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예루살렘을 흠모하다
무함마드, 예루살렘을 흠모하다
  • 백찬홍
  • 승인 2009.03.03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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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최고 성지로 선정했다가 유대인과 불화로 철회

오늘날 유대인과 아랍 민족은 철천지원수처럼 지내는 관계다. 그러나 민족적으로도 같은 셈족일 뿐 아니라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도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는 유대교 영향을 많이 받아 꾸란 외에 모세오경(토라),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를 가장 신성한 경전으로 존중했고, 이슬람교도들 역시 무함마드의 뜻에 따라 유대교와 기독교, 조로아스터와 같이 계시를 믿는 사람들을 경전의 사람들로 인정했다.

   
 
  ▲ 이슬람 경전 꾸란.  
 
또 꾸란에는 모두 25명의 예언자가 언급되어 있는데 무함마드 외에 아담, 노아, 아브라함을 위대한 예언자로 존경하고 있고 가브리엘과 미카엘 같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천사들이 등장한다. 내세관도 비슷하다.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최후의 심판과 부활을 믿고 신을 믿는 자는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간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한때 메카에 앞서 최고의 성지이기도 했다. 그만큼 유대교가 이슬람교에 끼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잠시나마 예루살렘이 제1의 성지가 된 것은 이슬람교 초기 정치·사회적 상황 때문이었다.

알려진 것처럼 무함마드는 40세가 된 610년, 세속적 생활에서 벗어나 메카 외곽 히라산의 한 동굴에서 명상 생활을 하던 중 알라의 계시를 받은 후 신의 사도로 메카 주민들을 대상으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무함마드, 모세오경 등 토대로 이슬람 신앙 발전시켜

당시 메카는 우상과 다신교를 신봉했을 뿐 아니라 꾸라이시 등 유력 부족이 상권을 장악한 무역의 중심지로 빈부격차가 심한 곳이었다. 유일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부자와 가난한 자는 재산을 나누어가져야 한다는 무함마드의 설교는 하층민들과 중소 상인 계층에게 환영받았다. 기독교 초기 상황과 유사했던 것이었다.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아닌 신앙심을 중시하는 이슬람 교리에 위협을 느낀 대상인 중심의 지배층은 신자가 급격하게 늘어나자 이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 613년경 포교 활동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박해했다.

박해가 심해지자 무함마드는 615년, 신도 일부를 지금의 에티오피아인 아비시니아로 피신시켰다. 기독교를 믿고 있었던 아비시니아 사람들은 이슬람교가 유일신을 믿고 같은 종교 전통을 공유했기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였고, 무함마드 자신은 622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메카 북쪽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를 이슬람에서는 히즈라(헤지라:聖遷)로 부르고 있다.

유대인에게 예언자 칭호를 얻기로 원했으나 거절당해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에게 최초로 직면한 문제는 유대인과의 관계였다. 야스리브는 서기 70년과 135년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뒤 무역로를 따라 이주해온 유대인들의 촌락이었다가 5세기 말부터 아랍인들이 정착한 도시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입김이 센 곳이었다.

무함마드는 야스리브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아랍 부족과 동맹을 맺고 있었던 유대교인들과 관계를 확장하고 예언자임을 인정받기 위해 유대인들의 신년에 행하는 속죄일 단식이나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는 관습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야훼 신앙을 신봉하던 유대인들은 예언자 전통이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고 생각한데다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을 꺼려해서 무함마드와 거리를 두었다. 무함마드는 결국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고 보고 먼저 아랍인들을 중심으로 혈연 중심의 체제를 이슬람 신앙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회 체제로 변화시키면서 훗날 이슬람 국가의 기초가 되는 움마(Ummah)를 창설했다.

이슬람 공동체가 안정화되자 무함마드는 예배 때마다 향하는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바꾸었다. 그와 동시에 유대교인들이 예배 시작을 알리는 숫양의 뿔피리 대신 사람의 목소리로 기도 시간을 알리게 하고 속죄일 대신에 이슬람력으로 9월(라마단)때 1달간 금식하도록 했다.

무함마드가 카바 신전으로 예배 장소를 바꾼 것은 유대교와의 단절을 통해 이슬람교를 아랍 전통 위에서 보편 종교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은 유대교나 기독교 이전의 순수한 유일신교도로 그의 신앙은 이슬람이었고 무함마드의 가르침도 아브라함이 믿는 일신교가 회복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이 그의 적자인 이스마엘(유대인은 그가 서자라고 주장)과 함께 카바 신전을 지어 알라에게 바쳤고, 그의 자손(아랍인)중에서 사도가 나오길 간청했다고 공표했다.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카바 신전을 세우고 모세오경을 이슬람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 부분에 대해 유대인들은 무함마드가 성서의 내용을 왜곡했다고 비난했지만 무함마드는 오히려 유대교가 본래 옳은 경전을 잘못 해석하고 그 일부를 조작하거나 감추었다고 역공을 취했다.

그리고 당시 카바 신전을 알라(알라는 메카의 여러 신중에 하나였다)의 집으로 여기고 아브라함이 그것을 세웠다는 전설은 당시 메카와 그 주변 주민의 일반적 생각이기도 했다. 무함마드는 기도 방향을 메카로 바꿈으로서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메카의 지배층들의 적개심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를 수립한 무함마드는 630년 1월 자신의 숙원이던 메카에 무혈입성 하는 감격을 누렸다.

무함마드, 유대교와 결별해 독자적인 신앙과 예배 추진

   
 
  ▲ 메카. 이슬람교도들은 하루 5번 이쪽을 향해 기도한다.  
 
이후 자신에게 반대했던 유대인 3개 부족 가운데 2개 부족은 메디나에서 추방했고 나머지 1개 부족은 섬멸했다. 628년에는 인근의 오아시스 취락인 카이바르를 정복해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교도 세력에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반면 유대인들에 비해 기독교인들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아라비아에 거주했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단성론자, 네스토리우스파 등이 있었으나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친 종파는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와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네스토리우스파였다.

이들은 정통파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된 존재가 아니라 예수의 행동 중 일부는 인성에 따른 행동이고 일부는 신성에 따른 행동이라고 가르치며 느슨하게 결합된 2개의 인격체라고 주장하고 마리아에게 테오토코스('신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붙이면 예수의 인성이 손상된다면서 칭호 사용을 거부해 파문당했다.

정통파에게 파문당한 네스토리우스파는 5세기부터 페르시아와 아라비아, 인도에 여러 관구를 설치할 정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전을 아랍어로 번역해 보급했다. 이를 근거로 일부 중동의 기독교 전통에서는 무함마드가 이 경전을 공부하고 사막에서 수행하던 기독교 수도사와 만나 기독교 신앙과 접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무함마드는 메카 정복 이듬해인 631년 예멘 나지란의 기독교 사절과의 종교 문답에서 예수의 성육신 교리를 둘러싼 이견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서 기독교인들에게 개방해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슬람 신자들에게 가장 친밀한 애정을 가진 사람은 기독교인들인데 그들 중에는 사제나 수도사가 있어 오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637년에 무함마드 사후 이슬람의 정치·종교 지도자인 칼리프들에게 독립된 종교 단체로 인정받고 법적인 보호를 받았다. 네스토리우스파 학자들은 그리스 사상이나 문화를 아랍어로 번역하는 등 아랍 문화를 발전에 기여했고 그들의 최고 지도자인 총대주교는 통치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정치·종교적 이유로 자신의 종교적 뿌리를 유대교에 두었던 무함마드는 유대인들에게 인정받기 원했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예루살렘을 최고 성지에서 제외시켰다. 결국 메카가 제1성지가 되면서 이슬람과 유대교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무함마드가 예수처럼 메시아를 주장하지 않은 바에야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 예언자로 인정했다면 세계 역사는 크게 변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유일신 종교의 성지이자 전쟁과 갈등의 상징으로 남아

가장 좋은 경우는 예루살렘이 양 종교의 최고 성지가 되면서 무함마드의 후예인 사라젠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후 비잔틴 제국에게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에게 성전 재건의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 문제는 오늘날 중동 전쟁의 최대 뇌관으로 남아있다.

이스라엘 극우 정당들은 예루살렘 옛 성전에 세워진 이슬람의 알 아크사 사원을 허물고 새 성전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아랍국의 반대에도 알 아크사 사원 방문을 강행해 팔레스타인들의 봉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유대교에 대한 자신의 일방적인 짝사랑이 실패로 끝나고 생전에 일부 유대인들을 박해하기는 했지만 이슬람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기독교 통치 지역에 비해 훨씬 많은 자유를 누렸다. 거의 2천년 동안 기독교에 의해 끔찍하게 박해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을 강제로 몰아내고 자신들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무함마드가 유대인들에게 예언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유대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벌이는 잔학 행위에 비해서는 훨씬 가벼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유일신(하나님)을 모시지만 냉전 이후 국제적 갈등의 중심에 있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은 아담과 이브에게 내려진 신의 계시, 다윗의 종교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예언 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같은 종교적 유산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기독교와 유대교는 이슬람이 전 세계 인구의 1/4이 믿는 대종교로 성장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무함마드가 예언자는 아니더라도 전쟁광이고 호색한이었다 등의 편견과 악선전을 거두어야 한다. 양자 간의 작은 이해가 현재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백찬홍 /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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