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 딜레마' 뛰어넘는 교회가 그립다
'고슴도치 딜레마' 뛰어넘는 교회가 그립다
  • 최태선
  • 승인 2009.05.06 0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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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사람들 (3), 용서가 낯설지 않은 교회를 꿈꾸며

너무도 추웠던 어느 겨울 아침. 고슴도치 두 마리가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의 가시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두 마리는 가깝게 다가갔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다 적당히 따뜻하게 하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하기에 꼭 알맞은 거리를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 고슴도치 이야기는 인간들의 만남을 묘사하는 비유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실제 고슴도치들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진 않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들의 만남을 묘사하는 비유입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를 듣는 분들은 고개를 끄덕이실 것입니다. 가깝게 다가가고 싶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던 기억.

모두가 다 소유하고 있는 과거의 경험입니다. 아마도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 다른 이에게 다가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 모두가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피해자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가시입니다.

의식하고 있지 않은 제 몸의 가시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상대에 대하여 적의나 악의가 없는데도 가깝게 한 결과 상대에게 아픔을 주고 만 것입니다. 이 가시가 없다면 보다 친하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 인간의 고민인 것 같습니다.

대인 관계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가시는 무엇보다도 각자가 갖고 있는 성격이라는 점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성격은 자기 자신 존재의 일부이기에 본인에게는 가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기호, 자기의 방법은 본인에게는 결코 가시로 자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볼 때 이것은 여간 날카로운 가시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 가시를 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빼낸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닌 것으로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존재하고 생존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사람에게는 가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진정 친하게 되는 인간관계는 이러한 바늘이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 이것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랑은 영원한 관계가 되지 못합니다. 상황이 바뀌거나, 상대방이 변하거나 특히 상대방이 가난해지기라도 하면 그 관계는 끝이 나고 맙니다. 그래서 진정한 친구는 고난을 함께 겪어보아야 한다는 말은 삶의 지혜가 담긴 교훈입니다.

   
 
  ▲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 이것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적당한 거리를 무시하는 게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타락한 인간들의 숙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들조차 회복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는 갈등이란 전혀 없는 '갈등 Free 진공상태'가 아닙니다. 적당한 거리를 무시하고 몸과 몸이 맞닿는 새로운 관계이기에 오히려 더 갈등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새로운 관계인 이 밀접한 관계가 가능한 것은 바로 성령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입니다. 끝없는 상처와 갈등을 용서로 해결하는 사람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백성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이 아픈 것은 이 용서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등과 상처가 없는 이유가 용서 때문이 아니라 세상보다 더 먼 안전거리를 두기 때문이라는 현실이 어처구니없을 따름입니다.

끊임없이 용서가 선포되기에 갈등과 상처가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가 너무도 그립습니다. 고슴도치 딜레마를 듣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이 땅에 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용서가 낯설지 않은 교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고슴도치 딜레마를 상관치 않고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 창조 때 우리에게 주어졌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영원 속에서 함께 즐거워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선 / 기자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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