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의 시대, 설교자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자살의 시대, 설교자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 김범수
  • 승인 2009.06.01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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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 얽힌 문제 자살로 곪아터진 것… 자살 유발한 근원적 죄 파헤쳐야

기독교인들 의식의 폭이 좁아졌다. 누가 죽었더라 하는 소식을 들으면 자살인지부터 확인한다. 자살이라고 하면 그때부터 대화의 흐름은 뻔한 수순을 넘지 못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살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문제이고, 그러므로 자살한 사람의 결정이 안타까운 일이며, 아이들이 모방할까 두려우므로 자살한 이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이다.

가난한 집안 가장이 궁지에 몰려 가족들과 동반 자살을 해도 같은 반응이다. 목회자들은 우울증에 걸린 연예인이 자살을 해도 비슷한 방향의 설교만 한다. 부당한 공권력에 떠밀려 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역시 교회 안 신앙인들의 담론은 불행히도 겨우 '왜 자살했느냐?'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 자살하면 지옥간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교자의 책임을 다한 것일까.  
 
자살에 반응하는 기독인들의 뻔한 태도

자살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가 사회 중심이었던 로마가 주후 410년 서고트족에게 잠시 함락된 적이 있었다. 그때 기독교인을 포함한 많은 로마 시민들은 이민족의 노예로 잡히고 희롱당하기보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다.

어거스틴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라고 생각했지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살한 사람들을 정죄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로마가 함락됐다는 사실 때문에 기독교 신앙까지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신학적인 대안을 제시하려고 더욱 애썼다. 즉 인간이 세운 로마가 무너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까지 좌절된 것은 아니며 인간이 세운 도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구별된다는 것을 그의 대작 <하나님의 도성>을 통해 밝혔던 것이다.

자살 행렬이 줄을 잇는 요즘 설교자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그러면 문제는 오늘날 교회다.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세계화의 부작용이 심각한 한국 사회는 살림살이와 생각들이 양극화되어 자살 행렬이 더욱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교회의 가르침은 어디로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설교자는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만약 한 달에 한 번 꼴로 유명 인사와 연예인들이 자살한다면, 그때도 한가하게 '자살하면 지옥 간다. 따라하지 마라'는 식으로만 설교할 것인가? '자살하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설교자의 책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성도들이 피부로 느끼고 의문을 갖는 중대한 시사 문제를 설교에서 다루는 것은 설교자로서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그럴 경우에도 경제적인 궁핍으로 자살을 했으면 무엇 때문에 독한 마음을 먹고 목숨을 끊었는지를 다루어야 하지 않겠나? 사채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했다면 악한 사채업자들을 꾸짖는 구약의 많은 본문들을 들어 이 시대의 고리대금업자와 고리대를 권장하는 사회 구조를 질책하는 예언자적인 설교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우울증에 시달린 연예인의 죽음을 놓고는 우리도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현대의 우울증에 대해 교육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부당한 권력에 맞서다 젊은 청년이 분신자살로 생을 마무리 지었다면 그를 막바지까지 몰고 간 권력에 대해 생각하고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섬기는 지도자로 국민을 섬기는 공무원의 바른 자세에 대해 묵상하고 설교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태도일 것이다.

그가 분신하면서까지 외치고자 했던 그 메시지 속에 기독교인들이 들어야 할 것은 없는지 먼저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서도 먼저 검찰 수사에 무리는 없었는지 혹은 새 정부와의 갈등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자살 전후의 인과관계를 살핀 뒤에 그 사태를 유발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것이 설교자의 기본이 아닐까?

자살은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증상

다시 말하면 자살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증상이다. 속에서 얽히고 얽힌 문제들이 곪다 못해 터진 것이 자살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속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터진 고름만 닦아내는 의사를 우리는 '돌팔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상대방 남자는 빼놓고 간음한 여인만 몰아세운 채 '음행'이라는 현상만 가지고 왈가왈부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도록 따끔하게 가르치셨지 않는가.

사람들의 자살 행렬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줄기차게 일어나고 반복될 현상만 다루는 돌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몸속의 병 근원을 살피는 의사처럼 오고가는 세대의 사회와 문화 속에 얽힌 문제들은 물론 자살을 유발한 근원적인 죄를 파헤쳐야 한다. 그래서 불안한 표정으로 갈 길을 묻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넓은 시각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거스틴이 이 시대를 산다면 그는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했을까? 오늘날 설교자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김범수 / 시애틀 드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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