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네덜란드어, 길 건너에선 불어'
'여기선 네덜란드어, 길 건너에선 불어'
  • 최용준
  • 승인 2009.04.0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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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언어 사회의 장단점

필자가 살고 있는 벨기에는 인구 1,000만 명인 비교적 작은 나라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규모치고는 상당히 복잡한 나라입니다. 우선 공식 언어가 세 개입니다. 북부 플랑드르 지역에서 사용되며 플레미시(Flemish 또는 Vlaams)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어와, 남부 및 수도인 브뤼셀에서 많이 사용되는 불어, 그리고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벨기에 영토로 귀속된 동부 지역 일부에서 사용되는 독일어입니다. 여기에다 유럽 연합 본부와 나토 사령부가 브뤼셀에 있어 영어 또한 널리 사용됩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국명도 네덜란드어로는 Koninkrijk België, 불어로는 Royaume de Belgique 그리고 독일어로는 Königreich Belgien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Kingdom of Belgium입니다. 수도인 브뤼셀도 쓰는 방법이 달라 네덜란드어로는 Brussel, 불어로는 Bruxelles, 독일어로는 Brüssel 그리고 영어로는 Brussels입니다. 도시 이름도 불어와 네덜란드어가 서로 달라 교통 표지판이 헷갈리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따라서 은행에 가면 보통 위의 네 가지 언어로 안내문이 적혀 있으며 구좌를 개설할 때에도 이 네 가지 언어 중 자신이 원하는 언어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관공서의 경우 대부분 네덜란드어와 불어 중 택일을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은 남북 언어권의 경계이므로 이쪽 수퍼마켓에 가면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지만 길하나 건너 다른 쪽 수퍼에 가면 불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상당히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조금 적응이 되었습니다.

   
 
  ▲ 벨기에는 인구 1,000만 명인 비교적 작은 나라지만, 또한 상당히 복잡한 나라입니다. 우선 공식 언어가 세 개나 됩니다.  
 
그래서 처음 낯선 벨기에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아시아 사람인 저에게 말하는 것은 'Hello' 같은 인사가 아니라 'English? French? Flemish?'입니다. 즉 무슨 말을 할 줄 아느냐는 것이지요. 그만큼 벨기에 사람들은 다중 언어에 익숙한 민족입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벨기에에는 구멍가게 아저씨도 4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입니다.

한 한국 형제가 독일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벨기에에서 최종 과정을 마치기 위해 유학을 왔습니다. 하루는 신문을 사려고 동네 구멍가게에 갔는데 막상 말이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물쭈물하니까 가게 아저씨가 할 수 있는 언어로 하라고 말해서 결국 독일어로 신문을 사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럽에서는 벨기에와 스위스가 이런 다중 언어 국가가 될 것입니다. 두 나라의 공통점은 작은 나라이면서도 선진국이라는 사실입니다. 스위스는 공식 언어가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그리고 로만쉬라는 라틴계 언어까지 4개 국어입니다. 물론 이곳도 영어는 쉽게 통용되지요. 따라서 두 나라에 국제적인 기구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작지만 글로벌 경쟁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것이 다중 언어 사회가 주는 유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의 언어만 사용되는 사회나 국가는 의사소통의 효율성은 높겠지만 그 언어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언어일 경우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에 다중 언어권에 사는 경우, 세계를 보는 관점이 넓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언어란 결국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과 같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창으로만 보는 것보다 여러 각도에서 다른 창으로 세상을 볼 경우 훨씬 더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며 따라서 사고의 유연성이 제고될 것입니다.

하지만 단점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언어권이 다름으로 인해 벨기에의 경우처럼 불어권과 네덜란드어권 간에 경제적·문화적·정치적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두 언어권의 차이로 인해 벨기에는 국가적 결속력이 다른 나라보다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국가 간 축구 시합을 해도 벨기에는 독일이나 네덜란드 또는 한국처럼 단합되어 응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중 언어 사회는 궁극적으로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베네룩스 지역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양한 언어에 이미 귀가 익숙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만 해도 네덜란드어·불어·독일어·영어·스페인어·이태리어 등 유럽의 주요 언어를 들으며 위성 방송을 통해서는 훨씬 더 많은 언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언어를 더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세계관이 넓어진다는 것이며 사고의 폭이 확장되므로 보다 다양하고 창의적인 생각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국 글로벌 사회에서 한 발 앞서나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이러한 취지에서 한 달에 한 번은 예배 시간에 다국어로 성경을 봉독합니다. 교회에 나오시는 여러 나라 성도들과 2세들의 다양한 언어권을 반영하여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언어로 같은 본문을 여러 언어로 봉독하는 것입니다. 보통 네덜란드어·불어·영어·한국어·러시아어·독어·일어·중국어 등의 언어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분들에게도 예배에 대한 참여 의식을 높이며 그들도 소중한 지체임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요즈음 한국에도 영어 외에 일본어와 중국어가 더빙 없이 그대로 케이블 TV에 한글 자막과 함께 나오고, 지하철 등 공공 교통 안내 방송도 다양한 언어로 서비스가 되고 있음을 보면서 국제 경쟁력이 한층 제고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중 언어 사회가 된다고 해서 한글이 약화된다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중 언어 사회 속에서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더욱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네덜란드어나 불어에는 경음(硬音)이 강하고 격음(激音)은 거의 발음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영어나 독어는 격음이 강한 반면 경음은 발음이 잘 안 됩니다. 그러나 한글은 둘 다 발음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Korea)을 말할 때 네덜란드 사람은 '꼬레아'라고 발음하고 불어로도 '꼬레'라고 하지만 '코레아'나 '코레'라고는 발음이 잘 안됩니다.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코리어', 독일 사람들은 '코레아'라고 하지 '꼬리어'나 '꼬레아'는 발음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해외에서 자라나는 2세들은 한국어와 현지어를 동시에 구사하며 현지어가 영어가 아닐 경우, 영어 및 다른 언어를 구사할 경우 이들은 동서양의 주요 언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두 세계를 아우르며 하나님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인재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느 언어라도 하나는 확실하게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 자아 정체성에 혼란이 생길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과 회당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는 히브리 방언으로 복음을 전했고(행 22:2), 헬라인들에게는 그들의 철학과 아레오바고 그리고 그들이 구사하는 헬라어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 가장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웠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함으로 별과 같이 빛나는 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와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전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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