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카르텔에 돌을 던져라'
'침묵의 카르텔에 돌을 던져라'
  • 우종학
  • 승인 2009.06.26 13: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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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들이여 묻고 도전하라'

제이슨 (가명)은 한 학기 내내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았다. 시위라도 하듯 그는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커다란 문구가 적힌 똑같은 티셔츠를 입고 매번 강의실 맨 앞자리를 차지했다. 학생이 자동 소총을 들고 들어와 교수와 동료 학생들을 집단으로 죽이는 일도 일어나는 나라에서, 작은 체구의 한 여교수가 험상궂은 제이슨의 행동을 통해 받았을 테러의 위협은 쉽게 상상해 볼 만하다. 그런 일이 시작된 것은 국가와 종교의 분리라는 민감한 이슈에 대해 신랄한 논쟁이 있었던 뒤 부터였다. 기독교인인 제이슨은 자신의 불만을 그렇게 섬뜩하게 표현했고, 한 학기를 시달린 스테파니아 교수에게 크리스천이라는 존재는 무섭고 광적인 사람들로 낙인 찍혔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얼굴

분노는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어느 사적인 저녁 식사 자리에서 스테파니아 교수는 나에게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아는 그녀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광적인 신앙(그러니까 제이슨이 믿는 그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물고 늘어졌다. 그녀에게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그녀의 거친 공격적 태도에 사뭇 놀랐다. 그녀에게서 감지되었던 것은 이성적 궁금함이 아니라 분노였다. 기독교인들에 대한 모종의 분노. 제이슨 사건을 들은 뒤에 비로소 그녀의 분노가 이해되었다. 

수많은 안티크리스천 사이트들이 판을 친다. 거기 올라온 글들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그 글들에 묻어나는 수많은 분노를 보았을 것이다. '개독교'라는 말로 대표되는 기독교인들을 향한 분노. 그러나 그 수많은 분노들이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들을 안티크리스천으로 만든, 제이슨 같은 기독교인들이 뿜어내었던 분노, 그리고 예수라는 신적 존재를 뒤에 업은 기독교인들에게 공공연히 묻어나는 무례함 때문이다. 무례한 기독교, 화내는 기독교, 그리고 그에 분노하는 안티기독교. 이것이 21세기 한국 사회 그리고 미국 사회가 처한 상황이 아닐까.  

   
 
  ▲ 하나님이 주신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류가 새롭게 배운 사실들로 성경을 재조명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요구되는 때에 오히려 마치 그런 사실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침묵하는 카르텔은 훨씬 기독교를 위태롭게 한다.  
 
침묵의 카르텔

작년 어느 변호사가 삼성이라는 대기업의 체계적인 로비와 비자금에 대해 폭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던 얘기라고 하지만 나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이 문제가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무척 당황했다. 그것은 바로 알고도 말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문득 사람들이 기독교를 마치 삼성처럼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아무도 굳이 말하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 그래서 세계적 기업이라는 네임 밸류(name value)를 유지하는 삼성처럼, 속은 썩어있고 의문의 여지가 많지만 그저 외양만 거룩하게 황홀하게 치장되어 있는 기독교. 기독교의 주장이 그 깊이가 얕고 말도 되지 않는 내용들이지만 다들 침묵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지? 가인은 누구와 결혼을 했는지?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에는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지? 정말로 진화과학이 틀린 것인지?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은 금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만연한 엉성한 기독교를 유지하는 길은 바로 이성적 사고를 억압하고 입 다물게 하는 침묵의 카르텔. 그래서 그 카르텔을 깨는 듯한 도전이 있을 때 기독교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입을 연 자들을 쓸어버리려 한다. 심지어 그것이 <다빈치 코드>와 같은 하찮은 소설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기독교가 집단 사기극이라는 안티기독교의 주장에 대해 반박할 쉽고 좋은 답을 알지 못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그 근간이 되는 기독교가 집단 사기극이 아닌 것은 분명하나 기독교가 집단 사기극처럼 보이는 현상, 침묵의 카르텔로 빚어지는 그 현상 자체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라는 말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색깔. 지성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일관된 교회들의 태도는 침묵하지 않을 때 충분히 더 건강할 수 있는 기독교를 너무나 허약하게 변질시켰다.

금단의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들은 허용되지 않는다. 당연히 던져야 할 질문들이 던져지면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며 도매급으로 싸구려 취급을 당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성이라는 칼을 받으면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나약한 '믿음'의 종교로 타락했다. 창조 기사라든가 노아의 홍수 등 구약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마치 기독교가 해온 지금까지의 주장이 하나라도 무너지면 기독교 전체가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에 막강한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된다.

그것은 과학과 관련된 영역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지구가 움직일 수 없다고 믿었던 고대 기독교의 믿음 하나가 깨졌다고 기독교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아니, 그렇게 무너질 기독교라면 아예 빨리 무너져버리는 것이 낫다. 과학을 두려워하는 기독교. 하나님이 주신 과학이라는 방법을 통해 인류가 새롭게 배운 사실들로 성경을 재조명하고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것이 요구되는 때에 오히려 마치 그런 사실들이 전혀 없는 것처럼 침묵하는 카르텔은 훨씬 기독교를 위태롭게 한다. 그래서 안티기독인들의 비웃음에는 일리가 있다.

아마추어 기독교

침묵의 카르텔은 기독교의 깊이를 아마추어 수준으로 전락시켰다. 이성적 사고와 다양한 질문들에 훈련되지 않은 소위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들은 대학 교육 정도의 이성적 논리에 여지없이 무너진다. 물론 신앙은 결국 이성을 넘어서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전히 설득력을 쥐고 있긴 하지만 기독교는 성인 수준의 대화가 불가능한 유아적 기독교, 아마추어 기독교로 전락해버렸다.

전도를 해보라. 원래 종교성이 강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교회에 와보기도 하고 찬양이나 예배를 통해 감명을 받기도 한다. 태생적으로 참을성이 강한 사람들은 그나마 교회에 적응하고 장기간 출석한다. 물론 그러다보면 복음의 핵심을 배우게 되고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종교성이 강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설교나 메시지는 참으로 가소로울 수 있다. 현대 과학의 결과들을 의미 있게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주장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 기독교인들끼리는 수준 높은 책을 읽고 성경을 깊이 분석하며 리더십을 얘기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교회 밖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할 성숙한 틀은 부재하다. 그것은 우리가 연마하는 기독교의 깊이가 너무나 아마추어적이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
 
이런 맥락에서 보면 리차드 도킨스가 그런 책들을 쓰는 것도 이해가 된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도킨스는 무신론을 설파하는 당대의 최고의 전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과학의 이해'와 같은 과목을 가르치는 도킨스는 현대 생물학의 결과들을 대중이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뛰어난 글쓰기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이기적 유전자>나 <눈먼 시계공>과 같은 책을 통해서 그는 진화 생물학이 밝힌 최근의 내용들을 싸들고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물론 그는 창조과학을 반대하는 무신론 과학자로서도 유명하다. 특히 <눈먼 시계공>과 같은 책은 어째서 창조과학자나 지적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계는 설계된 것이 아닌지를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전개해 간다. 

   
 
  ▲ 내가 보기에 <만들어진 신>은 기독교 진리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실망스런 주장들이었지만, 그가 옳게 공격하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 위에 군림하는 기독교의 허상들에는 치명타를 가할 듯했다.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도킨스는 작년에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무신론의 결정판이라는 식으로 매체의 주목을 받았다. 번역서의 제목은 점잖은 편인데, 원제목은 <The God Delusion>으로 <신이라는 망상>쯤 되겠다. 나는 이 책을 지난 6월에 접했다. 잔뜩 기대를 갖고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결과는 대실망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눈먼 시계공>의 저자가 아니었다. 중간 중간에 여러 번 책을 집어던졌다.

이 책에 대한 구체적 소개와 비판은 차후로 미루겠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그는 학자로서의 선을 넘어 아마추어리즘으로 추락했다. 과학적 증거에 기반을 둔 논리적 접근은 부재했고 추론과 해석에 기반을 둔 주장들이 이어졌다. 마치 과학적 논리가 빈약한 창조과학자들의 책을 보는 듯했다. 어느 노벨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가 국방 예산 편성에 대해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의견을 그의 핵물리학 논문만큼 높이 평가할 필요는 없는 것처럼 그의 주장도 그의 전문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아, 도킨스여!

안타깝게도 그의 책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 기독교의 허상, 침묵의 카르텔로 혼탁해져 있는 기독교상을 공격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만들어진 신>은 기독교 진리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실망스런 주장들이었지만, 그가 옳게 공격하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 위에 군림하는 기독교의 허상들에는 치명타를 가할 듯했다.

그러니까 금단의 영역을 긋고 이성적 사고와 회의를 금기시한 허약한 기독교에는 도전이 될 것이다. 물론 그 도전들은 새롭지도 날카롭지도 않지만. 그는 외친다. 진정한 지성인들이여, 말도 안 되는 기독교의 거짓 속에 남아있지 말고, 나는 더 이상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고 커밍아웃하라고.   

도킨스의 이 책에도 분노가 묻어난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글의 톤이 상당히 공격적이고 신랄하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학자의 글이 이렇게 교조적이고 선동적일 수 있을까? 도킨스에 대한 비판을 내놓은 영국의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당신의 책에는 분노가 묻어난다며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대한 도킨스의 대답은 이런 맥락이었다. 아직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부모들이 종교를 주입시켜서 자살 폭탄 테러를 하게끔 하는 종교에 대해서 화가 난다고. 그는 이슬람을 꼬집어 답했지만 그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것은 <만들어진 신>에서처럼 기독교였으리라.

너도 나도 돌을 던져라

크리스천들이여 묻고 도전하라. 기독교가 참 진리라면 무엇이 두려운가? 가인이 누구와 결혼했는지를 묻다보면 불신앙에 빠질 듯한가? 성경통독상도 주고 심지어 성경 전체를 필사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가인이 누구와 결혼했는지 묻는 사람은 보지 못했고 그 질문에 시원하게 답하는 목사님도 보지 못했다(다행히 이런 사람들도 있다고는 한다).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삶으로 보여준 기독교의 신앙은 결코 이런 질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물어라 그리고 답을 찾아라. 그래서 건강해져라.

이왕 믿을 것 아마추어로 남지 말고 프로가 되라. 안티크리스천의 질문에 하나도 답하지 못하면서 그저 믿으라고 반복하는 얄팍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신랄한 이성적 공격에도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지킬 수 있는 고수가 되라. 도킨스의 칼도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어야 한다. 한국 기독교가 르네상스를 맛볼 수 있도록 토론하고 질문하고 공부해야 한다. 목사님들께 묻자. 그들도 공부하도록. 서로에게 묻자.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되도록, 토론하는 문화가 생기도록. 가르치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긁어 부스럼이라며 피하다간 암을 키우게 된다. 너도 나도 돌을 들어라. 침묵의 카르텔에 돌을 던져라.

우종학 / 천문학 박사, UCLA 연구원

LA 기독교연구실천아카데미 운영위원인 우종학 박사는 예일대학교에서 천체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산타바바라 소재 캘리포니아대학교(UCSB)에서 연구원으로, 현재는 나사(NASA)에서 수여하는 '허블 펠로우십'을 받고, UCLA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으며, 올해 9월에는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부임할 예정이다.
 
* 이 글은 <복음과상황> 2008년 2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내용 중 일부를 상황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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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마을 2009-06-28 11:42:09
침묵의 카르텔은 곧 "지성의 마비" 현상을 지적하신 거겠지요? 한국 교회, 특히 보수 교회에서는 지적 귀차니즘이 더 번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성의 마비와 더불어 교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은 땅의 것을 더 갖고 더 누리려 하는 탐욕이 아닌가 합니다. 지성에게 입 다물 것을 명령하는 실세가 사실 이 탐욕이고 보면 결국 재물의 우상을 섬기다가 그 우상처럼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따라서 생각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린 게 한국교회인 것 같습니다. 그 나무 우상을 깨뜨리자면 돌을 여간 세게 던져서는 안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