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차라리 의심 많은 도마처럼 살아야 할 때
지금은 차라리 의심 많은 도마처럼 살아야 할 때
  • 김종희
  • 승인 2008.12.20 1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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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증거' 법칙과 '권위에 복종' 법칙에 세뇌된 사람들

“먼저 천사들이 하늘에서 나팔을 불어요. 나팔 소리가 들리면서 우리 모두가 각자 순간적으로 없어져버리는 거예요.”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씨는 1992년 10월 28일 지구에 종말이 오고 신도들은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그걸 믿고 1,000명이 넘는 신도들이 다미선교회 예배당에 모여서 자정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밤 12시가 됐다. ‘빰빠라밤~.’ 나팔 소리는커녕 천사 인기척도 없었다. 순전히 구라였다.

이장림 씨는 자기를 따르는 신도들을 저 좋은 하늘나라로 올려 보내고,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신도들의 재산 중 33억 원을 가지고 이 나쁜 땅에 남아 있을 생각을 했나 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하늘로 올라갈 준비를 잔뜩 하고 있다가 낙방한 다미선교회의 신도 한 사람이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겠어요?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데, 에러 났으면 또 오실 예수님 기다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내부 분위기를 묻는 기자에게 “애써 태연한 척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 1992년 10월 28일 휴거가 임할 자정을 앞두고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신도들. 우리 눈에는 광신자들처럼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 볼 때는 우리 내면에도 저런 요소는 얼마든지 있다.  
 
휴거를 거부 당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대해서 미국의 심리학자들이 관찰한 적이 있다. 세 명의 심리학자들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어느 종교 집단에 잠입했다.

이 종교 집단은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외계인으로부터 영적 메시지를 받았다. 어느 날 그들은 이 지구에 큰 홍수가 나서 온 지구가 물에 잠겨 버리는 커다란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 받았다. 그러나 교주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해준다는 메시지를 수호신으로부터 받았다. 메시지에 의하면 지구의 대재난이 시작하기 직전에 비행접시를 타고 온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준다는 것이었다.

30명가량 되는 종말론 신봉자들이 D-day에 한자리에 모였다. 미국 사이비는 한국 사이비보다 조용한 편이다. 자정 10분 전까지 모두 긴장된 모습으로 가만히 앉아서 침만 꼴깍 삼키고 있었다. 드디어 자정. 비행접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내비게이션이 고장이라도 났단 말인가. 7시간 후면 대홍수가 일어날 텐데, 이를 어쩌나. 신도들은 충격에 빠졌다.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그들을 에워쌌다. 새벽 4시가 넘었다. 이 종교 집단의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 듯했다.

그 순간 교주가 허공으로 손을 마구 헤집더니 하늘로부터 받은 신성한 메시지를 받아썼다. “하루 종일 신심으로 기다린 신도들의 신앙에 신이 감동하여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마음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봐, 외계인, 지금 장난하나?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신이 이 세상을 대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당신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겠는가? 교주의 멱살이라도 잡고, 그동안 갖다 바친 헌금 다 내놓지 않으면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입에 거품을 물겠는가, 아니면 창피해서 뒤로 조용히 숨어버리겠는가.

기자 앞에 당당했던 다미선교회 신도처럼 외계인을 믿는 미국 신도들도 당당한 반응을 보였다. 대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외계인의 메시지를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심리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심리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신도들을 전도에 열중하게 만든 것은 이전의 대홍수에 대한 분명한 확신 때문이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만일 우주선과 대홍수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면 그들의 신앙 체계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을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들의 신앙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수치심, 경제적 손실, 그리고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조롱 등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줄 새로운 증거를 필요로 했다. ‘물적 증거’는 이미 그들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신앙을 지켜줄 새로운 종류의 증거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은 바로 ‘사회적 증거’였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냉대와 조롱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에 나선 것은, 새로운 신도를 그들 종교 집단에 가입시키는 것만이 그들의 신앙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하고 의심하던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손상된 그들의 믿음이 다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증거의 법칙은 어떤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질수록 그 생각은 더욱 옳은 생각이 된다고 말하지 않던가? 그들 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너무도 분명했다. 대홍수의 예언이 실패했다는 ‘물적 증거’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그들은 ‘사회적 증거’에 전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을 확신시켜라. 그리하면 당신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설득의 심리학>, 설득의 법칙3. 사회적 증거의 법칙 중에서)

한국의 이장림 씨에게 잘못이 있다면 그건 미국의 외계인 하수인보다 수가 조금 낮았다는 것뿐이다. 재빨리 다음 메시지를 받아서 그걸 신도들에게 알려주었더라면 사기죄로 감옥 가는 신세는 면했을 텐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는 단지 시한부 종말을 믿는 사이비 집단에서만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일반 교회에서는 신으로부터 계시 받은 메시지가 뻥으로 드러났을 경우보다는, 자기가 하나님 못지않게 신봉하고 추앙하던 목사가 사실은 아주 엉터리라든지 범죄자라든지 파렴치범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도 그런 태도를 보인다. 요즘 신도들은 말씀보다 목사를 더 필요로 하니까.

몇 년 전 교회 재산 수백억 원을 자기 아들 목사의 교회로 빼돌린 목사가 있었다. 그 목사는 여자 문제도 지저분했다. 우리나라에서 몇 대 안 되는 고급 외제 자가용을 타고 다녔다. 그 교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일 때다. 나이 많은 여자 교인 한 사람이 달려들더니 내뱉는 말, “나는 우리 목사님이 사람을 죽였다 해도 우리 목사님 믿어” 하더라.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서 아수라판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쪽 편도 아니고 저쪽 편도 아니면서도 시끄러운 교회를 조용히 다니는 교인들이 훨씬 많다. 왜 그럴까. 그중에는 다른 교인 자식 결혼할 때 낸 축의금을 내 자식 결혼할 때 결산해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험이든 자동차 판매든, 교인 중에 내 비즈니스 거래자가 제법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분히 한국적 상황에서 얼마든지 널려 있는 경제적인 이유다. 심리학자의 분석처럼 그동안 헌금을 바치고, 시간을 쏟고, 노력을 기울인 것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들도 제법 많을 것이다.

따라서 이성적으로는 ‘뭔가 잘못되었다’, ‘여기를 떠나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지만, 심리적으로는 정반대 편으로 기울게 된다. 어떤 심리학자는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속이는 편을 선택하는 듯하다”고 했다. 스스로를 속이고 현실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부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차별이 없다. 사회적 체면 때문에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이처럼 더 엉뚱한 짓을 할 수도 있다. 비싼 외제 수입차를 갖고 있는 소망교회 원로 곽선희 목사에게 기자가 인터뷰를 하려고 다가가니, “우리 교인들이 바보인 줄 알아? 당신들보다 더 똑똑해” 한다. 소망교회에는 이 나라를 희한한 방향으로 끌고 가는 똑똑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을 ‘헛똑똑이’라고 한다.

사회적 증거를 찾는 사람들의 이런 심리 현상은 목사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동한다. 앞에서 인용한 <설득의 심리학> 구석구석을 보면,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있다. 특히 교인들의 그런 태도가 종교를 생계 수단으로 삼는 종교업자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을 주는지 모른다.

   
 
  ▲이게 무슨 말이냐. 정명석이 태어난 금산 월명동이 바로 달동네이고, 그러니까 자기가 구주라는 말이다. 자꾸 보면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  
 
예를 더 들어보자. 한국 종교계에서 희대의 색마(色魔)라면 정명석 교주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의 ‘여자 밝힘증’은 가히 아시아에서 ‘넘버2’를 거부한다. 아직 세계 무대로 진출하지도 못했는데 감옥에서 종교 탄압을 받고 있다.

정명석 교주가 나오는 영상 화면을 보는 일반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 있다. “말하는 투나 내용이 저렇게 무식하고 얼굴에 촌티가 팍팍 나는데, 어떻게 젊은이들이 열광을 하고, 특히 예쁜 여자들이 넘어가느냐” 하는 의아함이다. 희한하게 사람들이 몰린다. 그것도 예쁜 여자들이. 얼굴만 예쁘고 머리는 텅텅 빈 ‘백치미’를 지닌 사람들만도 아닌 것 같다. 국정원, 법조계, 군대에도 JMS 신도들이 깔린 걸 보면 말이다.

만약 정명석이 목소리도 좋고 외모도 출중했으면 효과가 몇 배 높았을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잘생긴 사람이 못생긴 사람에 비해 실제 이상으로 높은 점수를 받는다. 심지어는 아기들도 못생긴 베이비시터보다 잘생긴 베이비시터를 더 좋아한다.

   
 
  ▲ 정명석에 대한 방송을 본 JMS 신도들은 잠시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동안 봐오면서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들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이) 적대시하는 감정에서 그렇게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외모가 딸린다 해도 크게 낙심할 필요는 없다. 다른 요소로 뒤집을 수 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실험한 내용이다. 한 사람의 방문자를 다섯 반에서 각각 다르게 소개했다. 단순한 학생으로, 대학원생으로, 시간 강사로, 전임 강사로, 정교수로. 그런 다음 방문자의 키가 얼마나 되는지를 각각 가늠해보라고 했다. 방문자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그의 키가 평균 1.3센티미터씩 올라갔다. 학생에서 정교수로 승진되면서 멀쩡하던 키가 쑥쑥 자랐다는 말이다. 혹시 피노키오 사촌 아닐까.

나도 그런 경험을 했다. 내가 한국에서 글쓰기를 가르칠 때다. 한 수강생이 내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놓고 그 아래 ‘꽃미남 선생님’이라고 썼다. 차라리 사진을 올리지나 말든지. 내 강의를 열심히 듣던 그녀는 나를 진짜 꽃미남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만약 옆에서 “야, 너 왜 이래?” 해도 소용없는 일. 아쉬운 일은 그때가 유일무이, 딱 한 번뿐이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둘이 따로 만난 적은 없다.

권위의 법칙에 따르면, 못생긴 사람도 잘생겨 보이고, 쉰 목소리도 낭만적으로 들리고, 찌그러진 눈도 섹시하게 보인다. 도저히 여자들이 따를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사고를 쳐서 일반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되지도 않는 설교를 하는데도 교인들은 “우리 목사님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설교가”라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 법칙이 적용되면 과정 자체가 기계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되는 속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권위자의 명령에 대해서 이런저런 골치 아픈 생각을 할 필요 없이 그저 ‘텅 빈’ 머리로 순종하면 된다. 법정 스님의 책 제목 <텅 빈 충만>이 이런 사람들에게는 욕망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비우는 것으로 적용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이처럼 황당한 경우에도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기보다 권위에 복종해버린다. 잘난 사람들이 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래서 목사가 설교 시간에 경제에 대해, 과학에 대해, 철학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쏟아내도 경제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교인은 무조건 ‘아멘’ 한다. 이런 헛똑똑이들은 대개 학문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에서 써먹는 뇌를 따로 갖고 있다. 이처럼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은 무식쟁이뿐만 아니라 식자들도 즐긴다. 이단 사이비 집단이나 다단계 사업장에 그렇게 많은 교수들, 변호사들, 의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 지구의 나이와 성경의 연도에 대해서 연구하다가 ‘젊은 지구론’이 과학적으로 맞지 않다는 판단을 한 과학자 신도가 있었다. 그가 전에 갖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 의하면 ‘젊은 지구론’이 맞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사회적 증거의 법칙’이나 ‘권위에 복종 법칙’에 맞장을 뜨고 있었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대학 총장인 과학자를 찾아가 속내를 털어놨다. 김 아무개 총장 하는 말, “자네 공부를 너무 많이 했군” 했단다. 노벨이 주는 과학상이라는 과학상은 죄다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 한국 교회에서 추앙 받는 학자가 후배 학자에게 공부 많이 한 걸 꾸짖는 소리다. 이런 과학자가 한국 교회에 득실대기 때문에 종교업이 여전히 성행하는 것이다.

   
 
  ▲ <도마의 의심>이라는 카라바조의 작품이다. 그림 속의 도마 표정과 행동을 보면 진짜 의심을 했던 것 같다. 옆에 있는 다른 제자들 표정에도 호기심이 가득하다. 자기들 속내도 도마랑 비슷했지만 도마처럼 솔직하지는 못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성경을 보면 도마는 예수의 몸에 난 상처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만약 도마가 그림처럼 행동했다면 그건 비난 받아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마는 예수의 몸에 손대지 않았다. 이건 의미가 전혀 다른 얘기다.  
 
예수의 열두 제자 중에 가룟 유다야 배신자로 완전히 찍혔고, 유다 다음으로 인기 없는 제자가 ‘도마’다. 도마 앞에는 늘 ‘의심 많은’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의심하던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예수가 죽을 때가 다가오자 그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다. ‘의심 많은’이라는 수식어 못지않게 ‘용감하고, 의리 있는’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이 시대에는 차라리 도마 같은 믿음이 더 필요하다. 의심하고, 확인하고, 그러면서도 용감하고 의리 있게 자기 자신을 던지는 믿음. 옛날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한 예수의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 말은 예수가 했기에 정당하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목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그건 패가망신(敗家亡信-몸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망치는 것)의 지름길이다. 지금은 도마처럼 굴어야 한다. 종교적으로 말고,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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