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 김종희
  • 승인 2009.01.05 14: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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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현 기자가 쓴 [울림]…근대 한국을 변화시킨 창조적 영성가들

얼마 전 한국을 들르는 분에게 책을 좀 부탁했다. 신간 서적이라고 덜렁덜렁 주문하기에는 미국에서 한국 책값이 너무 비싸다. 그래서 한국을 들르는 분이 있을 때마다 책을 사달라고 한다. 한꺼번에 많은 분량을 주문하지도 못한다. 한국 책은 무게도 만만찮다. 이번에는 조현의 <울림>,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 라즈 파텔의 <식량 전쟁>, 이렇게 딱 세 권만 부탁했다.

12월 31일 저녁, 2008년의 마지막 날을 오랫동안 기억하라는 뜻으로 부리는 심술일까. 차가운 바람이 얼마나 세게 불었는지 모른다. 열린 자동차 문을 닫으려면 용을 써야 할 정도였다. 길 위에 10초 만 서 있어도 귀가 뜯겨나갈 것 같았다. 그래도 며칠 전에 막 나온 따끈따끈한 책을 조금이라도 빨리 건네받을 수 있다는 설렘을 안고 눈 때문에 미끄러워진 도로를 씽씽 달려 공항으로 나갔다. 그렇게 받은 조현의 <울림>을 붙잡고 새해 첫날을 꼬박 보냈다.

   
 
  ▲ <한겨레신문> 문화부 종교 전문 기자 조현이 쓴 <울림>. 기독교 인물들만 다룬 <울림>에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독교 신심(信心)이 진하게 묻어 있다.  
 
‘울림’이라는 단어처럼, 깊은 뭔가가 그 속에 있는 것 같은데 겉으로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표현은 나를 힘들게 한다. 큰 제목 밑에 따라 붙은 작은 제목은 조금 덜 힘들다.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 희미하게나마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 하지만 과장법이 조금 심하다 싶다. 기껏해야 120년 정도 되는 짧은 한국 기독교 역사 안에 ‘예수쟁이들’도 아니고 ‘예수들’이 얼마나 많기에 24명이나 고를 수 있었을까.

입 다물고 조용히 읽으면 될 텐데, 따지는 것도 많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더 따지자면, 300쪽이 조금 넘는 분량에 24명의 이야기를 담은 것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조용헌의 <고수기행>과 <방외지사>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던 탓일 게다. <고수기행>은 300쪽 조금 안 되는 분량에 10명의 고수(高手)를, <방외지사>는 430쪽 정도의 분량에 13명의 방외지사(方外之士)를 두 권으로 나눠서 상세히 소개했다. 한 사람에게 30쪽 안팎은 할애해주었으면 좋으련만, <울림>은 한 사람에게 10여 쪽밖에 주지 않았다. 일간지 종교 면이라는 매우 제한된 지면에 고정적으로 취재해서 연재해야 했을 테니, 그 한계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쉽다.

한 사람, 한 사람 읽어가면서 그런 아쉬움이 더했다. 이 정도 분량으로 다루기에는 각자의 신앙과 삶이 주는 ‘울림’이 너무 컸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이 책의 등장인물을 더 자세히 다룬 책들이 서점에 있으니 그걸 찾아 읽는 수고는 독자 몫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애를 써서 찾아 읽는 만큼 울림과 보람도 크지 않겠나. 독자들이 느낄 아쉬움을 예상했는지 저자가 책 마지막 장에 자신이 이 책을 쓰는 데 도움 받았던 책 목록을 소개해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 책 전체가 주는 울림은 그런 아쉬움을 뒤집어엎고도 남는다.

책장을 덮은 다음에는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들’이 과장된 표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머릿속에 단단히 묶어놓고 24명이 조선 반도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일일이 대조해보면, “아, 이 땅에도 예수를 사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예수를 믿은 데서 머물지 않고, 한완상 선생이 즐겨 쓰는 표현처럼 ‘예수따르미들’이 있었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민족의 고난을 자기 몸 안에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백성의 고통 속으로 자기 몸을 내던졌다. 이들의 몸은 그냥 육신이 아니고 기독교 신앙이 제대로 녹아든 성육신(聖肉身)이었다. 이들의 가슴은 외래 신앙을 거부하고 우리의 토종 신앙을 갈구했고, 갇힌 도그마의 꺼풀을 풀어헤쳤다.

조금 길지만, 저자의 글 일부를 직접 인용한다.

“스물네 살 백옥 같은 처녀였던 방애인은 나환우의 썩어가는 손 위에 촛농 같은 눈물을 떨어뜨려 그들의 썩어가는 가슴에 새살이 돋게 하였고, 최용신은 자신의 병 때문에 살날이 며칠 남지 않은 날 새벽에도 새벽 기도를 마치고 머나먼 산골 마을로 찾아들어가 까막눈의 아이들과 아주머니들에게 ‘가갸거겨’를 가르쳤다.

이현필은 폐병 환자들을 돌보다 폐결핵에 걸렸다. 그런 몸으로 그는 걸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탁발을 하며 맨발로 눈길을 걸었다. 일제에게 나라를 잃고 동포들이 비탄 속에 죽어갈 때 많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제 살길만을 찾아 천황 제국의 신민(神民)임을 외칠 때에도 이승훈과 김약연, 김교신은 지옥 속의 동포들을 두고 어떻게 나 혼자 천국에 갈 수 있느냐며, 동포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고초를 즐거이 감수했다.

또한 세계 최강대국들에 둘러싸여 1,000여 번의 외침을 받고 수많은 살육과 고통을 당한 약소국민의 패배 의식 속에서 ‘소신’보다는 오직 주류와 정통에 서는 보신주의가 판을 치던 이 땅, 오히려 본토보다 더 사대주의와 근본주의가 만연했던 이 나라에서 이용도, 김재준, 변선환, 이신은 ‘이 땅의 기독교’를 위해 고독한 선지자의 길을 기꺼이 택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세종, 유영모는 자치 유․불․선의 ‘도통’과 같은 체험으로 새롭게 하늘 문을 열었다. 일찍이 사막의 교부들에게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들의 경지는 수천 년 각기 다르게 자라온 동․서의 종교 사상이 극적으로 만나면서 터져 나온 핵폭발과도 같았다. 가히 세계 문명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들이 이 땅에서 일어났고, 그런 인물들이 우리 곁에 머물다 간 것을 왜 그토록 몰랐을까. 백범 김구가 최흥종을 평한 것처럼 ‘화광동진(和光同塵, 성자의 본색을 감춘 채 중생 속에 살아감)’하기만 해서일까.”

   
 
  ▲ <울림>에 나오는 24명의 주인공 중 6명. 왼쪽부터 (1) 거지 대장이 된 애꾸눈 거두리 이보한. (2) 걸인과 고아를 섬긴 맨발의 성장 이현필. (3) 부흥의 기적을 이룬 불의 사자 김익두. (4) 우리 곁에 잠시 머문 눈물의 성자 방애인. (5) 조선식 믿음을 고한 예인 목사 이용도. (6) 교회 대신 교인 집 지은 중 목사 김현봉.  
 
지금 우리가 믿는 예수라고 해봐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코믹한 잣대를 갖고 이놈은 시원한 천당으로 올려 보내고 저놈은 뜨거운 지옥으로 내려 보내는 존재다. 인간이 지들 멋대로 만든 신학과 교리의 포승줄에 꽁꽁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가 밟고 걸었던 땅과 물, 그가 만지고 얼싸안았던 사람들은 모조리 거세되어 박제로 만들어진 존재다. 한마디로 ‘가짜 예수.’

웅장한 예배당 건물 속에 모여 열광하는 수만 명의 신도들 앞에 서서 미끈한 외모와 차려한 말재주로 가짜 예수를 팔고 있는 지금의 목사들은 언감생심 이 책 주인공들의 들메끈도 풀 길이 없다. 백성들의 옳고 그름을 머리로 따지기 전에 그들의 고통과 고난의 현장에 뛰어 내려간 ‘진짜 예수’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손에 새겨진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가 몰랐던 이 땅의 예수’라고 제목을 달았지만,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아봤자 좋을 거 하나 없다 여겨서 애써 눈감고 외면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촌스런 무당에 비해 다소 세련되게 화장한 얼굴과 입술로 백성들과 민족의 이물리는 상처를 자신들의 먹고사는 수단으로 부릴 뿐인 종교 지도자들이 그걸 조장했고, 신도들이 거기에 맞장구쳤다.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 교회는 맘몬(돈) 숭배와 성전․교권주의, 성장주의, 배타주의로 국민의 신망을 잃어가고 있으며, 희망을 찾을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보일 따름이지 길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저자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며 지금도 귀와 온몸에 울림을 준 그들 삶에 답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발자취를 뒤따르는 당신의 삶이 바로 답이 되리라”고 했다. 우리 하기 나름이란다.

   
 
  ▲ 저자가 1년 동안 회사를 휴직하고 나를 찾아 떠난 길. 달라이 라마가 머물고 있는 히말라야 산간 도시 맥레오드 간지에서 티벳 승려들과 함께. (<한겨레신문> 휴심정에서)  
 
이 책을 쓴 조현은 <한겨레신문> 문화부의 종교 담당 기자다. 그와의 연은 <뉴스앤조이>의 출발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비롯했으니 8년이 조금 넘었다. 짧지 않은 세월을 곁에서 지켜본 바 그는 종교 관련 기사를 쓰는 일간지 기자들 중에 가장 믿을 수 있다.

구도자적 기자라고 불러야 적절할까. 그의 글에는 구도적 삶이 녹아 있다. 그는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여러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1년 동안 히말라야 오지를 뒤지고 다녔다. 세계 곳곳의 공동체들을 방문했다. 오지 암지와 토굴도 순례했다. 글거리를 찾으러 돌아다닌 것이 아니라 ‘나’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참 영성의 뿌리를 찾으러 돌아다녔다. 글은 구도의 과정에서 얻은 열매다. 그렇게 쓰인 글에 믿음이 가지 않을 리 없다.

자기는 개신교에 가깝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불교에 더 가깝다. 불교에 대해서 우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쓴다는 말이 아니다. 개인의 성향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기독교 인물들만 다룬 <울림>은 아주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표현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독교 신심(信心)이 진하게 묻어 있다. 기독교에 대한 애정이 특심하기 때문이리라.

‘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말이 있다. 그가 보기에 불교는 어느새 귀족들과 왕족들을 위한 종교로 변했다. 유교는 왕족들과 양반들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했다. 이처럼 다른 종교들이 제 역할을 온전히 못할 때 기독교가 한국 역사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감당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기독교는 불교와 유교보다 더 귀족적이고 왕족적이고 지배적이 되었다. 그는 개신교의 이러한 변질을 안타까워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이 책에 담았다.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이 고맙고, 기독교 안에서 글쟁이로 살면서 여태 이런 책을 못 쓰고 있는 내가 부끄럽다. ‘한국 기독교를 빛낸 올해의 인물’이라는 제목의 시상식이 있다면, 대상(大賞) 수상자가 되어 마땅하다. 하지만 그를 수상자로 선정할 안목조차 지금 한국 기독교에는 없어 보인다. 내가 대신 축복하자면,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한 하늘의 상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지어다!

   
 
  ▲ 조현 기자가 우리 민족 고유의 선도 수련인 기천(氣天)을 하는 모습. (<한겨레신문> 휴심산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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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om 2009-01-06 14:13:35
허헛, 새해 첫 날 참 좋은 책을 읽으셨군요. 맛깔나게 쓰신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얼른 주문해서 읽어보렵니다. 새해에도 뉴조 최 발행인님, 김 편집인님, 그리고 뉴조 가족 모두 건강하시고, 뉴조의 삽질이 한인사회에 큰 울림이 되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