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체류자 짓밟는 자여, 저주가 있을지어다
불법 체류자 짓밟는 자여, 저주가 있을지어다
  • 김종희
  • 승인 2009.04.09 16:5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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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나그네 억압 말고 사랑하라. 이를 거절하면 지옥행"

며칠 전 신앙이 아주 독실한 청년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남미에서 미국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그 교회 청년들이 얼마 전부터 시작했다. 뉴욕 퀸즈 거리를 다니다 보면 이른 아침부터 길모퉁이에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를 일꾼으로 데려갈 사람들을 찾고 있는 남미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렵지 않다. 이른 아침뿐이 아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늦은 오후까지 여전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이 교회 청년들은 따뜻한 수프와 빵과 커피로 이들의 차가운 몸과 마음을 녹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중에 한 청년이 "남의 나라에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불법을 묵인하거나 도와주는 것인데, 그게 과연 신앙인으로 올바른 태도일까" 하는 질문을 던졌단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 청년뿐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현행법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불법'이라는 점을 민감하게 여기는 순수한 마음 때문이지,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싫어서 핑계거리를 억지로 만드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신구약성서에 숱하게 등장하는 '나그네'를 방랑자 김삿갓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성서 속의 나그네는 역마살이 잔뜩 끼어서 이리저리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이런저런 원치 않는 이유로 인해 나그네로 전락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이다. 성서 속의 나그네는 바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고 명령했다.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의 신분이 불법인지 먼저 확인하라든지, 불법 나그네를 돌보면 돌로 맞아죽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신분의 성격을 따지지 않았다.

   
 
  ▲ LA에 사는 가난한 남미 사람들이 공과금조차 내지 못해 전기와 수도가 끊길 위기에 처하자 한 한인 교회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NGO에 대납을 해주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사진은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 남미 사람들.  
 
나그네들의 피로 세운 미국, 그들을 쫓아내고도 '기독교 국가?'

미국은 수많은 나그네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나라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 최고의 경제력은 세계 곳곳에서 흘러온, 또는 끌려온 나그네들의 피로 쌓아올린 것이다. 하나님은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지만, 미국은 나그네를 골치 아픈 애물단지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이 찰거머리들을 내쫓을까 끙끙대고 있다.

며칠 전 발간된 <NEWSWEEK>에서 부시 대통령 때보다 오바마 대통령 때 기독교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약해졌다고 생각하는 미국 사람들 숫자가 늘었다는 글을 읽었다. '힘은 센데 머리는 나쁜' 미국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지폐에 'IN GOD WE TRUST'라는 글자를 새겨넣고, 대통령 취임식 때 성서에 손을 얹는다고 해서 기독교 국가가 되는 건 아니다. 나그네를 본토인처럼 대하고 사랑하라는, 심지어 안식년이 되면 노예조차도 해방시켜주라는 하나님의 엄명을 기쁘게 실천할 수 있어야 진짜 기독교 국가가 아니겠는가.

미국에서 한국인들은 나그네다. 합법적인 나그네도 있지만, 불법적인 나그네가 더 많다. 지금은 합법 나그네 신분이라 하더라도 대개는 불법에서부터 시작해서 오랜 고생 끝에 합법 나그네가 되었다. 미국에 사는 한국인은 나그네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법하다. 동병상련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현실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욕하면서 배우는 한국인 나그네들

형편 조금 나은 나그네가 형편 조금 더 나쁜 나그네를 무시하고, 짓밟고, 괴롭히는 모습을 너무 쉽게 보게 된다. 미국의 한국 나그네가 운영하는 업소에서 일하는 남미 나그네나 중국 동포 나그네의 공통점은 얼굴 표정이 무척 어둡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이 다니는 교회는 절대 같이 안 다닌다는 것이다. 교회와 가게에서 전혀 딴판인 주인의 두 얼굴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우면 그럴까.

미국에서 같은 나그네 처지인 한국인들이 남미 나그네나 중국 동포 나그네들을 폄하하듯이,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다들 잘 알고 있다.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해 가난한 나라 땅에 공장들은 세우면서, 이 나라에 들어오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제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기사와 동영상은 한국 사람들이 외국인 나그네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관련 기사)  (관련 동영상)

   
 
  ▲ 대전출입국관리소 단속반원이 단속된 중국인 여자을 승합차 안으로 끌고들어가 폭행하고 있다. <중도일보> 동영상 화면.  
 
"만약 저 중국 여자를 폭행했던 단속반원의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면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맞다,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 봐, 그런가 봐. 그런 사적인 경험이 있더라도 그걸 통해서 공적인 영역을 성찰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이라면, 저런 짓은 상식적으로라도 할 생각을 못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저 지극히 보잘것없는 중국 여자가 당하는 폭행에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는다면, 가슴이 찢어지게 아파오지 않는다면, 비통한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뜨거운 지옥 불로 떨어져 거기서 통곡하고 이를 갈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악담을 해도 너무 심하지 않냐고? 내 얘기가 아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열 처녀, 달란트, 양과 염소 이야기 등 세 가지 천국 비유가 나온다. 성서를 열심히 읽지 않더라도 세 천국 비유는 귀가 닳도록 들어서 신학자 이상으로 빠삭하게 안다. 그런데 꼭 빼먹는 게 하나 있다.

마지막 때가 되었다. 목자는 모든 민족을 모은 다음 양과 염소를 가른다. 양은 하나님나라를 물려받게 되지만, 염소는 저주를 받아서 영원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 기준은 뭘까. 간단하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땡!"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나그네 된 자들을 집으로 맞아들였는지, 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었는지, 병든 자를 간호해주었는지, 갇힌 자를 찾아주었는지 하는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존귀한' 자가 아니라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다.

우리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중국 여자 나그네를 집으로 맞이하기는커녕 무참하게 짓밟고 있다. 하지만 예수는 바로 이렇게 '지극히 보잘것없는' 자들을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여자를 괴롭힌 자를 골라내서 '염소우리'에 집어넣겠다고 했다. "난 안 때렸어요" 하고 딴청 부려봐야 소용없다. '때린 놈'만 골라낸다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맞아들이지 않은 놈'도 '염소우리'행이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다. "주 예수여, 하루 속히 오소서" 하는 강심장들이 부럽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다.

대부분 교회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외국인 나그네에 대해서 무관심한 채 해외 선교에만 열을 내고 있다. 외국인노동자 선교라는 이름으로 사역하는 일부 대형 교회들은 마치 대단한 자선이라도 베푸는 양 폼 잡고 있다. 하지만 이건 뽐내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안 하면 하나님한테 작살이 나는 일이다.

교회 또는 목사에게 유난히 '착하고 충성되어서, 십일조 많이 하고 주일 성수 열심히 하는' 교인이 있다고 치자. 만약 그가 업소 주인이라면 남미 사람이나 중국 동포인 종업원이 함께 교회를 나오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업소에서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지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표정이 밝은지 어두운지, 주인을 신뢰하고 좋아하는지 불신하고 싫어하는지 얼른 봐도 알 수 있다.

교회 혹은 목사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기보다 예수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받으려면, 나아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지옥 불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나라에 무사히 들어가려면, 목사나 교회보다 나그네들을 더 잘 섬겨야 한다. 아무래도 그들이 목사보다는 훨씬 더 '보잘것없는 작은' 이들이 아니겠는가.

목사는 이걸 엄히 가르쳐야 한다. 10년 이상 다닌 교회에서 목사에게 그런 가르침을 적어도 1년에 한 번도 못 들었다면, 그 목사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에게 들은 호칭을 다 들을 만한 자격을 갖춘 존재다. 예수는 그런 자를 '눈 먼 인도자'요, '위선자'요, '어리석은 소경'이요, '뱀과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이들이 지옥 불로 추락하는 데도 경고를 하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예수 부활했으니, 할렐루야!", "제발 입 좀 닥쳐줄래?"

부활 주일을 목전에 두고 목격한 이 사건을 애써 외면하면서, "즐겁도다 이날, 세세에 할 말, 사망 권세 깨고 승리하셨네, 할렐루야!" 목청껏 부르는 찬송 소리에 하나님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귀를 틀어막으면서 이렇게 소리 지를 것이다. "제발 입 좀 닥쳐줄래!"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 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암 5:21~24)

   
 
  ▲ 예수 부활의 기쁨은 저렇게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 지극히 보잘것없는 저 여인네가 누릴 수 있어야만 그 의미가 진정 되살아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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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이에스 2009-04-11 11:29:46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지요. 현시대에 통하지 않는 사문화된 일부 율법이 구원에 이르게는 하지 않습니다만 행함과 믿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reader 2009-04-11 11:05:28
글을 읽어보니, 성경에는 불쌍한 나그네를 대접하라 하였으니 불법이냐 합법이냐를 따지지 말고, 무조건 보살펴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외면하거나 박대하면 마지막 심판 때에 지옥 간다는 논리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신학적으로 정리될 수 있는 있는 문제인지, 그리고 불법체류자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보살펴준다고 근본적으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인지, 사회학적으로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이 글은 단순한 감상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첫째로, 예수를 믿지 않고도,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만 잘 구제하면 천당을 갈 수 가 있고, 반대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불쌍한 자를 구제하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인가? 하는 근본적인 구원론의 문제를 제기할 수가 있다. 내가 보기에는 천당에 가고 안가고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는가/ 안했는가로 결정되는 중생의 문제이다. 그리고 믿는자로서 선행을 행했느냐, 그러지 못했는가의 문제로 심판한다는 말씀은 행위구원의 문제, 즉 상급에 속하는 문제이다. 신학적 용어로 공심판과 사심판의 차이이다. 이 둘을 혼돈해서 사용한다면, 구원관에 공연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성경을 신학자 이상으로 빠삭하게 안다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해석한다고 보고 싶지 않다. 좋은 뜻으로 행위구원을 강조하느라 그렇게 말했다고 보고 싶다. 둘째로, 불법체류자의 문제는 미국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심각한 문제이다.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의 입장에서 불법체류자를 단순히 숨겨주고 보호해 주는 것으로 해결 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사회정책적으로 다루어야 할 영역이 분몀히 있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3D 업종에 자국민이 가는 걸 꺼리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외국인 근로자를 들여오고, 그 과정에서 합법과 불법이 뒤섞여지면서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지게 된 면이 크다. 그렇게 된데에는 정부당국의 책임도크다. 언젠가, 새벽에 미국공항에 내려서 가는데 아침에 노숙자 비슷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나오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물으니, 불법체류자들이라고 동석했던 사람이 말했다. 그래서 왜 단속을 안하느냐고 물으니, 그걸 다 단속하면 이민국에 잔디를 깍을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다. 불법체류자 문제가 다분히 정책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본다. 미국과 한국은 사정이 좀 다르겠지만, 미국의 경우에는 워낙 불법체류자가 많으니까, 개인차원에서 선대하는 것만 독려할 것이 아니라, 교회적으로 어느정도 일정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법적인 거주자격을 얻을수 있도록 시민사회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본다. 미국은 표로 움지이는 정치이니까, 교회가 연합해서 활동하면 큰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 지역정치인을 위시해서 관계기관에 청원을 하는 것을 꾸준히 병행하여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경우에는 나라가 크지 않아서 외국인노동자의 집을 비롯해서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외국인근로자를 보호하고 의료와 복지에 힘쓰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기자가 생각하듯, 한국교회가 그렇게 무관심하지 않다, 미력이지만 한 때 필자도 그런 일에 관여했기 때문에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직접 나서서 그 일에 동참하는 교회와 목사님도 많지만, 익명으로 돕는 분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고 필자도 놀랐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외국인 노동자의 복지 사업은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사족같은 말 하나를 덧 붙이면 부활절 예배를 듣지 않겠다는 표현은 아무리 풍자라 해도 과한 것 같다.마치 하나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 같은 오만이 느껴진다. 근본적으로 이런 문제를 제기 해본다. 부활절예배 뿐 아니라, 우리가 매 주일 드리는 모든 예배가 과연 하나님앞에 드릴 자격이 있어서 드리는 것일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일주일 동안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고백하면서 회개하는 심정으로 드리는 것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용서받은 죄인들에게 더 예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