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잔 보일, 당신의 촌스러움이 당신의 진실입니다"
"수잔 보일, 당신의 촌스러움이 당신의 진실입니다"
  • 김종희
  • 승인 2009.04.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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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약 세계적 스타 된 영국 노처녀…껍데기는 가라

4월 11일 영국 텔레비전 쇼 'Britain's Got Talent 2009'에 수잔 보일(Susan Boyle)이 얼굴을 드러냈을 때, 청중들은 아주 흥미로운 눈길을 담고 심사위원들은 약간 내리까는 분위기를 품고 그녀를 맞았다.

그럴 만도 했다. 재처럼 뿌연 그녀의 머리카락은 약한 빗으로 빗었다가는 빗이 뚝 부러질 것처럼 잔뜩 헝클어졌다. 축 처진 턱은 두 개였고, 정리 안 된 눈썹은 고집 센 남자의 그것처럼 굵고 짙었다. 자신의 나이가 47살이라고 하자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환갑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리라), 너무 당연한 반응이어서 차라리 식상하다는 듯이 통나무같이 굵은 허리를 마구 돌려댔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결혼은커녕 연애 한번 못 해보고, 마땅한 직업도 없는 그녀에게 매력을 느낄 만한 구석은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텔레비전 쇼에 출연하는데 머리도 감지 않은 것처럼 망가진 채 나오는 건 너무 심하다 싶었다. 대기실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라.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다만 웃을 때 얼굴 깊숙이 숨어 있는 눈이 가늘게 둥글어졌고, 속없이 좋은 옆집 아줌마 같은 푸근함이 가는 눈에서 번져나갔다. 그게 매력이라면 유일한 매력처럼 느껴졌다. 작은 시골 동네에서 왔다는 그녀의 말을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수잔이 말하는 순간 청중석에는 냉소와 비아냥거림이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수잔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노래 'I Dreamed A Dream'을 부르겠다고 했다. 청중들의 박수에 이어 전주가 잠시 흘렀다. 수잔이 "I dreamed a dream in time gone by ~" 하고 첫 소절을 부르자, 청중석을 휘감던 냉소가 순식간에 감탄과 환희의 박수로 바뀌었다.

그녀의 표정, 말투, 외모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노래가 그녀의 맑고 시원한 목소리를 통해서 공연장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얼굴을 찡그리거나 빈정거리던 표정을 짓던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심사위원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모두들 최고의 찬사를 그녀에게 주었다.

   
 
  ▲ 대기실에 앉아서 빵을 먹고 있는 수잔 보일(왼쪽).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녀를 비웃는 청중(가운데). 그녀의 목소리에서 선율이 흐르는 순간 모두가 전율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오른쪽).  
 
자기가 부른 노랫말처럼 그녀의 꿈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이 순간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바꿔놓기에 충분해 보였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수잔에 대한 이야기와 동영상이 퍼져나갔고, 전 세계 수많은 네티즌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시골 마을로 돌아갔으나, 더 이상 과거의 그녀는 아니었다. (동영상 보기)

얼마 전 래리 킹 쇼에 출연한 그는 조만간 오프라 윈프리 쇼를 비롯해 미국의 각종 프로그램에 등장할 것이다. 아직 본선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이미 음반 제작 제의가 들어왔다. 미국의 화장 업계는 그녀에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가상으로 만들어 인터넷에 띄우고, 성형 수술 제안 얘기를 흘리고 있다.

수잔도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했다. "지금 내 모습 이대로면 어떻습니까? 꼭 달라져야 하나요? 물론 화장은 할 겁니다. 하지만 보톡스 주사를 맞는다든지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 수잔 보일이 머리차림과 옷차림을 세련되게 꾸미고 외출하는 모습을 발 빠르게 담은 미국 잡지. 그녀에게는 이제부터 상업주의 귀신이 집요하게 달라붙을 것이다.  
 
수잔 스토리를 접하면서, 영화 <슈렉>이 떠올랐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2001년 김민웅 목사(당시 뉴저지 길벗교회에서 목회했다)가 쓴 <슈렉> 평이 떠올랐다. (아침의 예쁜 피오나? 밤의 못난 피오나!)

백마 탄 멋진 왕자의 키스를 받아들이는 순간 못생긴 얼굴이 예쁜 얼굴로 바뀌고, 알거지 신분에서 공주 신분으로 변신하는, 뻔하고 뻔한 스토리, 하지만 누구나 간절히 꿈꾸는 그런 동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피오나 공주 이야기는 '약발 안 드는 키스' 속에 담긴 진실을 보여주었다.

수잔은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상업주의 괴물들이 집요하게 그녀를 유혹하고 괴롭힐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들은 수잔의 껍데기를 신데렐라로 만들어주는 대신 그의 속을 쏙쏙 빼먹어 만신창이로 만들 것이다.

우리의 넋을 빼앗아간 그녀의 목소리는 껍데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녀가 백설공주나 신데렐라로 변질되는 순간, 수많은 수잔들은 다시 한번 좌절하고 절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헛된 꿈을 꿀 것이다. 수많은 수잔, 수많은 피오나를 위해 그녀가 잘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5월 23일 본선이 열린다고 한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짙은 눈썹, 굵은 허리, 촌스런 의상, 하지만 여전히 맑고 깨끗한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보고 듣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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