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소경이야?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거야!"
"당신 소경이야? 대체 무슨 죄를 지은 거야!"
  • 김종희
  • 승인 2008.12.05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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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병 고치고, 제자들은 판단하고, 바리새인은 딴죽 치고

2009년 새해가 한 달도 안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올해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꼭 한 번 다 읽어야지" 결심한다. 창세기, 출애굽기는 스토리가 드라마틱하면서도 친숙해서 무난히 통과한다. 대개는 레위기에서 탁 걸린다. 민수기, 신명기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연말에 성경책을 보면 앞부분만 손때가 시커멓다.

레위기를 읽을 때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호기심도 필요하다. 무슨 놈의 제사가, 지켜야 할 절기가, 건들면 안 될 터부가 이다지도 많은가. 게다가 현대 문화와 안 맞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이 책을 꼭 읽어야만 할 의미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그때는 그랬다" 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내용들을, "그때 그랬으니까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생떼를 쓰는 목사들 때문에 더 정떨어지는 책이 레위기다.

평소 구약과 신약을 동시에 읽는데, 요즘 읽는 곳이 구약은 레위기고 신약은 요한복음이다. 어제 레위기 21장과 요한복음 9장을 같이 읽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레위기 21장에는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칙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16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소경, 절뚝발이, 코가 비뚤어진 자, 손가락과 발가락이 더 붙은 자, 손발이 부러진 자, 꼽추, 난쟁이, 눈에 결함이 있는 자, 각종 피부병이 있는 자, 고자는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수 없다.

이런 젠장!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께 제물도 바칠 수 없다니. 당시 하나님은 거룩함을 위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정사정도 없는, 인간미 없는 분이었다.

하긴 당시만 그런가. 그리고 하나님만 그랬나. 얼마 전 들은 얘기다. 뉴욕에 있는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후원 행사를 열려고 예배당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그 교회 장로가 "흠 있는 자들이 어찌 단 위에 올라갈 수 있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만일 너희가 흠이 있는 것을 바치면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을 것이다"는 레위기 22장 20절 말씀을 일점일획도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적용한 셈이다. 이런 젠장!

한국은 그나마 인권 의식이 많이 나아져서 레위기의 이 단락을 문자 그대로 들이댔다가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나마 다행이고, 인권 침해 내지 장애인 차별로 인해 법의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갖고 있던 청년의 눈을 고쳐주시는 예수.  
 
요한복음 9장을 펴자마자 예수가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만난다. 제자들이 "선생님, 저 소자는 참 불쌍합니다. 어서 속히 눈을 뜨게 해주세요" 이렇게 재촉했다면 얼마나 보기 좋았을까. 그러나 제자들은 "선생님, 저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는 "누구 죄 때문도 아니다" 하시고는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다.

이 사건은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일어났다. 나사로를 살린 후에는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시각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신 사건 이전에 예수는 엄청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셨다. 제자들은 그때마다 옆에서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어떤 때는 자기들도 귀신을 쫓아내려다가 실패해서 예수께 축사(逐邪) 노하우를 묻기도 했다.

2년 넘게 그렇게 동고동락하며 다 지켜봤는데도 시각장애인을 보고는 "누구 죄 때문에 저렇게 되었나" 궁금해 하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이다. 레위기 시대에 빠져 있는 한심한 제자들의 수준이다. 이 사건 앞뒤를 보면 코딱지 만한 꼬투리라도 잡아서 예수를 때려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바리새인들을 만나게 된다.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논쟁이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 장면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짜증나기 짝이 없다. 근데 제자랍시고 예수 옆에 있는 저들이 하는 짓을 보라.

예수가 나환자를 고칠 때, 혈루병자를 고칠 때, 시각장애인을 고칠 때, 귀신을 쫓아낼 때, 죽은 이를 살릴 때, 무슨 죄 때문에 이리 되었는지 따져보고 그 일을 행하셨던가. 열심히 병을 고치는 예수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데, 아무 병도 고칠 줄 모르는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저것 따지는 것도 참 많다.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유대인 지도자들이 하도 깐죽거리자 예수가 참다못해 저주를 퍼붓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을 이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16절), "어리석은 소경들아, 금과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17절), "이 소경들아, 제물과 그것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19절),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통째로 삼키는구나"(24절),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는 먼저 잔과 접시의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26절). 29개 구절 중에서 다섯 군데 구절에서 이들을 '시각장애인'으로 부르고 있다.

육체의 눈에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 "흠이 있다"느니 "죄인이다"느니 하면서 멋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이들이야말로 예수의 눈에는 영적인 시각장애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니 시각장애인들을 모욕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아무튼 예수가 그들에게 줄 것은 저주와 불행과 지옥의 심판뿐이었다.

반면, 철딱서니 없이 굴던 제자들은 사도행전에서 화끈한 성령 체험을 한 다음 철이 들었다. 병을 고치는 능력도 선물로 받았다. 누구 죄 때문에 장애인이 되었는지 따지지 않게 되었다. 예수의 참뜻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모습은 철든 제자의 모습인가, 여전히 깐죽거리는 바리새인의 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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