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멈춘 까닭
"바리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다가 멈춘 까닭
  • 김종희
  • 승인 2009.06.03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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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한 긍휼의 크기만큼만 남겨 놓고 분노 덩어리를 잘라내다

5월 어느 날 늦은 오후. 새 한 마리가 얼마나 시끄럽게 울어대던지, 참다 참다 못 참고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보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서 보니 병아리 크기의 작고 노란 새 한 마리가 길가에 서 있는 차 밑에 웅크리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까 입을 쩍쩍 벌리면서 목 깊은 곳에서 소리를 뽑아내는데, 배고프다고 호소하는 것인지 다가오는 사람을 쫓아내려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길 건너편 잔디밭으로 옮겨줄까? 과자라도 던져줄까? 잠깐 망설이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보는 순간 새의 존재를 잊어버리고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유난히 바람이 심하게 불더니 굵은 비가 유리창을 시끄럽게 때려댔다. 두고 온 작은 새가 생각났다. 그 녀석을 옮겨놔야 하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번에는 귀차니즘이 발동했다.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걸어가는 길 곳곳에는 사나운 비바람을 못 견디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널려 있었다. 차 밑에 숨어 있던 작은 새의 안녕이 궁금했다.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곳에는 다른 차가 서 있었고, 작고 노란 새는 쥐포처럼 납작해져서 나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의 흔적만 겨우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은 나무 위에 있던 둥지에서 떨어졌는지 모른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벌벌 떨면서 엄마를 목 놓아 부르느라 그리 시끄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조금 귀찮아도 그 녀석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그 다음 날 늦은 밤. 외출했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오자마자 전화기가 울었다. 한국에서 온 전화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살했단다. 급하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우리 식구가 시내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바로 그 시간에 노 대통령은 봉하 마을 부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밖에 더 실감나는 표현을 찾을 길이 없었다. 뭔가 다른 소식들이 있을까 싶어서 깊은 새벽까지 인터넷을 뒤지다가 잠을 설쳤다.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깨워대는 새들의 활기찬 소리가 오늘 아침에는 "이 난리 통에 잠이 오냐"고 꾸짖는 호통 소리로 들렸다. 눈을 뜨자마자 차바퀴에 납작하게 깔려 죽은 새가 떠올랐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애도하고 있을 때, 나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살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애도하고 있을 때, 나는 작은 새 한 마리를 살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장례식 즈음.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서, 특히 '자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늘어놓는 목사들의 입놀림을 보다 못해, "바리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법 길게 썼다. 복음서 읽기에 빠져 있는 요즘, 예수를 죽이는 데 공모한 바리새인들과 노무현의 죽음을 비웃는 목사들의 모습은 한 치도 어긋나지 않고 똑같아 보였다. 죽은 약자는 그토록 희롱하면서 죽인 강자에게는 찍소리도 못하는 비겁함, 사람 사랑하는 것보다 율법 준수하는 것을 더 고귀하게 생각하는 패륜함, 자신들이 얼마나 거룩한 존재인지를 어떤 식으로든 드러내지 않으면 하루도 견뎌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천박함, 한국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사악함을 고발하고 싶었다. 그들에 대한 분노를 담은 글을 길게 썼다.

하지만 몇 날이 걸려도 마무리할 수가 없었다. 컴퓨터 자판에서는 작고 노란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화면에서는 쥐포가 된 새끼 새가 어른거렸다.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면서도, 한편 미물의 절규에 눈 감고 귀 막고 뒤돌아선 모순된 내 모습 사이에서 헤맸다. 며칠을 끙끙거리면서 글을 다듬고 고치기를 반복했으나, 결국 그 긴 편지를 뭉텅 들어냈다.

마태복음 5장에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 의가 바리새인보다 낫지 않으면 천국은 고사하고 저들이 갈 뜨거운 동네로 끌려갈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 동네에서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늘 만나는 저 바리새인들을 거기서라도 안 만나려면, 하찮아 보이는 미물에게라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함께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파하는 예수의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더 시급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분을 거두어 삼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예수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었다. 하지만 뜨거운 분노의 불길을 쉬지 않고 내뿜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서 정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예수가 그러했던 것처럼, 악한 자들에게 발하는 분노의 양과 질만큼 약한 자들에게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그래야만 천국 문을 노크라도 해볼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어 있는 알량한 긍휼의 크기만큼만 남겨 놓고, 분노 덩어리의 글들은 모조리 잘라내려고 나름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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