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예쁜 피오나? 밤의 못난 피오나!
아침의 예쁜 피오나? 밤의 못난 피오나!
  • 김민웅
  • 승인 2009.04.27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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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슈렉]이 보여주는 희망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실 때 '씨앗'으로 빗대는 이야기를 하시는 대목이 성서에는 유난히 부각되어 나타난다. 그 뜻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차원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나라의 생명, 축복 그 시작은 애초에는 과연 거기에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싶은 미미한 출발에 있다, 이 씨앗이 성장하는 과정은 그러나 사실 간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일단 이 씨앗이 열매를 맺기까지 크면 그것은 진실로 경이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등등, 씨앗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메시지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마가복음 4장 30~32절에 나오는 '겨자씨의 비유' 역시 우리가 수없이 되풀이해서 묵상해오고 그 의미를 캐어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겨자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할 때, 우리는 대체로 그 출발이 미약하나 그 나중이 클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를 가진 성장의 차원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성장의 진정한 목적과 성장한 존재의 성품'에 대하여 눈을 돌리지 않으면 우리는 이 겨자씨의 비유를, 자칫 경쟁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면서 세상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뻐기는 세속적 성공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 겨자씨가 작고 보잘것없을 때에는 새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을 때 자신을 공격하던 새들을 내쫓지 않고 자신의 가지에 둥지를 만들어 새끼를 키우도록 허락한다.  
 
씨앗을 공격해오던 새들마저 품는 큰마음

겨자씨가 큰 나무로 되어가는 이유는, 세상에서 헤매며 깃들 곳이 없는 새들이 다 자란 겨자나무의 그늘에라도 안식을 취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주시해야 한다. 겨자씨가 작고 미약할 때에는 이 씨앗을 향해 공격해오던 새들이라 할지라도, 이다음에 크면 어딜 다가오느냐면서 그 새들을 내쫓지 않고 그들마저 품고 위로와 평안을 주는 그런 넓고 큰마음,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 그것이 하나님나라가 우리 안에서 이룩하시려는 생명의 현실이다, 이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의 입장, 그들의 삶의 정황을 두고 뜻을 새겨보면 여기서 등장하는 겨자씨는 곧 이들의 미미하기 짝이 없는 실존을 그대로 일컫는 것임을 알게 된다. 겨자씨의 비유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잘났다고 교만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그런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혹여 무슨 좋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제발 어떻게 희망에 찬 격려의 한 마디라도 얻어들을 수 없을까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바닷가에 몰려든 이름 없는 무리들에게 들려주셨던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인생이 세상에서 그 어떤 풀보다 작은 겨자씨나 다를 바가 없다고 여기며 열등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비유가 설파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유에 나오는 겨자씨는 이들의 마음에 그대로 다가가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겨자씨 한번 봐라, 이게 바로 너희들과 다를 바가 없이 작고 미미하고 볼품도 없는 것 같지 않은가?"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그래, 내가 겨자씨 그 모양이지, 어디 이 세상에 내세울 만한 것이 있기나 하나, 누가 알아주기를 하나, 어떻게 좀 땅에 뿌리박고 살려고 하면 힘세다고 으스대는 자들이 와서 찝쩍대지를 않나, 서러워서 살기 힘들다." 그렇게 말할 법한 상황인 것이다.

세상의 품성을 닮지 말라

이렇게 현실에서 휘둘리고 다치고 상처 입으면 어떤 이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는 더더욱 야망에 불타서 마음에 독기를 품고 나도 언젠가는 크고 말 거야, 어디 나를 괴롭히는 이 세상, 내가 크고 나면 그 세상을 내 앞에 무릎 꿇게 하고 말 거야 하는 식으로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에 이렇게 속삭이신다.

"그래, 이렇게 밟히면서 계속 살고 싶지 않지? 그러니 물론 커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미미하고 업신여김을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야.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네. 그리고 그렇게 클 수 있는 힘이 이미 그대들 안에 있어. 문제는 뭔가? 그 씨앗이 땅에 심겨지는 것이야. 하나님나라의 생명에 인생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은사가 꽃피고 열매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야. 자기도 모르게 무럭무럭 자라나게 되는 것이지. 때로 시련과 고난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 인생 안에서 한 번 시작한 하나님나라의 성장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 이것을 굳게 믿기를"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야말로 큰 격려이다. 자신의 인생에 절망하고 꿈을 접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놀라운 축복, 그 미래에 대한 확신을 뜨겁게 불러일으키시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똑 부러지게 짚고 넘어가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크다고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을 닮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성장한 나무의 성품, 즉 공중을 헤매던 새들이 그 나무의 그늘에조차 깃들 수 있도록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대목에 담겨 있는 깊은 일깨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좌절감,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자신도 믿지 못하는 처지, 남들과 비교해보면 부족하기만 한 자신의 현실 등등, 겨자씨와 같은 존재가 고뇌하게 되는 일은 적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부터 꿈같은 동화 속에서 축복의 미래를 구했다. 그것이 분명 허구인 줄로 알지만, 동화의 주인공처럼 이 고된 현실의 마법이 풀려 멋진 성채에서 모두가 떠받드는 가운데 왕처럼, 여왕처럼 되는 것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화는 언제나 "그렇게 해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노라"라고 끝나는 해피엔딩이 되어야 했다. 서양의 민담은 그런 동화의 세계를 무한히 보여준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요정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다. 마음씨는 아름답지만 못생긴 공주가 나온다거나, 또는 정의롭고 용감하지만 키가 작고 땅딸한 왕자가 나온다든지 하는 법이 없다.

   
 
  ▲ 이름 없는 일곱 난장이들은 백설공주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왕자를 만난 백설공주는 숲 속을 떠났고, 둘의 만남이 난장이들의 현실에는 어떠한 진전된 변화도 주지 못했다.  
 
선택된 소수의 행복

가령, 백설공주에서 등장하는 7명의 키 작은 난장이들은 공주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내는 조역에 만족해야 한다. 난장이로 대표되는 이름 없는 백성들은 이렇게 언제나 변두리에서 머물고 만다. 마법에 걸려 잠에 빠져든 공주가 낯모르는 남자의 첫 키스에 눈을 뜨고 곧바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 따지고 들면 상당히 논란거리일 수 있다.

아무튼, 만일 그 남자가 왕자도 아니고 성채도 가지지 못한 평범하고 가난하며 못생긴 나무꾼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다. 평소에 남몰래 그녀를 사모했던 나무꾼이 진심 어린 사랑으로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자 그녀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공주는 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는데 일곱 명의 난장이와 함께 숲 속에서 그 나무꾼과 별 다른 도리 없이 어찌 어찌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렇게 결말이 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백설공주는 난장이들이 사는 숲 속의 현실에 어느 날 갑자기 뛰어들더니, 그 숲을 결국 떠나고 만다. 숲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의 현실에는 아무런 진전된 변화가 없다. 좀 신랄하게 말하자면 선택된 공주와 왕자의 이야기로 그친 것이다.

인어공주가 사모하는 청년은 밤낮으로 배를 타고 바다에서 그물질하는 얼굴이 검게 탄 뱃사람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잘 생긴 미소년 왕자였다. 신데렐라는 본래의 신분보다 상승한 귀족적인 여인으로 꾸미고 나서야 비로소 왕자와 무도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의 본래의 모습으로 멋진 왕자와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세계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신데렐라가 왕궁에서 왕자와 결혼한 것이 그 나라 전체의 축복처럼 이야기는 전하고 있지만, 사실 백성들은 이들 왕족들의 잔치를 구경하는 구경꾼에 불과했고, 왕정 체제의 봉건적 현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의 결혼식을 위해 엄청난 장식과 음식이 마련되지만, 사실 이러한 현실은 백성들의 뼈 빠지는 현실로 볼 때에는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의 동화에서 등장하는 왕자의 아버지 왕은 언제나 너그럽고 자애로우며, 백성들은 어느 누구도 그런 왕정 체제에 불만을 가지지 않는 착한 백성들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동화의 메시지는 언제나 동일하다. "너도 잘하면 왕자와 공주의 선택된 축복에 낄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동화의 세계는 못생기고 잘나지 못했으며, 그래서 마법이 풀려 어느 날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되어 부유하고 우람한 성채의 주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현실의 백성들에게는 그림의 떡이거나 열등감만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다. 이와 같은 동화를 만화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에 보급한 디즈니 영화는 사실 선택된 소수의 행복을 보여주는 데 열중한 셈이었다.

디즈니와 경쟁해온 만화영화사 드림워크사가 최근(이 글은 2001년에 쓴 것임을 기억해주시길 - 편집자 주) 내놓은 <슈렉(Shrek)>은 이러한 디즈니의 동화 세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이 영화는 디즈니 영화가 추구해온 선택된 소수의 엘리트주의를 철저하게 부정하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데 성공했다. 오랜 세월 철옹성과 같이 있던 디즈니 만화영화의 아성을 깬 것이다.

   
 
  ▲ <슈렉 3>에는 신데렐라, 백설공주, 피오나 공주, 라푼젤,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동화의 여주인공들이 등장했다.  
 
우리가 걸린 마녀의 마법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성 밖의 늪지대에는 엄청 못생기고 몸집이 큰 괴물 모양의 슈렉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슈렉의 거처에 온갖 동화의 주인공들, 백설공주, 신데렐라, 피터팬, 피노키오 등등이 대거로 몰려들었다. 알고 보니, 악덕 성주 파콰드가 이들을 모조리 내쫓고 늪지대를 차지해버린 것이다. 파콰드는 백설공주에 등장하는 말하는 거울을 통해서, 백설공주와 신데렐라, 그리고 영화 슈렉에 새롭게 등장하는 피오나 공주의 거울 선을 보고는 피오나를 선택한다. 세 명의 공주 가운데 하나와 결혼하면 왕이 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한편, 슈렉은 늪지대의 문제로 파콰드 성주와 담판을 짓다가 용암이 흐르는 용의 성에 갇힌 피오나 공주를 데려오면 늪지대를 돌려주겠다는 말에, 피오나를 구하러 떠난다. 슈렉에게는 동행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말하는 당나귀였다. 이 당나귀는 바보 이반 이야기가 있는 러시아 동화에 등장하는 당나귀를 연상하게 한다. 슈렉이나 당나귀나 모두 세상에 못나고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차여차 하여 용의 섬에서 피오나를 구하여 성으로 돌아오던 슈렉은 그만 피오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자신의 몰골을 생각하면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

피오나의 성격도 매우 재미있다. 앞에서는 얌전한 척 내숭을 떨지만 사실은 격투기까지 할 줄 아는 왕 왈가닥이었다. 하지만 피오나 공주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다. 해가 지면 못생기고 뚱뚱한 여자로 변하는 것이다. 마법에 걸렸던 것이다. 피오나는, 그러나 자기와 결혼을 하기를 원하는 파콰드 성주가 자신에게 키스를 하면 이 마법에서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는 중 슈렉은 피오나에 대한 연정에 마음을 태운다. 공주를 맞이한 파콰드 성주는 그날 해가 지기 전 결혼하자는 피오나의 청에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는데, 도저히 사랑의 진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슈렉은 영화 졸업의 더스틴 허프만처럼 나타나서 사랑을 고백하고, 결국 피오나는 악덕 성주 파콰드를 물리치고 태양이 지는 창문 옆에서 자신의 못생긴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속으로는 슈렉이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 정나미가 떨어져 돌아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슈렉은 도리어 피오나가 자기 과(科)에 속한다고 여겼는지 크게 기뻐하고 키스한다. 그러자, 마법이 풀리는 찬란한 장면이 연출되더니 피오나가 하늘에 들렸다가 내려오는데……. 아! 기가 막힌 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못생기고 뚱뚱한 모습 그대로가 되어서 슈렉 앞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의 이야기가 포복절도하게 뒤집어지는 순간이다. 악덕 성주 파콰드는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으며 늪지대는 동화의 주인공들에게 되돌려지게 되었다. 슈렉과 피오나는 결혼했지만, 왕과 여왕이 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결혼으로 늪지대와 성채는 평화를 되찾게 되었던 것이다.

결혼식에서 피오나가 던진 부케를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서로 먼저 잡겠다고 다투는 장면은 디즈니식 동화 이야기에 대한 드림워크사의 일격이긴 했으나, 현실에서 못생긴 신부가 던진 부케를 미인들이 잡으려고 할 리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영화 슈렉은 세상이 경멸하거나 스스로 열등감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통쾌한 희망을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곰곰이 따져보니, 사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피오나는 밤이 되면 못생겨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못생겼지만 태양이 뜨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는 어떻게든 예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현실을 상징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면 볼품없어지게 되는 것이 마법이 아니라, 아침이 되면 미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정작 이 시대의 마법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쁜 피오나는 성격도 오만하고 도도하다. 남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은 조금만치도 없다. 자기 잘났다고 어찌나 높게 노래를 부르던지 나뭇가지에서 함께 지저귀던 새가 그만 그 높은 음에 질려 죽고 만다. 반면에, 평범한 모습의 피오나는 편안하게 웃을 줄 알고, 겸허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각도에서 다시 새겨보면, 영화 슈렉의 메시지는 이렇게 다가온다. "남들보다 잘생겨야 하고 예뻐야 하고 높아져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걸린 마녀의 마법이다"라는 것이다. 본래 주어진 삶의 가치를 스스로 열등하게 여기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축복을 구하기보다는 단 한 번의 키스로, 또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굉장한 운수를 잡았으면 하고 헛된 꿈을 꾸는 것이다.

피오나는 자신의 못생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슈렉과의 사랑에 성공한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못생겨진 것이 아니라 진실해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진실의 땅에서 자라나는 것 아닌가? 거기에서 악의 마법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하여, 피오나에 대한 슈렉의 키스가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피오나가 자신에게 진실해진 순간 그 사랑의 키스가 마법을 깨는 효력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 슈렉이 키스를 하면 피오나가 기가 막힌 미녀로 변신하길 다들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오나는 여전히 못생기고 뚱뚱한 모습이었다. 피오나는 자신의 못생긴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슈렉과의 사랑에 성공했다.  
 
밤의 피오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성서는 이에 더하여, 다만 자신에게 진실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존재의 은사에 눈뜨도록 일깨운다. 그것이 지금 비록 작고 미미할지라도 겨자나무의 놀라운 꿈이 그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기쁨에 마음이 열리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나라의 생명이 뿌리내리면,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존재의 은사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약속하고 있다. 세상은 온통 선택된 소수자로서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며 혼자 성채를 차지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무수한 인생을 곤고하게 하고 있으며, 그렇지 못한 삶에 대하여 상처와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아침이 되면 누구나 아름다운 피오나가 될 줄로 알지만, 밤이 되면 자신의 정직한 현실로 돌아와 못생긴 피오나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이 모습은 본래의 내가 아니야, 운 나쁘게 마법에 걸려서 그래 하고 분노하거나 절망하든지 슬픔에 빠진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태양이 뜨면 남들의 눈앞에서 아름다운 피오나가 되어야 한다는 마법의 강박관념에 포로 되어 있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간다.

예수님은 자기만의 거울 앞에 드러난 밤의 피오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아름다운 은총에 눈을 뜨고 하늘의 생명과 축복을 흠뻑 받아 자라나라고 말씀하신다. 파콰드 성주가 겉모습만 보고 혹한 아침의 피오나가 아니라, 또는 못난 슈렉이 감히 사랑을 고백하기 어렵도록 아름다운 피오나가 아니라, 태양이 뜨건 지건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진실한 자신감을 가지면, 하나님나라의 생명에 충만하여 누구도 함부로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멸시할 수 없는 진실로 강하고 아름다우며 우뚝 선 존재가 되는 축복을 누리도록 해주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에서 지쳐 있고 힘겨워 하며 스스로의 인생에 자신을 잃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주신 복된 약속이다. 이 약속을 믿고 살면, 어느새 그는 메마르지 않는 사랑의 저력과 깊은 지혜와 꺼지지 않는 열정을 그 영혼에 길러 나갈 수 있다. 하여, 누구나 그에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그 마음의 능력이 크고 높아서 세상의 헤매는 이들이 그로부터 안식을 구할 수 있으며, 그 자신 또한 그리하여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삶 안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을 기쁨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부디, 겨자씨와 같은 존재에게 주신 이 말씀에 자신을 걸고 하나님나라의 참된 능력이 그 인생에서 융성해지기를…….

김민웅 / 성공회대 NGO 대학원 초빙 교수 (이 글은 2001년 7월 <뉴스앤조이>에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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