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실천은 '행위' 아닌 '수행'
기독교 실천은 '행위' 아닌 '수행'
  • 김기대
  • 승인 2009.05.06 14:4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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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 (1) 행위와 구원 관계 보여주는 [슬럼독 밀리어네어]

"그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말할 것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7-40절) …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이렇게 패러디해보면 어떨까. "구원을 받지 못한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다. '나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 스승께서 만드신 구원받은 자의 명단에 왜 내가 빠져 있습니까' 이때 스승이 대답하였다. '너는 지극히 작은 사람이 이미 예수인 줄 알고 베풀었다. 그래서 구원에서 배제되었다.'"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기독교인들에게 오래된  화두다. '오직 믿음으로'는 기독교의 주요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이 교리를 싫어한다. 그래서 '예수 살기'도 해보고 역사적 예수에 천착도 해본다. 예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의 창시자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왜곡한 공공의 적이 된다. 현대 기독교인들은 예수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바울교를 믿고 있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만약 바울이 없었다면 우리가 과연 중동의 한 작은 나라, 그것도 갈릴리 지방이 주무대였던, 나아가서 갈릴리 곡창지대에는 얼씬도 못해보고 호숫가로, 변방으로 돌았던 한 사람, 예수를 지금 알 수나 있었을까? 바울 때문에 예수를 알게 된 우리가 그래서 예수처럼 살아보기로 고민도 하는 우리가 바울을 슬쩍 제쳐두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이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이야기했듯이 예수가 칼 마르크스였다면 바울은 레닌이 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이 이상에 치중했다면 레닌은 그것을 정치 세력화해서 마침내 볼세비키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만약 레닌이 없었다면 한 세기를 풍미했던 사회주의는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가 행위의 여인 마르다보다 믿음(들음)의 여인 마리아에게 후한 점수를 준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자들이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며 기독교의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는 것이 보기 싫다고 바울의 해석까지 버릴 수는 없다. 역사적 예수에만 초점을 맞추는 계몽적 근대성의 한계를 바울은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이 거침없이 역사를 영으로 치환시켰다. 바울의 이 케리그마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기독교 신앙이 없다고 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실천을 의무적으로 해야 되는 것만도 아니다. 이웃 사랑은 그냥 보편적 즉 근대적 명제일 뿐이다. 기독교인의 행위와 실천은 근대적 명제를 넘어서 종교적 명제가 되어야 한다.

 

   
 
  ▲ 평자들은 이 영화를 가장 인도적인 영화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행과 깨달음(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실천은 영어로 practice다. 실천신학 practical Theology라는 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독교 실천은 예배를 포함한 의례 행위를 주로 의미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실천은 윤리가 아니라 성사적(聖事的) 의미를 지녀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 실천은 어떤 정의로운 행위, 구제 행위 등으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믿음주의자들'과 '행위주의자들'의 한계 

기독교 실천은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종교적 수행이 되어야 한다. 신앙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미 지극히 작은 자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줄 아는 눈치를 가진 우리는 그가 예수이기 때문에 베푼다.

그러므로 이미 지극히 작은 자가 종교적 도구임을 알고 하는 그 행위는 위선이 된다. 복을 받기 위해 헌금하는 행위와 예수인지 알고 실천하는 행위가 과연 그렇게 다를까? 누구는 기복적이고 누구는 정의롭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노자가 무위(無爲)를 강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전제와 자기 결론, 자기 합리화는 유위(有爲)가 된다. 이미 자기 안에 있는 결론은 결코 신앙의 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른바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실천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웃을 위해 베푸는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은 종교적 실천이 아니라 동정이거나 투자가 된다. 성사적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려는 인간의 소박한 종교성은 사라지고 윤리적 '자기 의'만 자리 잡게 된다.

물론 알고도 행하지 않는 교회를 향해 던지는 일침이라는 것도 안다. 그럴수록 진리를 더욱 고민해야 한다. 자기 의의 부정을 통한 깨달음은 어느 종교에서든지 동일하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요한 9장)은 통렬한 지적이다. 

실천은 윤리가 아니라 수행이 되어야 한다. 실천이 나라는 주체가 있는 행위라면 수행은 나를 버리고 진리에 도달해가는 과정이다. 깨달음(구원)과 수행(실천)의 문제로 수백 년 동안 씨름해온 선불교는 머리가 나빠서 긴 세월 쓸 데 없어 보이는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돈오점수(깨달음 이후에 수행을 해야 한다)와 돈오돈수(깨달음과 수행은 동시에 이루어진다)에서 정답을 고르는 일은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고민 없이 한쪽에서는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고, 한쪽에서는 행위를 강조한다. '믿음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 예수가 보여주었던 실천은 오간 데 없어지고, '행위주의자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은 사라진다. 둘 다 정직하지 못하다.

<슬럼독 밀리어네어>를 가장 인도적인 영화로 꼽는 이유?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빈민가에서 성장한 자말(jamal)이라는 청년의 이야기다. 2006년, 인도 뭄바이. 빈민가 출신의 고아 자말은 거액의 상금이 걸려 있는 '누가 백만장자가 되고 싶은가'라는 최고 인기 퀴즈쇼에 참가한다. 처음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자말은 예상을 깨고 최종 결선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의 부정행위를 의심한 사회자에 의해 경찰에 끌려가는 일까지 벌어진다. 하지만 자말은 모든 문제를 다 맞히고 그것으로 인해 여자친구인 라티카(Latica)까지 만나게 된다.

평자들은 이 영화를 가장 인도적인 영화라고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인도 뭄바이의 빈민가 출신 청년이 퀴즈를 맞히는 데 대한 공권력의 의심이 오늘날 인도를 보여주는 것이 틀림없다. 마치 한국에서 야간 상고 출신의 박노해 시인에게 시를 대필한 명문대 출신의 원작자의 이름을 대라며 고문했다는 사건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가장 인도적인 것은 수행과 깨달음(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다.

인도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브라만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힌두교와 불교 모두 브라만사상의 변용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브라만사상의 기초 사상을 범아일여라고 표현한다. 우주의 근본진리인 브라만(Brahman)과 자아(Atman)가 같다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자신이 곧 우주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개별적 자아(jivatman)는 초월적 자아(paraatman)를 통해 브라만을 만난다. 각기 다른 개별적 자아가 우주와 같다는 것을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은 초월적 자아의 단계이다. 초월적 자아에서는 개별적 자아가 사라진다. 사람들은 이 개별적 자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수행한다. 인도 사상에서 수행은 철저하게 현실 삶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심지어는 섹스까지도 진지하다면 깨달음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우주의 진리를 간직한 채 행해진다면 개별적 자아는 극복되고 초월적 자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때 나의 행위는 옳고 너의 행위는 틀리다는 차별성은 사라진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하나가 되며, 아는 자와 알게 되는 지식이 하나가 된다. 존재와 지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자말의 삶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그야말로 인도적이다. 자말이 퀴즈에서 맞춘 모든 문제는 그가 겪은 모든 진지한 삶의 현장에서 얻어진 것이다. 자말은 경험하지 않은 문제는 답을 모른다. 문제의 난이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체험이 그에게는 지식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 자말은 자신이 좋아하던 영화배우를 만나기 위해 똥통에 뛰어든다. 그 사건은 자말이 스스로를 희생해서 얻은 최초의 성과물이다.  
 

행위와 구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말의 삶
 
그가 맞춘 첫 문제는 영화배우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의 유명 배우를 좋아하던 자말은 배우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 하필이면 화장실에 갇혀버린다. 이 위기의 순간 그는 스스로 똥통에 뛰어드는 선택을 하며 배우의 친필 사인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사인은 스스로를 희생해서 얻은 최초의 성과물이다.

하지만 자말의 형은 그것을 자본으로 바꾸어버린다. 여기서 두 사람의 인생관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다.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다면 다른 어떤 것은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는 자말과 모든 것을 자본의 교환으로 생각하는 형의 가치관이 영화 내내 긴장의 축이 된다. 

그가 푼 문제 중에는 종교 문제도 있다. 자말의 가족은 이슬람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힌두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로 인도의 무시무시한 '사성제도'를 피해서 개종한 사람들이다. '사성제도'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노예나 다름없는 계층이 타종교로 이탈한 것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다.

이들이 활과 화살로 상징되는 라마신의 이름으로 무슬림에 대한 대낮 테러를 자행해도 공권력은 외면한다. 이 경험 속에서 자말은 왜 라마와 알라가 싸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사건은 그에게 깊이 각인된다. 라마와 알라의 싸움으로 어머니를 잃었지만, 자말은 소중한 여자 친구를 얻게 된다.

앵벌이 생활을 하면서 자말 형제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해나간다. 여자 친구인 라티카와 원치 않는 이별을 하지만 그의 기억 속에는 늘 라티카가 남아 있다. 어느 날 앵벌이 시절 친구인 맹인 소년에게 100달러라는 큰돈을 건네지만 여기에는 내가 그를 위해 적선을 베푼다는 의식이 없다. 돈은 라티카의 소식을 듣는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말이 겪었던 힘겨운 삶의 과정과 여자 친구를 찾는 것은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선행을 해야 하는 인과율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리(여자 친구와의 사랑)를 찾아가는 길에서 자기 삶에 닥친 모든 경우에서 진지했을 뿐이다. 여자 친구를 만나려는 열정은 삶의 추동력일 뿐 실현 가능성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진지함이 곧 지식(앎)이 되었다. 마치 구약 언어에서 안다는 말을 뜻하는 야다(yada)가 육체에 의한 앎을 의미했던 것처럼 자말의 앎은 삶 전체에서 얻어진 것이다. 

 

   
 
  ▲ 영화에서처럼 자말의 수행(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은 지식을 가져다주었고 그 지식은 여자 친구와의 만남이라는 믿음을 완성시켰다.  
 

자말의 '앎'은 삶에 대한 진지함에서

우리는 삶에서 어떤 행위를 하든지 초월적으로 진지해야 한다. 그것에서 당연히 실천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예수의 삶도 나온다. 수행은 바로 이런 것이다. 정답을 맞히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분명히 선한 것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수행이다. 우리는 그 진리가 구원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영화에서처럼 그의 수행(진지하게 살아가는 것)은 지식을 가져다주었고 그 지식은 여자 친구와의 만남이라는 믿음을 완성시켰다.

수행과 믿음의 완성 사이에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신비의 영역이다. 영화 속 퀴즈 사회자가 극적인 순간, 더 솔직히 말하면 빈민가의 무식한 청년이 퀴즈쇼를 농락하는 일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지막 문제의 가짜 답을 슬며시 던진다. 주인공은 이 문제의 답을 모른다. 그 문제의 답을 알 수 있었던 어린 시절 그 순간, 그 기억은 여자 친구 라티카의 인상에 덮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자의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자말은 마지막 문제를 '찍어서' 맞힌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닥치는 신비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비는 수행에서 나온다. 

영화는 시작에서 객관식 문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주인공이 문제를 다 맞힐 수 있었던 이유는? 1번 속임수로, 2번 운이 좋아서, 3번 천재여서, 4번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영화는 마지막에 4번이 정답이라고 일러준다.

1~3번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인생의 방편들이다. 어떤 이는 속임수로 어떤 이는 운이 좋아서, 어떤 이는 자신의 머리로 세상을 헤쳐 나간다. 그에 비해 4번 Written은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섭리 또는 예정이며, 브라만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주와 내가 하나라는 의미에서 나온 사실이다. 하지만 예정이라고 삶에 그냥 묻혀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삶에 진지하게 된다.

'무엇을 하던 그냥 진지하자'

비실천적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기독교계 내에서 오래 전부터 실천의 문제가 제기되어왔다. 그러한 고민 끝에 나온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 모두 호교를 위한 순수한 열정이었음을 우리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개별 행위가 초월과 신비가 생명인 종교적 진리를 보여준다면, 둘 중에 하나는 가짜다. 개별 행위가 아니거나 초월 행위가 아니거나. 논리적으로도 개별자는 초월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개별자가 곧 초월자라는 범아일여사상조차도 둘이 직접 연결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초월적 자아라는 고리를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바울이나 루터의 주장이 아니라, 어떤 종교에서든지 표현만 다를 뿐 그 종교의 축을 이루고 있는 진리다. 믿음은 개별자와 초월자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고리인 것이다.

홈리스 급식의 현장에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기아의 현장에서 행해지는 기독교인들의 수많은 선한 일들을 보며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 행위에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지말자. 개별 행위가 결코 초월과 신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냥 그들은 계몽적 선행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하지 못해 부끄러우면 계몽적 차원의 부끄러움만을 가지자. 부끄러움은 견딜 수 없지만 직접 실천하기도 그렇다면 그 선행에 얼마나 많은 돈과 시간이 들어가고 있는가를 근대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해서 그들을 돕는 것으로 근대인의 사명을 다하자.

다만 근대인을 넘어 초월적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면 행위에 몰입하지 말고 수행하라! 사랑이 되었건, 섹스가 되었건, 나눔이 되었건, 베풂이 되었건, 혁명이 되었건, 공부가 되었건 그냥 그 순간 진지하자. 이 개별적 행위가 어떤 결과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인과적 사고를 하는 순간, 우리의 진지함은 사라지고 진리도 저만치 떠날 것이기에 그냥 진지하자. 

김기대 / 기자회원,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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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9 04:44:49
오늘 방망이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는 군요. 감사합니다.

passra 2009-05-21 13:10:18
새로운 각도로 바라봄에 한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