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놓음'을 내려놓으라
'내려놓음'을 내려놓으라
  • 최태선
  • 승인 2009.05.20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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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를 포기하고 '받아들임'을 배우라

한동안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하버드대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몽골 선교사의 길을 택한 이야기입니다. 끝없는 성공을 향한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더구나 <야베스의 기도>와 <긍정의 힘>과 같은 말씀으로 겉을 도배한 인간 중심의 물질만능주의, 기복주의 사상의 파도가 오랜 기간 동안 거세게 몰아친 터라 <내려놓음>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 몽골 선교사가 쓴 <더 내려놓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선택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선교사의 헌신적인 삶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동으로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서점에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작은 아쉬움이 남았었습니다. 그리고 막연히 무언가 끝나지 않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우려는 현실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나온 것입니다. 책의 제목을 보고 다음 책의 제목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더 더 내려놓음', 혹은 '완전히 다 내려놓음'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제목의 책이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는다 할지라도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받아들임입니다.

"나는 받는 법, 감사하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내와 받아들임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얻어야 할 배움입니다. 사랑을 받고, 보호를 받고, 보살핌을 베푸는 대신 보살핌 받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내가 마음의 주위에 큰 돌담을 쌓아놓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설계한 것이지만, 사랑이 들어오는 것도 막았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인생수업> 중에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 연구에 관한 선구자입니다. 그런 그녀가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런 현상이 나타나면 뇌의 기능 또한 일부가 상실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녀의 경우는 신기하게도 머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 이유를 "삶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합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이 배운 가장 마지막 인생의 교훈이 '받아들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끝까지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극단의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통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려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자신을 포기해버리는 마지막 통제를 선택합니다.

   
 
  ▲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 <인생수업>.  
 
욥의 부인의 말이 바로 그것일 것입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2:9)

자크 엘룰은 그의 책 <하나님이냐 돈이냐>에서 가난의 정의를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의 정의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곳' 그곳에 다다를 때에라야 인간은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을 포기해버리는 마지막 통제를 버리고 받아들임을 선택할 때에라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려놓는다는 말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통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제를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길로 들어서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의 불구자일 뿐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대로 사랑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벽이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을 포기하십시오.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계속해서 내려놓음을 반복하는 존재로 머물게 될 것입니다. '더 내려놓음'이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진정한 사랑의 존재, 진정한 감사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받아들임입니다. 또한 그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모셔 들이는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42:6)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였던 욥, 하나님까지 그렇게 인정하셨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비로소 눈으로 주를 뵈옵게 된 것은 바로 그곳, 통제를 포기하고 받아들임을 배운 그곳이었습니다. 욥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최태선 / 기자회원,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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