 보면, 설령 개인적으로 별 의미가 없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주어지는 혜택으로 인해 전쟁에서의 승리나 태자의 탄생은 제국의 시민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분명하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 기쁜 소식은 로마의 속국들에게는 불길한 소식이었다. 그것은 게르만이나 골 지방에 사는 이들에게 패전의 소식이었고, 로마에서의 성대한 축제는 속국의 신민들에게는 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Ευαγγελιον은 보편성을 지니지 못한, 그들만을 위한 기쁜 소식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의 사역이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적 Ευαγγελιον, 복음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로마 황제의 Ευαγγελιον은 오직 제국 안에 있는 이에게만 적용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은 모든 인류에게 은혜가 된다고 그들은 담대히 설파했다.

참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인류를 위한 좋은 소식이라고 외치는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던 제국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세상을 호령하는 권세를 지녔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식민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했던 이름 없는 유대인에 불과했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약속은 로마 황제의 선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반역 행위 바로 그 자체였다.

로마 제국의 박해에도 복음은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312년,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선포했다. 노예와 여자들, 그리고 무식한 이들의 종교로 여겨졌던 기독교가 이렇게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나와 너를 분리하지 않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복음(Ευαγγελιον)이었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이 Ευαγγελιον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누가 복음 4:16-21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누가는 이 구절을 예수님의 첫 번 설교로 소개한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 금식하시고 사탄에게서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 지방으로 돌아오셔서 처음 전하신 말씀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낭독하신 것이다. 누가에 의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 곧 복음에 대한 정의였다.

하나님의 영이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셨는데,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얼핏 보면, 이 내용은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 과는 거리가 있는 것처럼 들린다. 복음은 죄인이 예수 믿고 용서 받아서 하나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그렇다. 그런데 누가 복음에 나온 이 구절에는 죄 용서, 회개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 어떻게 예수님의 Mission Statement에 죄 용서와 구원에 대한 말씀이 없을 수 있을까? 사실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죄 사함 받은 새로운 피조물로 이루어진 반문화적인(counter-cultural) 공동체를 묘사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회복의 공동체이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포로된 자가 자유를 얻고, 눈먼 자가 시력을 되찾고, 눌린 자가 자유케 된다는 것은 분명 누구에게나 좋은 소식이다.

불의와 모순으로 인해 고통당하거나, 그런 현실로 인해 괴로워하는 이라면 이사야의 예언이 귀에 음악처럼 들릴 것이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메시아의 구속이 회복의 메시지임을 선포하셨다. 그 회복의 기쁜 소식은 나를 구속했던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개인 구원에서 시작하는데, 내 영혼의 구원이 회복의 끝은 아니다.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무너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원하신다. 그렇다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담의 범죄로 무너진 질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태후 목사 / 템플대학교 IVF 간사

* 다음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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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ierra 2010-10-19 12:35:09
목사님께서 그동안 연재했던 기사들을 모두 읽었습니다. 정말 감동적이군요!
목사님께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네 흑인들에게는 목사님이 귀한 존재고 목사님에게는 그
흑인들이 아주 귀한 존재라는 사실이 비춰집니다. 건강하십시오. 웬지 제 자신이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