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지식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병구에게
진보 지식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병구에게
  • 김기현
  • 승인 2009.06.29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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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을 보고 … 김규항식 마가복음 읽기의 성과와 한계

병구야, 너를 '병구야'라고 부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니? 처음 한두 번은 병구 형제라고 호칭하다가 슬그머니 '병구야'라고 불렀던 것을 알고 있지? 안철수 교수(한국과학기술원)가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그러더구나. 회사 대표로 있던 시절, 자신은 직원들에게 모두 존댓말을 했다고. 실은 웬만한 목사들은 교인들을 그렇게 호명하지 않는단다. ‘병구 성도님’ 또는 ‘병구 형제님’이라고 하지. 그런데도 나는 지금도 너를 ‘병구야’라고 했고, 게다가 ‘너’라고 하고 있지. 무례일는지 모르겠구나.

김규항 씨는 예수를 '무턱대고 반말하는 사내'로 그리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고양시키려는 숨은 교리적 의도의 발로라고 여기는 것 같더구나. 예수 당시의 언어에는 존대어와 반말이 없었는데, 이 땅에는 있으니 예수는 위아래 구분 없이 반말을 하고, 로마 총독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에게 존대어를 구사하는 것은 왜곡이라는 거지. 예수가 그리 막돼먹은 청년이 아니었을 게야. 어쩌면 한국 교회의 언어가 거친 막말을 하는 것도 어쩌면 그런 번역이 초래한 왜곡의 한 현상일지 모르겠다.

   
 
  ▲ 당대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김규항 씨가 쓴 <예수전>.  
 
고백하자면, 나는 예수가 반말을 한다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탓에 조금은 당황했단다. 그냥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고 믿어왔단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으레 그러려니 했었지. 이렇게 말하면 김규항 씨는 '그것 봐요, 당신은 교리적 시선에 함몰되어서 그런 기초적인 상식도 헤아리지 못하는 거요'라고 대꾸하려나? 그럴 것이다. 좀 더 생각해볼 일이다. 흔쾌히 동의되는 것도 아니지만, 딱히 '아니올시다'라고 대꾸하고 싶지도 않구나. 그냥 흔들리는 데로 내 자신을 내버려두련다.

교회 내에서 교우를 부를 때 존칭을 사용하지 않고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는 드물고, 교회 밖에서는 교회가 막말과 반말을 한다고 나무라는데, 나는 어쩌자고 너를 그냥 ‘병구야’라고 부르는 걸까. 내가 목사라는 권위 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도, 내가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기 때문도 아니다. 형제님, 자매님, 성도님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공식적인지라 그렇게 부르면 사람 사이가 뭐랄까 사무적이랄까, 좀 멀게 느껴져서 공적 예배가 아니라면 대개 이름을 부르곤 한단다. 하여, 내가 너를 하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의 표시 정도로 받아들여주렴.

병구야, 이 책의 의의는 개독교라 불리는 종교의 경전을 우리 당대의 지식인(물론 그는 자신을 낮추어 B급이라고 한다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B급이라면 A급은 누구이며, 감히 C급이라도 될 만한 이들이 얼마이겠느냐)이 교회 비판과 갱신을 위한 텍스트로 제한하지 않고, 진보의 거처를 묻고, 시대를 변혁하는 텍스트로 다루고 있다는 점일 게다. 존 스토트가 1960년대의 반문화 세대들은 예수는 OK, 그러나 교회는 NO라고 했지만, 이 땅에서는 노장을 가리지 않고 남녀 구분 없이 기독교를 씹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때에 가당찮게도 마가복음 독서가 어찌 반갑지 않으랴.

기왕에 말인 나온 김에 우리 지성 사회에서 기독교는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고 할 수 있단다. 아직 기독교 내부에서 깊이 있는 성찰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해야 정확하다. 개신교가 전래된 이래로 많이 발전했지만, 여태껏 일구어낸 성취는 보잘 것 없단다. 아직도 낯설지. 그걸 기독교 내부에서 유통되는 책을 보면 알 수 있지. 외국, 특히 미국에서 히트를 하거나 공인된 작가의 책을 멋있게 번역해서 멋지게 포장해서 파는 수준에 머물고 있어. 개신교 내부에서는 작가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는 이도 드물거니와 그럴 만한 수준도 찾기 드물단다.

도올 김용옥이 논어와 도덕경, 그리고 요한복음을 세계 3대 고전이라며 요한복음 강해를 시도했지만, 그의 명성과 의욕에 비하면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논어나 도덕경을 읽을 때의 도올이 아니더구나. 그래도 고마운 것은 성서라는 텍스트가 우리 당대 최고의 지식 엔터테이너요 유통자인 도올이 무릇 지식인이라면 성서 정도(?)는 나름 읽어두어야 한다는 훈수와 암시를 준 것이란다.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요한복음 읽기에 관한 한, 실패에 가까운 것에 비하면, 김규항 씨의 마가복음 읽기는 문장이 단아하고, 깊이와 힘이 느껴지더구나. 고마울 따름이고, 배울 따름이다.

신학자들도 김규항 씨에게 한 수 배워야 하겠구나. 기존의 마가복음 해설서를 살펴보면, 텍스트 내부의 풍경에 사로잡혀 텍스트의 안과 밖을 동시에 고려하지 못하고 있지. 능력의 부족인지, 관심의 부재인지는 모르겠다. 둘 중 하나이거나, 둘 다이거나, 둘 사이 어디쯤이겠지. 반면, 김규항 씨는 마가복음의 예수를 통해 예수가 싸웠던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과 관련 속에서 읽어내는 데 얼마간 성공적이더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예수가 죽어야 할, 죽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실감나게 풀어내더구나.

신학이 과연 학문 또는 과학인가 여부를 두고 간단치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고, 나는 당대의 주류 학문의 질서와 가치에 동화되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이다만, 그럼에도 성서와 신학의 깊이와 넓이, 높이마저 희생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나도 분발해야겠다. 무지와 게으름을 신앙의 특수성을 빌미로 꽁무니를 뺄 수는 없지 않겠니? 복음과 계시를 지성화하는 것은 끝내 거부해야 마땅하지만, 지성마저 부정하는 것은 복음과 계시에 대한 오해요 왜곡이거든. 갓 교회 나온 너에게, 책을 좋아하는 너에게 성서와 함께 독서를 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란다. 함께 열심히 읽도록 하자꾸나.

병구야, 이 책이 김용옥의 시도와 성과를 한 단계 도약시켰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지만, 아쉬운 구석도 있더구나. 두 가지만 짚어볼까 한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아들이 되었느냐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 대한 마가의 시선과 김규항 씨의 시각의 차이란다. 내가 보기에 이 둘은 하나다. 텍스트에 대한 오해이거나 아니면 아예 눈을 감았거나. 교리와 교조를 벗어던지는 것에 너무 골몰하다보니 마가복음이 말하는 바를 가두고 있다.

전자를 먼저 보도록 하자. 김규항 씨는 연신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었는데 마가복음이 기록된 정황과 역사를 거듭하면서 점차 신의 아들로 신격화되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궁금하더구나.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까? 마가복음 어디에 그런 말이 있지? 마가복음을 한껏 추켜세우다가도 이런 부분만 나오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후대의 역사적 산물이고 교리적 필요이고, 상상력의 소치라고 축소하지. 오히려 그것이 그의 편견이 아닐까?

   
 
  ▲ 김규항 씨는 홍세화 기획위원(<한겨레신문>)·진중권 교수(중앙대) 등과 진보적 사회 평론지인 <아웃사이더>를 펴내고, <한겨레신문>·<씨네 21>·<오마이뉴스> 등에서 논객으로 활동하다, 현재는 대안적 어린이 교양 잡지인 <고래가 그랬어>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마가복음을 펼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구절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은 복음, 곧 기쁜 소식에 관한 것이고, 기쁜 소식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거다. 그게 마가복음의 요지이고, 기록 목적이다. 그래서 마가는 의미심장한 곳곳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심어 두었지.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1장의 서언과 예수가 침례를 받던 때, 그리고 전체의 절반이 되는 8장의 베드로 고백과 9장, 변화산 위에서 들려진 하늘의 음성, 그리고 마지막 부분인 15장의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마가복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아니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는가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마가복음을 읽는 이들은 마가가 예수를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애써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여 피하거나 빠져나가려 해서는 안 된다. 마가복음은 그렇게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지. 그런데도 김규항 씨는 마가복음을 읽으면서도 마가의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 예수는 참 인간이라는 그의 교리를 붙잡고 시종일관 마가를 읽고 있더구나.

이는 제자들, 곧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해석하는 데도 어김없이 나타나더구나. 그는 예수를 배신하는 가룟 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지 않고 하염없이 졸고 있는 제자들, 스승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베드로를 우호적으로 해석하더구나. 불신앙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실망감에 의한 것이었다고. 가룟 유다에 관해서는 내가 쓴 책이 있으니 김규항 씨의 것과 대조해 보렴. 좀 어이없는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졸고 있는 있던 제자들이 품위를 잃은 예수가 안쓰러워 잠시 잠든 체했다는 대목이었다. 사회적 약자와 실패자에 대한 김규항 씨의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더구나.

하지만 마가복음 전편에는 제자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을 그는 간과하고 있단다. 마가복음은 나도 한번 그런 설교를 했지만, 실패한 자를 위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책이다. 예수의 말, 대표적으로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을 빵을 왜 안 가져 왔느냐 정도로 받아들이고, 예수에게서 사탄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소리를 듣고,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살 것이라는 말을 곡해해서 서로 권력 다툼을 벌이는 그들은 실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라는 오늘 우리를 책망하고, 그러면서도 위로하지. 한번 생각해봐라. 베드로 이후의 제자들, 곧 2세대 제자들에게 베드로는 정말 대단했을 거야. 그런 베드로의 실패를 가감하지 않고 들려주는 것을 통해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을 방지한다. 그런 마가복음이 예수가 인간이기만 했다면 신으로 고양할 리 만무하지. 신이기에 신이라고 말하는 게지. 그러면서도 오늘도 실패하는 내 모습을 설명하는 틀을 갖게 되지. 그러고 그렇게 어리석은 베드로가 끝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단다.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를 읽는 중요한 원리를 하나 천명했지. '오직 성서로!' 이 말은 성서를 성서로 읽으라는 뜻이야.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어. 동시에 성서를 성서 밖의 시각으로 재단하지 말고, 성서 안에서, 성서 안으로 들어가 읽으라는 뜻도 있단다. 무릇 예수를 믿는다 함은, 곧 자아를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단다. 성서를 읽음에 있어서 어떻게 우리 생각과 사고틀을 완전히 없앨 수 있겠냐마는, 늘 성서 앞에 내 자신을 내려놓고, 비추어 보고, 물어야 한단다. 갓 교회 나온 너에게는 부지런히 그리고 스스로 성서를 읽으라는 당부만 하마.

이 책 제목은 <예수전>이다. 하나 마나한 말을 왜 하느냐고? 그렇지만 '김규항이 본 예수전'이라 해야 맞다. 그 제목은 은연중에 이 책이 김규항이 본 예수가 아니라 예수가 본 예수 자신의 이야기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단다. 자신의 책에 권위를 덧입히게 되지. 드러내놓고 반말하지는 않지만, 이 책에 오롯이 담긴 말들은 B급 좌파 김규항의 말이 아니라 ‘그냥 예수’의 말이라고 권위를 내세우는 것 같아.

실제로 그는 머리말에서 그의 오해를 강화시키고 있어. 예수에 관한 주제별로 글을 쓰지 않고 장별로 훑어내는 형식을 취한 까닭을 그는 이렇게 말하지. “어느 순간 나는 그런 형식이 예수에 관한 ‘김규항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 효율적이지만, ‘예수의 견해’를 전달하는 데는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12쪽) 그럴까? 과연 그럴까? 김규항 씨가 있는 그대로의 예수를 자신은 말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주체를 성서 텍스트에 들이대고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성서의 목소리인양 권위를 부여하고 있지는 않는 걸까?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는 실은 그냥 마가복음이 아니란다. 영어로 하자면, The Gospel According to Mark란다. 마가에 따른 복음이라는 말이야. 복음은 곧 예수 이야기란 말로 치환할 수 있단다. 그 예수 이야기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가라는 필터를 통과한 것이지. 이 점에 있어서 마가복음을 위시한 모든 복음서는 김규항 씨보다 훨씬 정직하다. 초기 제자들의 실수와 실패를 외식하지 않고, 복음서도 자신들이 목격자로서, 증인으로 증언한 것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는 정직함이 맘에 든다. 정말 솔직하지 않냐?

병구야, 우리가 주일 오후 예배에 책 읽기를 하고, QT나눔을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단다. 모름지기 성서는 사적(private)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각자 스스로 읽어야 하지만, 언제나 공동체 안에서 테스트 받아야 한단다. 동일한 본문을 서로 다르게 읽은 것을 내놓으면서 같은 말씀으로 각자에 맞게 은혜를 베푸시고 해석하는 다양성을 보게 되지. 그러면서도 터무니없이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게 되고, 협소한 나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되지. 그러기에 성서는 공동체가 필요한 거다. 다시 말해 성서는 성서를 읽는 공동체가 있지 않으면 안 되지.

하여, 베드로 사도께서는 성서를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엄히 명령한다.(벧후 1:20) 이는 수평적으로는 성서를 홀로가 아니라 함께, 다 같이 읽고 해석하라는 것이고,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읽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벧후 1:21) 이쯤이면 잘은 몰라도 종교개혁자들은 성서를 스스로 읽으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너는 반문할게다. 맞다. 옳게 말했다. 스스로 읽으라는 말은 나 홀로 읽으라는 말은 결코 같지 않다. 이 말을 어떤 이는 교인들에게만 적용할 테지만, 나는 목사도 예외가 아니라고 봐. 그래서 너와 나,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함께 성서를 읽고 독서를 나누는 일을 계속하고, 게을리 하지 말자.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진다.”(잠언 27:17, 공동)

병구야, 네가 교회를, 그리고 나를 찾은 연유는 너의 영혼과 정신의 평안을 찾으려 함이었다. 그러면서도 진보신당 당원인 너로서는 기독교 안에서 사회 변혁적 능력이 있다고 믿었거나, 아니면 바랐을 거야. 어떤 이들은 운동을 하면 할수록 교회와 신앙과 멀어지더라마는, 나는 정반대였단다. 김규항 씨도 그랬던 것 같아. 아마 그도 질문도 많이 받았을 거야. 너 왜, 기독교 언저리에 맴돌고 있냐고, 그러니 정통도 아니고 얼치기 B급이라고 말이야.

오랫동안 보수적인 교회에서 자란 탓에 학생 운동을 기웃거리는 나는 교회 안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운동권은 교회를 곱게 보지 않았고. 그래도 나는 역사의 진실과 복음의 진리가 다르지 않다고 믿었다. 80년 광주와 예수의 골고다가 그리 멀지 않고, 그 완성은 예수의 초월적 복음에 있다고 확신한다. 이 지점에서 김규항 씨와 내가 얼추 만나는 지점일 게야.

다만, 그는 지난 시대의 낡고 어설픈 도식으로 보자면, 그는 진보적 신앙의 자리에서 기독교를 말한다면, 나는 보수적이면서도 보수의 철저화로서의 아나뱁티스트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단다. 김규항 씨에 비해, 그리 운동 영역에 깊숙이 발을 담그지 않고 주변에 있지만,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김규항 씨와 같이 성서 안에 세상 전체를 근본으로부터 깡그리 뒤엎는 전복적 사고와 대안적 사회를 본단다.

병구야, 그렇지만 목사 노릇을 해를 거듭할수록 순례자요 나그네가 되기보다는 종교인이 되어간다는 느낌에 덜컥 겁이 나곤 하지. <예수전>을 읽으면서 예수가 그토록 비판했던 바리새인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기존 질서의 뿌리는 놔두고 거저 겉모양만 고치려 드는 나는 더 위험한 부류일지 모르지. 구체제와 질서를 비판하면서도 그 근본은 짐짓 모른 척하는 나는 거짓과 불의를 유지시키는 데 한몫을 한다는 김규항 씨의 비판에 가슴이 서늘하더구나.

예수의 비폭력과 평화주의는 책과 아카데미가 아니라 사람 사는 현장, 폭력이 난무하는 위험천만한 자리에서 실천되고 실현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숫제 가슴이 아프구나. 네가 아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비폭력 평화주의 연구자란다. 앞으로 내가 집중해서 연구하고 저술을 할 주된 영역 중의 하나란다. 그러면서도 현장보다는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변명이 없지는 않다. 현장에 있는 이들은 내게 평화주의에 관한 숫한 의문을 풀어주고, 강력한 신학적 근거를 제공해주기를 거듭 부탁하고 있지. 평화주의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것은 마치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를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 했으니, 내 공부는 기실 죽은 공부로구나. 내 공부가 나 자신도 변화시키거나 숙성시키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게다. 분리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하지. 기독교 운동 전체라는 큰 그림 속에서 나의 은사와 사명은 연구자와 저술가라고.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고 죽기 살기로 책 읽고 글을 쓰고 있단다.

병구야, 어찌되었건 예수는, 그리고 신앙은 사회와 함께 개인의 내면도 함께 아우르는 것이어야 함을 김규항을 통해서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구나. 한국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너는 역사에 대해 낙관적이다. 또한 자라나는 과정에서 정신적 방황과 방랑을 많이 겪었으면서도 너 말마따나 낙천적이다. 그 낙관과 희망이 예수 안에서 빛을 얻기를 기도한다. 밖을 향한 분노와 안의 상처가 예수로 말미암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기를 기도한다.

무릇 구원이란 고통 밖이 아니라 고통 안에 있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증거란다. 로마와 예루살렘이, 왕궁과 성전이 작당하여 죽일 수밖에 없었던 예수였지만, 그래서 가장 잔인한 십자가 처형을 받았지만, 바로 그것이 온 세상의 구원이다. 내게 그러했고, 네게도 그리 될 것이야. 이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빌리지 않았다면 내 책을 빌려주마. 단정하고 정갈한 김규항 씨의 문장과 강렬하고 빼어난 그의 통찰을 힘입어 조금 더 예수에게 다가가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조병구의 예수전'을 보게 해다오. 김규항 씨보다 진일보하고, 나는 족히 견줄 수 없을 경지를 보여 다오. 오직 성서와 독서!

김기현 / 부산수정로침례교회 담임목사, <뉴스앤조이> 칼럼니스트

* 김기현 목사의 홈페이지(김기현 목사의 신학 광장)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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