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에 오신 그리스도
북간도에 오신 그리스도
  • 김종희
  • 승인 2009.02.1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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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과 용정의 항일운동 유적지에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하다

이 글은 2006년 4월 쓴 것입니다.
오래된 글인지만, 문동환 목사 인터뷰와 함께 읽으면 유익할 것 같아서 같이 올립니다.

   
 
  ▲ 광개토대왕 비석이 유리각 안에 갇혀 버렸다. 건너편에 보이는 북쪽 산은 무척 황량했다. 북한 주민들이 뗄감으로 나무를 베어가기도 하지만, 상당량이 중국으로 헐값에 넘어가고 있다고 했다.  
 
2006년 3월 중순 있는 역사 현장. 일송정 기념석 옆에 있던 '선구자' 노랫말이 새겨진 바위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일주일간 중국을 여행했다. 심양을 거쳐서 통화·집안·연길·훈춘 등 동북3성 중에서도 조선동포(조선족)가 비교적 많이 살고 있는 곳을 둘러보았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에 남한의 기독 청년들을 단기 교사로 파송하는 프로젝트를 기독청년아카데미가 기획하고 있는데, 그 일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명동과 용정 등 일제 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했던 대표적 기독교 공동체의 역사적 흔적을 느껴보는 것이었다.

돌아온 지 보름이 지날 때까지 취재 내용을 글로 정리하지 못했다.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내용들을 파편처럼 머리에 주워 담은 탓일까. 엄청난 폭설 덕분에 남극 탐험을 방불케 하는 험난한 백두산 등정을 하고, 13시간이 넘도록 기차를 타고, 돌아온 그날 저녁 바로 강의를 하는 강행군 때문에 누적된 몸의 피로를 쉬 떨쳐내지 못한 탓일까. 그런 것도 억지로 가져다 붙이면 이유가 되겠지만, 머리보다 가슴의 혼란스러움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게다.

처음 나흘간은 조선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를 방문해 관계자를 만나고 학교와 관계 맺고 있는 교회 목회자들과 여러 얘기를 나눴다. 정교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프로젝트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독청년아카데미는 그동안 아카데미에 참여했던 수강생들 중 자원자를 중국에 있는 조선동포 학교에 보내 반년이나 1년 정도 지내면서 영어나 컴퓨터 같은 과목을 가르치게 하려고 한다. 중국에서도 이런 내용으로 동역하기를 원하는 곳이 있었다. 학교와 교회 모두에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 남한의 청년들에게도 역사의 현장·통일의 현장을 가까이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간도, 잊혀가는 역사가 되고 마려나

   
 
  ▲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역사 현장. 일송정 기념석 옆에 있던 '선구자' 노랫말이 새겨진 바위가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그다지 큰 문제 없이 어느 정도 이뤄진 셈이다. 나의 혼란스러움은 나머지 사흘간에 집중적으로 쌓여버린 것 같다.

연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용정을 갔다. 바다만 건너면 갑자기 애국심 뿜어내는 한국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바로 비암산에 있는 '일송정'. 일송정은 '선구자'라는 노래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만든 관광 안내 책자에 "독립운동가와 항일 선구자들은 비밀 집회 장소로 리용했다"고 쓰여 있다. 감격스런 역사의 현장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의 마음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인다.

"독도는 우리 땅" 하고 당당하게 외치는 사람들이 여기서도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하면서 선구자를 목청껏 부른 다음 "간도도 우리 땅" 외친다. 보다 못한 중국은 일송정 기념비 옆에 서 있는 비석에 새겨진 선구자 노랫말을 시멘트로 지우더니, 2004년 급기야 비석을 아예 갈아치워 버렸다. 동북공정의 일환일까.

중국의 동북공정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집안이라는 곳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석은 2003년 중국에 의해 커다란 유리각 안에 갇혀 버렸다. 주인은 확증되지 못했으나 어마어마하게 큰 피라미드 양식의 장군총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거슬러 가보지 않아도 고구려의 웅혼한 기운을 전해주었다.

   
 
  ▲ 광개토대왕 비석이 유리각 안에 갇혀 버렸다.  
 
아주 따분한 표정의 중국 안내원은 이 모든 것들을 중국의 역사 한 귀퉁이에 집어넣어 설명하고 있었다. 돈화라는 지역에서는 발해의 정효 공주 묘가 있는 고군분에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깥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다고 한다.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광활한 우리 역사가 중국에 의해 철저히 철장에 갇혀 있었다.

중국 문제 전문가들의 글들을 살펴보면, 중국은 50년대부터 한반도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국토라고 초등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80년대 초반부터 정부 주도로 역사 왜곡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 수천 개의 왜곡된 역사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반도 통일 후 있을지 모르는 간도 분쟁의 씨앗을 철저히 없애버리기 위한 작업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온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나이 지긋한 조선동포가 "한국이 모국이라면 중국은 조국"이라고 하거나 연길에 있는 연변대학교에 다니는 조선동포 청년이 "간도가 과거에는 조선 땅이었다 해도 지금은 어차피 중국 땅 아니냐"고 하는 것을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 같았다.

친일 인사가 만든 노래, 선구자

일송정 얘기로 다시 돌아가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국에서 만난 문동환 목사(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는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어렸을 때 비암산에 몇 번이나 갔었어. 생각해봐. 독립운동,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굴 같은 데 숨어서 모의하지, 밑에서도 훤히 올려다 보이는 산꼭대기에서 비밀회의를 한다는 게 말이 돼? 그거 다 만들어낸 이야기야. 그리고 일본군이 그 소나무를 없애려고 거기에 포를 쏜 것이 아니라, 원래가 일본군 사격 연습장이었어" 하는 것이다.

하기야, 믿기 어려운 것이 어디 일송정뿐일까. 일송정이 유명해진 것은 '선구자' 때문이다. 이 곡의 제목은 원래 '룡정의 노래'였다. '일송정 푸른솔, 한줄기 해란강, 용두레 우물가, 뜻깊은 룡문교, 룡주사 저녁종'. 노랫말의 모든 소재가 용정에서 나온다. 그런데 '룡정의 노래'가 '선구자'로 바뀌면서, 그 안에 일부 가사도 바뀐다. 1절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는 그대로인데, 2절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는 원래 '이역하늘 바라보며 눈물 젖은 보따리'였고, 3절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는 원래 '조국을 찾겠노라 흘러온 신세'였다.

느낌이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처량하고 가련한 노랫말이 씩씩하고 힘찬 노랫말로 바뀌었다. 그런데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선구자를 왜 그리도 싫어했을까. 작사자 윤해영과 작곡자 조두남이 친일 인사였다는 것 때문일까. 친일 인사가 만든 민족의 노래. 역사의 모순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나 여기서나 되풀이되고 있었다.

   
 
  ▲ 대성학교 옛 교정에 서 있는 윤동주 시비.  
 
김약연 목사,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용정에서 차로 20분 정도 걸려 명동을 갔다. 명동, 단어만 생각해도 100년 전 간도의 뜨거움이 가슴에 밀려든다. 작년 '통일 할아버지 문익환 목사'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인도할 때, 명동은 함께 공부했던 우리 모두의 마음에 조그맣지만 깊게 자리를 차지한 곳이다. 비록 늦었지만 그 땅을 지금 처음 디딘 것이다.

이곳을 떠올릴 때마다 기독교+교육+민족(항일)운동이 연결된다. 한신대 김경재 교수는 올해 초 쓴 논문(<공공의 신학에 관한 한국 개신교의 두 흐름 : 보수적 기독교의 사유화 신앙과 진보적 기독교의 참여의 신앙>)에서, 이곳을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공공의 신앙' 현장으로 꼽았다. 윤동주·송몽규·문익환·문동환·김재준·안병무·강원룡 등 기라성 같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서 자라면서 어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고, 근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웠다. 명동촌의 기독교는 예수 믿고 천당 가는 것에 머무는 개인적 종교가 아니라 노예 처지에서 신음하는 민족 전체를 살리는 출애굽의 종교였다.

이들의 어른들이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1899년 일군의 동지들과 함께 간도로 와서 '동쪽을 밝힌다'는 뜻을 가진 명동촌(明東村)을 건설한 김약연 목사는 당초 유학자였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명동은 원래 유학촌이었다. 그러나 근대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제대로 다지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이 마을은 기독교 신앙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을 저질렀고 김약연 자신은 목사가 되었다.

   
 
  ▲ 문화대혁명 때 훼손된 김약연 목사 비석을 연변대 교수가 살피고 있다.  
 
<문익환 평전>의 저자 김형수 씨는 이를 '북간도에 온 그리스도'라고 표현했다. 수많은 교회와 학교가 세워지고 무장 투쟁이 격렬히 일어났다. 뜨거운 신앙 운동, 철저한 교육 운동, 치열한 항일 운동이 적어도 이곳에서는 어긋나지 않았다. 통합적 신앙, 공공적 신앙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장이었다.

안병무 박사는 <민중신학 이야기>라는 책에서, 성탄절 때 교회에서 '모세'나 '에스더'를 연극하면서 민족적 소망을 표현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간도는 나의 정서와 사상의 기본 바탕이 형성된 곳이다. 민족주의와 그리스도교는 결코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 '민족 교육'이라는 단어를 꺼내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동포들의 공동체가 자본의 광풍에 정신없이 휩쓸려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동체가 빠른 속도로 와해되고 있는 지금, 기독교+교육+평화와 통일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이곳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김약연 목사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날마다 유언하듯이 사는 삶, 그 정신을 어떻게 따를 수 있을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면서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수밖에.

   
 
  ▲ 명동교회 기념관 안에 있는 김약연 목사 관련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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