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주기도문 노래에 '한 구절'이 빠졌을까요?
왜 주기도문 노래에 '한 구절'이 빠졌을까요?
  • 최태선
  • 승인 2009.07.06 16: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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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사람들' 다섯 번째 이야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가 예배 시간에 즐겨 부르는 주기도문 노래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입니다. 대천덕 신부님은 이 부분을 빼놓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탄식을 하셨습니다. 노래를 작곡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응축하고 생략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대천덕 신부님의 말씀대로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 빠졌습니다.

   
 
  ▲ 우리가 예배 시간에 즐겨 부르는 주기도문 노래에는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입니다.  
 
어떤 이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용서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말입니다. 아무도 용서를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용서는 가장 근본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힘들다고 하여도 용서를 회피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용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거짓이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용서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피상적입니다. 용서를 피상적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은 막상 용서라는 실체에 접근하게 되면 당황하게 됩니다. 용서했다고 믿었던 경우도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내 안에 여전히 분노가 살아있고 상대방에 대한 정죄가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용서는 착각이었을 뿐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버리고 맙니다. 마치 음악의 도돌이표처럼 원위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한히 반복해서….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용서가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됩니다. 도대체 용서란 왜 그리도 어려운 것일까요?

"만일 네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로서, 은혜를 베풀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자로서, 교사나 설교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자로서 다가간다면, 이러한 '바리새인의 누룩'(마태16,6)이 네 속에 있다면 상대방은 네가 불손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의 온당치 못한 태도 때문에 오히려 반항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처음보다 더 나빠질 것이다."

신학자인 로마노 구아르디니의 말입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용서가 어려운 이유는 내 안에 '바리새인의 누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용서한다고 기껏 마음을 먹어도 결과는 더욱 심각한 결렬일 뿐입니다. 그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바로 제가 경험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내 탓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항상 결론을 내려왔습니다. 나는 내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일을 한 나는 의롭다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용서가 아니라 정죄일 뿐입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요구한 것을 수행하려면, 너는 먼저 네가 당한 불의에 대한 네 자신의 마음의 반응, 분노, 옳다고 인정받으려는 의지를 극복하고 참으로 자유롭게 되어야 한다. 너는 철저히 용서해야 하고, 반역적인 마음에 의해 억눌린 다른 사람의 참된 자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상대방을 용서하려고 하기 이전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구아르디니의 말을 곱씹어보면 볼수록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를 하기 위해 바로 그 일을 해내야 합니다.

아니 그보다 한술 더 떠야 합니다. 내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뿐 아니라 나에게 불의를 행한 상대방의 마음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용서란 결국 내 삶에서 이루어내야 할 '성육신'입니다.

"적과 상대한다는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적대감은 짐승 안에도 있다.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생명을 지닌 존재는 누구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기치 있는 것을 내게서 빼앗는 타자는 나의 적이다. 그에 대해서 불신, 두려움, 혐오의 깊은 감정이 생긴다. 나는 그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한다. 그로부터의 위험을 느끼고 불신하며 항상 공격의 태세를 갖추고 있음으로써 나는 자신을 적으로부터 잘 보호하게 된다. 이러 상황에서 용서는 본능적 증오의 방어 태세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본래적인 것이 적에 의해 손상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보호받지 않은 상태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참으로 용서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자와 증오하는 자보다 강하다"

점입가경이 아니라 난공불락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나 자신의 적대감을 극복하고 상대방의 적대감에 나를 무방비로 내놓을 수 있을까요? 이쯤에서 용서를 포기하고픈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 뜻을 가지고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의 고통스러웠던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예수.  
 
용서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6)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나의 뜻이 무너지는 순간, 늘 아버지(하나님)의 뜻이 드러났습니다. 모리아 산 정상에서 독자 이삭을 바치던 아브라함도 그랬고, 날선 권위와 지식을 무너뜨린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열쇠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 오늘 나에게도 똑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가 죄와 사망에서의 영원한 승리를 인류에게 주었다면, 오늘 작은 예수들의 십자가의 승리는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까요?

이라크의 전쟁이 끝나고, 가자 지구의 높은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고, 교회에서의 경쟁이 사라지고 그래서 교회의 높낮이와 크고 작음이 사라지고, 사회에서 자살이 사라지고, 기아와 굶주림이 사라지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생명으로 존중받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용서가 아직 내 뜻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누군가 빠진 부분이 없는 주기도문 노래를 다시 작곡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새 노래를 부르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용서의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최태선 / 기자회원,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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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9 02:41:49
참으로 동감합니다. 늘 그찬양을 부를때마다 빠진 구절때문에 마음에 부담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마치 일만달란트의 탕감을 받은것과 같습니다. 내게 백데나리온을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에게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