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을 안 지켜? 옛날엔 맞아 죽었다!
주일을 안 지켜? 옛날엔 맞아 죽었다!
  • 김종희
  • 승인 2009.03.24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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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홍 목사의 '주일 성수' 주장에 대한 비판

뉴욕 한인회 선거를 오는 일요일인 3월 29일에 치르는 것에 대해서 뉴욕 신광교회 한재홍 목사가 비판했다. 3월 20일 열린 대뉴욕지구한인교회협의회 실행위원회에서 한 목사가 비판한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주일에 선거를 한다고 공포했는데, 교계가 이렇게 조용할 수 있느냐. 구약에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는 얘기가 두 번이나 있다. 요즘에는 주일 개념이 너무 희박해졌다. 내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토요일 저녁 5시면 백화점이 문을 닫았다. 한국 사람들이 24시간 7일을 일하니 미국 사람들도 경쟁을 하느라 주일에 쉬지 않는다. 미국이 성수 주일을 못하도록 막은 사람들이 바로 한국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우리 한인, 특히 목사들에게 책임을 물을 건데, 어떻게 할 거냐.

나는 주일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이번 한인회 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나는 주일에 외식하지도 않고, 부흥 강사가 와도 (주일에는) 집에서 식사를 대접한다. 그날은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 주일을 온전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복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비판은 자유이나, 아전인수적인 비판은 곤란하다. 아전인수식 주일 성수 주장은 자신의 무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교인들로 하여금 쓸데없는 죄책감에 빠지게 만든다. 성경을 조금만 차분히 읽어 보고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아도, 한재홍 목사식의 주장은 허황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많은 목사들이 이와 똑같이 가르치고, 교인들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진리의 속내를 음미하기보다는 인간들이 겹겹이 둘러싼 종교적 껍데기만 핥고 있다. 그러니 진리가 풍겨내는 자유를 맘껏 누리기는커녕 공연한 억압과 죄의식만 팽배해지고, 그걸 교묘히 이용하는 종교 비즈니스만 흥행하고 있다.

그럼 무엇이 아전인수인가. 첫째, 안식일과 주일 개념을 멋대로 넘나든다. 안식일 안 지키는 자를 죽이라고 했으니 주일 성수 안 하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둘째, 주일을 경건하게 보내는 예가 고작 투표 안 하고, 집에서 밥 먹는 수준이다. 셋째, 한국 사람들이 주일 성수를 안 해서 미국 사람들도 경쟁하느라 덩달아 주일 성수를 안 하게 되었다니,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한국인의 파워를 증명할 근거를 댈 능력이 있는지 궁금하다.

세 번째 얘기는 내가 입증할 책임도 없고 그건 부질없는 짓 같아 보이니, 첫 번째와 두 번째 얘기를 갖고, 왜 이런 주장이 문제를 안고 있는지 살펴보자.

   
 
  ▲ 이집트의 가혹한 환경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고 안식할 수 있도록 출애굽시켜주었다. 따라서 안식일에는 창조와 해방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육체를 푹 쉬도록 하는 두 가지 요소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  
 
안식일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명령

출애굽기 20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는데, 그중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이 나온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창조 일을 한 다음 하루 쉬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너희만 쉴 것이 아니라, 자녀, 종, 가축, 외국인도 전부 쉬게 하라고 한다.

쉬라고 권유만 한 게 아니다. 31장 14~15절을 보면 살벌하다. "누구든지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며, 그날에 일하는 자도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될 것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두 번이나 강조한다.

이처럼 살벌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걸 지키지 않은 고집불통들이 있었다. 민수기 15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들켜서 모세, 아론, 사람들 앞에 끌려왔다. 전에 하나님이 죽이라고 명령은 했지만, 정말 죽여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 일단 가두어 놓았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둘로 쳐 죽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 명령대로 돌로 쳐 죽였다.

안식일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는, 믿음이 좋냐 안 좋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돌에 맞아 죽냐 안 죽냐 하는 피 말리고 살 떨리는 문제였다.

'영적 예배'와 '육체 휴식'은 안식일의 두 바퀴

성경에서 '안식'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다음 7일째 되는 날 쉬었다는 창세기 2장 얘기에서 처음 나온다. 그리고 모세에 의해 이집트에서 벗어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지낼 때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셨는데, 6일째에는 두 배로 거두도록 해서 7일에는 일하지 않고도 먹으면서 쉴 수 있도록 한 인간의 안식일 얘기가 출애굽기 16장에 나온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안식한 다음 출애굽기 16장에서 인간이 안식할 때까지, 중간에 60장이 넘도록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에덴동산 가운데 있는 과일을 먹으면 죽는다'고 아담과 하와에게 경고하면서도 안식일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들이 동산에서 쫓겨날 때 고되게 농사지어야 먹고살 수 있을 거라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안식일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출애굽 16장에서 처음으로 안식일 얘기를 꺼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안식일 얘기를 하신 것은 그들에게 안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출애굽의 의도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들에게 안식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노예들은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이집트의 작업 감독들은 벽돌 재료인 짚조차 주지 않은 채 알아서 벽돌을 만들어서 책임량을 채우도록 했다. 히브리 노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곡식 그루터기를 걷어서 벽돌을 만들어야 했다. 목표에 미달되면 매질을 당했다.

안식은 무슨 배부른 소리인가. 고단한 몸을 쉬기는커녕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키셨다.

히브리 노예들에게 안식이란 '창조의 하나님, 구속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동시에 '실제로 몸이 쉬는 것'이다. 예배와 쉼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여러 성경 구절들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강조한다.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는다기보다는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복인 셈이다.

안식일을 안 지키는 상반된 이유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해서 안식일을 지킬 여건이 저절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 때 이들은 노동 재료인 곡식 그루터기까지 알아서 구해서 노동해야 했다. 설령 이들에게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해도 그 시간을 그루터기 모으는 데 다 썼을 것이다.

하지만 광야에서 하나님은 먹을 것을 미리 넉넉히 준 다음 쉬라고 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심과 동시에 그걸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노예근성을 벗지 못해서 먹을거리를 충분히 챙기고도 노동 현장으로 나간 사람들은 헛걸음을 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도 이집트와 같은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노예로 살고 있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쉬는 순간 일용할 양식이 끊기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안식하고 싶어도 안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정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 쉬라고 명령한다. 그들에게 안식일 준수 명령은 공포스러운 강요가 아니라 배려요 은총이다.

반면에 하나님이 그토록 먹을거리를 넉넉하게 마련해주었는데도 불구하고 탐욕에 눈이 멀어서 곡간을 더 채우려고 안식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구약적 관점에서 보면 맞아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가 부리는 종, 노예, 외국인, 가축들도 안식하지 못하게 '노동력 총동원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조리' 쉬라고 명령한 것이다. 오늘날 내가 더 편히 안식하기 위해 내 아랫사람들의 안식을 빼앗는 이들에게 목사는 하나님이 그랬던 것처럼, "너 그러다가 죽는다" 하고 경고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재수 없는 이, 운 좋은 벼룩

한재홍 목사는 주일을 경건하게 지내야 한다면서, 손님이 와도 바깥에서 사먹지 않고 집에서 먹는 걸 예로 들고 있다. 하긴 나도 철없는 중고등학생 때는 그랬다. 주일에는 텔레비전을 안 보았다. 돈 내고 사먹는다는 건 생각도 안 했다. 대학 입시가 코앞이라도 공부 안 했다. 그게 주일 성수인 줄 알았다. 어쩌다가 금식을 하는 날에는 밤 11시 즈음부터 먹을 걸 준비해놓았다가 밤 12시를 알리는 시계 종이 땡땡땡땡 울리면 허겁지겁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지만, 그땐 그만큼 순수하기도 했지만, 철부지였다.

안식일 정신은 쏙 빼먹고 안식일 규정만 엄수한 바리새인들은 수십 가지의 엄격한 조항을 만들어서 지켰다. 그중에 이런 게 있다. "알파벳을 한 글자만 쓰는 건 괜찮은데, 두 글자를 쓰는 건 노동이므로 안 된다. 이는 잡아도 되지만, 벼룩은 육식동물이므로 잡으면 안 된다." 재수 없는 이, 운 좋은 벼룩의 엇갈린 운명이여!

코웃음이 나올 만한 내용들이지만, 바리새인들은 이를 진지하게 철저하게 지켰다. 이걸 지킴으로써 자신의 종교적 우월감을 한껏 드러냈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을 성별(聖別)했다. '구별하기' 내지 '편 가르기'를 통해 지금은 권력을 획득하고, 나중에는 천국을 독점하려고 했다.

근데 예수가 나타나서 이걸 다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예수는 안식일에 굶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고쳐주었다. 하루 지난 다음 해도 될 일을 굳이 그날 했다. 안식일의 틀을 고의로 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안식일에 굶주린 자와 병든 자를 챙긴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토록 강조한 안식일 정신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행위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한 안식일은 병든 자, 굶주린 자, 광야에서 헤매는 자, 종살이를 하는 자들을 그 모든 질곡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해방의 날이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손을 들었다면, 예수는 인간의 손을 들었다. 바리새인들은 이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 궁리를 했다.

이런 통전적인 안목 없이, 그저 중국집 가서 자장면 사먹지 않고 집에서 밥 해먹는 걸 안식일 준수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신앙에서 매우 소중한 안식일 개념이 오늘날 교회에서 매우 코믹한 개념으로 전락하고 만 느낌이다.

   
 
  ▲ 목사가 교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일 성수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주일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선 그런 환경과 여건을 만들어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탐욕의 노예가 되어서 세속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들에게야말로 따끔한 질책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몸뚱이는 지쳤어도 영혼은 새 힘 얻으니 괜찮다?


많은 목사들이 안식일과 주일을 필요에 따라서 적당히 섞어서 얘기하고 있다. 마치 초기 청교도주의자들이나 안식교도들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 그 의미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구약의 안식일을 '부활 후 첫날'을 뜻하는 주일과 억지로 꿰어 맞춰서, 주일 성수를 안 하면 벼락 맞아 죽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주일 성수를 잘하면 복에 복을 따따블로 받을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 목사들이여, 교인들이 주일 성수 안 했다고 하나님이 당신들 책임 추궁 안 한다. 곤장 안 친다. 너무 겁먹지 말라. 그리고 너무 겁주지 마라.

그리고 미안하지만, 신약 성경 어디에도 그런 저주와 그런 축복을 강조하는 구절은 나오지 않는다. '내가복음'이나 '목사행전'에나 있을 법하다. 게다가 공휴일인 지금 일요일이 주일이라는 건 성경적 근거가 전혀 없는 얘기다. 그냥 임의로 정했을 뿐이다. 특정한 날을 신성시하고 거기에 축복과 저주의 요소를 끼워넣는 건, 조금 강하게 표현한다면, 중세시대의 성상(聖像) 숭배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물론 주일은 의미 있는 날이다. 그날 하나님을 예배하고 육체적 안식을 취하는 건 구약 안식일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충돌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교회는 하나님 예배만 강조하지 육신의 휴식은 언급하지 않는다. 주일 성수를 강조하는 목사치고 육신의 휴식을 강조하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육신의 휴식'을 '영혼의 충전'으로 대체한다.

예배뿐만 아니라 주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온갖 프로그램으로 뺑뺑이를 돌린다. 자고로 부흥하는 교회 치고 주일에 뺑뺑이 안 돌리는 교회 있던가. 이 뺑뺑이를 통해서 영적인 힘이 충전된다, 영혼이 새 힘을 얻는다고 강조한다.

교인들은 몸은 피곤할지 몰라도 영혼은 일주일을 힘차게 살아갈 새 힘을 얻었다고 스스로 자위한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다시 노동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몸 덩어리다. 육체의 쉼 없이 다시 고단한 노동 현장에 투입된다. 자기 자녀들이 자기를 예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각종 모임, 회의, 프로그램에 온종일 참여하다가 지친 채 일터로 나가는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할까.

하지만 주일 온종일 거룩하게 성수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해진 목사는 월요일에는 푹 쉰다. 정부가 주 5일 근무제를 시행하려고 하니까,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쉬라는 십계명에 위배된다", "주일을 안 지킨다", "향락 문화가 발전한다"는 구실을 들어 목사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목사들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쉬는 주 5일 근무제를 옛날부터 지켜왔다. 설마 자기의 주일 성수를 '노동'이라고 말할 만큼 뻔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강력한 '철통 밥그릇 수호 능력'은 무엇으로도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일방적인 주일 성수 강요는 종교 장사꾼의 상술

주일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 안에 우리는 이미 빠져 있다. 물질을 우상으로 섬기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가 전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이 체제를 유지시키면서 자기 탐욕을 채우기 위해 주일을 성수하지 않거나 남도 주일 성수를 못하게 만든다. 다른 한쪽에서는 이 체제의 희생양이 되어서 역시 주일 성수를 못 한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온전한 주일 성수를 강조하려면, 하나님이 이들을 이집트의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신 것처럼, 물질주의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러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느라 주일 성수를 못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줘야 한다. 상대를 밟고 넘어서지 않으면 내가 밟혀서 짓눌리는 구조 속에서 정상적인 '하나님 예배'와 '육체 안식'은 요원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 없이 목사들이 앞뒤 다 자르고 '주일 성수'만을 얘기하는 건, 주일 하루 대목을 놓칠 수 없는 종교 장사꾼이거나, 빈곤한 인간성에 비대한 종교성의 소유자라는 걸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

*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의 부활로 종결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안식일은 '모형'이요 '그림자'이고, 예수가 '실체'이고 '완성'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안식일은 안식일에서 끝나지 않는다.

안식일은 안식년과 연결하고 나아가 희년과 연결한 가운데 예수의 사역을 보아야 '완성'을 얘기할 수 있다. 예수를 통해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예수 천당 불신 지옥'에만 써먹고 있으니, 안식일은 엉뚱한 모양으로 변형되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건 또 다른 긴 얘기이니 다음 글에서 얘기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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