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대로 살아보겠다고? 또라이 아냐!
성경대로 살아보겠다고? 또라이 아냐!
  • 김종희
  • 승인 2009.01.16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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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경대로 살아본 1년]…'무늬만 종교인'의 좌충우돌 종교 체험

경북대 법학과 김두식 교수가 <평화의 얼굴>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평화 이야기는 더 추상적이고 고상할수록 더 안전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실천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입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사회 운동가였던 헬더 까마라 주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가난하냐?'고 물으면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도 있다. "남들과 대화할 때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거나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불립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실천하면 또라이 취급 받습니다." 이건 누구 말이냐. 내 말이다.

생뚱한 소리는 아니다. 미국의 대형 책방 Barnes and Noble에서 본 <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 >(우리말로는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으로 번역됐다)가 유머 코너에 꽂혀 있기에 하는 말이다.

▲ A. J. 제이콥스의 종교 체험기인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 The Year of Living Biblically)은 미국의 대형 책방 '반스앤노블'의 유머 코너에 꽂혀 있었다.
저자가 글을 워낙 유머러스하게 쓴 탓도 있지만, 성경에 나오는 내용을 글자 그대로 똑같이 실천에 옮겨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웃기는 일이기에 종교 코너가 아니라 유머 코너에 배치됐을 게다. 오늘날 성경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책 제목처럼 '미친 척'하지 않으면 실천하기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유머 코너에서 한 번 더 깨달았다.

이 책은 재미있다.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경건함과 엄숙함과 진지함이 문장마다 아로새겨 있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에스콰이어>라는 남성 패션 잡지의 편집자인 저자에게 경건, 엄숙, 진지 같은 말들은 애당초 거리가 먼 단어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글맵시를 죽이는 일이다.

수염을 길게 기르고, 구약성경 시대 목자들의 복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한 손에는 십계명 돌판(번역서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과 다른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를 든 채(번역서에는 양 한 마리를 이끌고) 맨해튼 일대를 싸돌아다니는 저자의 모습을 담은 책 표지부터 재미있고, 본문 곳곳에서 톡톡 튀어나오는 기발한 장면들과 산뜻한 표현들도 재미있다.

성경 완독, 100여 권 도서 참고, 자문위원 구성 등 치밀한 준비

글맛도 글맛이지만 사뭇 진지한 내용이 돋보인다. 재미있다고 해서 새털처럼 가볍기만 하면 쓸모가 별로 없다. 제이콥스는 '무늬만' 유대인일 뿐 사실은 불가지론자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성경대로 실천하는 생활을 무척이나 진지하고 성실하게 진행했다.

준비 단계부터 그랬다. 그는 16권의 영어 성경을 구입해서 한 달 동안 하루 5시간씩 집중적으로 읽었다. 앞으로 실천해야 할 계율, 지침, 조언, 금언 들을 일일이 찾아서 컴퓨터에 입력했다. 그렇게 정리한 실천 목록은 700개가 넘었다.

원칙이 하나 있었다. 성경 구절을 임의로 취사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하는 미국의 기독교인들 태반이 자기가 내세우는 명분에 맞는 성경 말씀만 골라내서 지키고 있었다. 보수든 진보든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걸 통해 위대한 것, 영원한 것을 발견해보고 싶었다. 구약성경에만 치우치지 않으려 했던 것도 그래서다.

그는 또 성경의 진의(眞意)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100권이 넘는 참고 도서를 읽었다. 무신론 주창자인 리처드 도킨슨, 기존의 성경 해석을 전면으로 뒤집은 존 셸비 스퐁,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대표적인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 이밖에 폴 틸리히, 짐 월리스 등의 책들을 두루 섭렵했다. 다양한 신학적 성향을 가진 영적 자문위원단까지 구성해서, 혼자 힘으로 풀기 어려운 암초를 만날 때마다 도움을 구했다.

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드디어 순례의 길을 떠난다.

생리하는 아내는 불결한 여자

첫날부터 일이 어이없이 꼬였다.

영적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라"는 레위기 19장 이야기 앞에서 멈췄다. 이걸 지키려면 폴리에스테르와 면 혼방 티셔츠부터 벗어야 했다. 그는 혼방 섬유 감별사까지 불러서 자기 옷가지들을 샅샅이 조사하게 했다. 감별사는 제이콥스가 봉급의 3분의 1이나 들여서 산 비싼 단벌 양복의 여기저기를 포크 비슷한 도구로 마구 쑤셔댔다. 그러더니 목깃 안쪽에 댄 흰 천을 의심했다. 혼방인지 아닌지 조사하려면 그걸 연구소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시트콤 수준의 이런 장면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아내 줄리가 생리를 시작하자 다른 성경 구절이 그를 괴롭혔다. 창세기 말씀을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 한동안 땀 흘리며 열심히 해왔던 성적(性的) 노동을 잠시 중단해야 했다. 게다가 일주일 동안은 '불결한' 아내를 만지기는커녕 가까이해서도 안 된다.

제이콥스는 줄리가 한번 앉았던 의자에는 절대 앉지 않았고, 집 열쇠를 건넬 때도 30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녀의 손 위에 떨어뜨렸다. 아내는 문둥병 환자(요즘에는 '나병'이라고 순화했다)가 된 듯한 불쾌감에 휘감겼다.

자녀 교육도 꼬였다. 구약성경 잠언에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는 말이 있다. 또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면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말도 있다. 자녀를 두들겨 패서라도 똑바로 키우라는 얘기가 여러 군데에서 튀어나왔다.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미국의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지금도 막대기나 채찍으로 자녀를 때려서 키우는 것을 성경적인 훈육법이라고 믿고 있다.

고심에 고민을 거듭한 저자는 결국 스티로폼으로 된 장난감 방망이를 샀다. 아이의 장난이 극에 달하자 방망이로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 한 번도 아이를 체벌한 적이 없었는데, 성경 구절 앞에서 지금까지의 원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몰려왔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근데 아이가 동요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나서 장난감 방망이로 아빠의 엉덩이를 마구 때리면서 웃어젖혔다. 저자의 체벌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성경의 역사가 길다보니 별의별 희귀한 얘기가 다 나온다. 그걸 글자 그대로 지키면서 살려니까 온갖 해괴망측한 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이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주는 일들도 적지 않았다.

▲ 저자는 수염을 길게 기르고, 구약성경 시대 목자들의 복장을 하고, 샌들을 신고, 한 손에는 십계명 돌판과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맨해튼 일대를 싸돌아다녔다.
가난한 사람 위해 수입의 10% 기부

제이콥스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건 남편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편보다 남 돕는 손이 큰 아내도 수입의 10%나 기부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둘은 꼼수를 생각해내기 시작했다. "저작권 대행사에 지불하는 중개 수수료를 십일조로 간주할까?" "세금을 제하고 난 수입의 10%로 해도 되겠지?" 양심이 찔렸다. 이런 식으로 따지는 건 아무래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

제이콥스는 몇 군데 구호 단체를 골라서 그곳에 수입의 2%를 기부했다. 감사 메일을 받고 보니 기분이 흐뭇해졌다.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않지만, 돈을 기부하면서 하나님의 기쁨을 느낀 것 같았다. 평생 했어야 할 일을 이제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기쁨에는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 아직 8%를 더 기부해야 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되는 날 쉬었다. 이에 맞춰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곱 번째 되는 해를 '안식년'으로 지키도록 했다. 이 해에는 농사를 짓지 않아 땅도 쉬어야 했고, 이웃이 진 빚을 청산해주어야 했다.

특히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난 그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禧年)'이라고 불렀다. 우리말로 하자면 '기쁨의 해'이다. 희년에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해야 했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했다. 농사를 지어서도 안 되었다. 무엇을 사고 팔 때 이웃을 억울하게 해서도 안 되었다. 세나 이자도 금지되었다. 빚도 조건 없이 탕감해주어야 했다. 식객과 종으로 타향으로 팔려나간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제이콥스는 '대희년(大禧年) 유에스에이 네트워크'라는 단체에 자원봉사자로 들어갔다. 선진국들이 제3세계의 채무를 탕감해주라고 촉구하는 엽서를 국회의원과 정부 각료들에게 보내는 일을 도왔다. 그 일로 모처럼 줄리의 칭찬도 받았다.

제이콥스가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상징 제리 폴웰 목사의 교회를 방문했을 때다(당시 그는 살아 있었다). 마침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일이었다. 제리 폴웰은 교회 창립 50년과 성경의 대희년을 접목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린치버그에 있는 20만의 다른 영혼들을 누르고 승리하라고 설교했다. 제이콥스가 보기에 교회 확장과 대희년을 연결하는 제리 폴웰 목사의 설교는 성경의 진의(眞意)에 안 맞았다.

극과 극에 있는 근본주의자들과의 만남

팻 로버트슨이나 제리 폴웰 같은 근본주의, 문자주의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이스라엘 현지를 방문한 제이콥스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 주장의 배경이 되는 요한계시록 내용에 대해 자문위원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어느 목사가 이렇게 말했다. "그런 태도(문자주의)는 <이솝우화>가 문자 그대로 다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저자는 같은 근본주의면서도 제리 폴웰과 정반대 위치에 있는 곳도 방문했다.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에 가면 아미시 공동체가 있다.

아미시 공동체를 몇 문장으로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아미시는 국가 교회 체제에서 이뤄진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아 '재세례파'라고도 불리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1700년대 중반 유럽에서 미국의 이곳으로 넘어와서 공동체를 이뤘다. 이후 미국 곳곳으로 퍼져나가서, 지금은 20개가 넘는 주에 20만 명 이상의 아미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어느 기독교 종파보다 예수의 산상수훈을 철저하게 실천하며 산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전쟁은 물론이고 군 입대를 거부해 많은 젊은이들이 감옥에 가기도 했다. 몇 해 전 아미시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정신질환자가 총을 난사해 아이들을 죽였을 때, 부모들이 범인을 용서하고 범인의 장례식에서 죽음을 애도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던 곳이다.

제이콥스는 공동체 아이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면을 보고 쓴 글이다.

"아이들의 실력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후에야 이상한 부분을 깨달았다. 내가 이제껏 본 야구 시합 중에 가장 조용했다. 야유하는 소리도 없고, 관중석에서 목이 터져라 자기 아이를 응원하는 부모도 없었다. 가끔씩 방망이가 공을 때리는 소리만 들릴 뿐 거의 침묵에 가까웠다. 참으로 요상하고……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둘 다 성경대로 실천한다는 점에서 둘째 하라면 입에 거품 물 사람들인데, 한쪽은 살인과 전쟁을 부추기고, 다른 한쪽은 용서와 평화가 충만하다.

양 극단뿐 아니라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들도 만났다. 저자는 토니 캠폴로나 짐 월리스 같은 이들을 통해서 "복음의 내용을 너무 많이 해석해서, 예수가 전하려 했던 진의(眞意)보다 그 해석을 믿기 시작한 데서 종교적인 문제들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다. 대형 교회 목사들의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교리가 '이단적'이라는 것, 예수의 절대적 관심은 동성 간의 결혼 문제가 아니라, 장벽을 허물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포용하는 데 있다는 걸 알았다.

예상치 못했던 1년 뒤의 변화들

때로는 이렇게 해야 맞는 것 같고 때로는 저렇게 해야 옳은 것 같은 피곤한 씨름을 1년 동안 한 결론은 무엇일까.

제이콥스는 따뜻한 감성보다는 차가운 이성이 훨씬 더 반들거리는 40대의 전형적인 뉴요커다. 그런데 1년간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다음에는 우주가 더 이상 무의미한 물리학적 입자들로만 보이지 않았다. 항상은 아니지만, 어느 때는 이 세상에 신성한 빛이 가득 드리워져 있는 느낌을 받았다. 우주가 한결 부드러워지고 풍성해지고 덜 사악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일에서도 경이로움을 느끼고, 일상생활에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행동에서도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신호등의 색깔과 보행자의 행동과 전혀 무관한 맨해튼 거리에서 차도를 건널 때 꿋꿋이 신호등을 지킨다. 거짓말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수입의 십일조를 아시아 지역의 고아들을 위한 자선 단체에 기부한다.

가장 큰 변화는 '감사'다. 전에는 특별히 감사할 일에만 감사했는데, 지금은 모든 일상에 감사한다. 세상의 모든 소소한 기쁨, 모든 음식, 눈떠 있는 모든 시간, 물을 마시는 모든 시간,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그 기적과도 같은 사실을 감사한다. 감사의 대상이 지금 기독교에서 믿는 바로 그 하나님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제이콥스가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꼽은 700개의 종교적 규율이 그를 변화시킨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이 뒤집힌 것도 아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은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평화와 나눔과 감사와 기쁨을 알았다. 그리고 개인주의로 찌들었던 자신의 삶이 공동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1년 동안 또라이 짓을 한 대가가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장사 아닌가? 책도 제법 팔렸으니 금상첨화다.

▲ 저자는 1년 동안 종교 체험을 하면서 겉만 바뀐 것이 아니라 속도 바뀌었다. 온기 없이 쌀쌀맞던 40대 뉴요커가 1년 사이에 자기 수입의 10%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고, 거짓말을 안 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예수의 '피'만 빨아먹는 '뱀파이어 기독교인'

오늘날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인의 비난과 원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지구촌에서 박멸되어야 할 악성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뿌리를 캐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처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예수'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다면야 눈 질끈 감고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성경대로 실천하다가 욕을 먹으면 하늘의 상이라도 받는다. 사실은 일반인들한테 존경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하라는 걸 안 해서 생기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다. 그것도 기독교의 아주 핵심적인 부분은 모조리 거세되어 있다.

달라스 윌라드 목사는 <잊혀진 제자도>에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의 피에만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교회가 넘쳐난다. 나는 그들을 '뱀파이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실천은 온데간데없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노래하는 기독교인들을 '흡혈귀'라고 한 것이다.

달라스 윌라드가 몰라도 뭘 한참 모른다.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 만발인 영화 <트와일라이트>(Twilight)에 나오는 뱀파이어는 섹시하고 멋있는데. 예수 믿는 뱀파이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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