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의 폭을 넓히자
사유(思惟)의 폭을 넓히자
  • 박철
  • 승인 2009.07.23 22: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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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자유로운 신…다양함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 삶이란 신비한 것이요, 다양한 반응과 변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비로소 보람된 삶이 만들 수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교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삶의 자세와 성격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요, 편협한 데 있다고 보는 것은 어떨까? 더구나 독단적이고 편파적인 신앙 자세는 폐해가 크다.

자신들이 믿고 추종하는 신앙 형식을 절대화하여 다른 사람이 지닌 신앙 형식을 이단시한다거나 죄악시하는 경향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사고방식은 결과적으로 무수한 종파 의식을 빚어내는 요인이며, 기독교 자체를 하나의 경색(梗塞)된 바리새적 도덕주의 내지 형식주의로 몰아가는 분파주의 현상을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이란 결코 흑백텔레비전이나 흑백카메라처럼 모든 현상을 흑백으로만 가려내는 단조로운 것이 아니요, 더구나 자기를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는 아집적(我執的) 논리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본다든지, 흑이 아니면 백이라고 판단하는 입장만을 고집하다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단에 빠지거나 바리새적 율법주의에 갇히고 말 것이다.

그들은 결국 새것을 받아들일 만한 용기도 없고, 갱신을 향한 변화 과정을 용납하지 못하게 되고 만다. 자기가 경험한 좁은 고정관념 테두리 안에 단단한 껍질을 만들어서 옹색하고 단절된 자기 관념에 붙들려 결국 인생 자체가 질식하게 될 것이다.

삶이란 신비한 것이요, 다양한 반응과 변화 과정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갱신을 통해 비로소 보람된 삶이 만들 수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가장 두려운 적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틀'이나 '형식' 속에 인생을 구겨 넣으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령이란 자유로운 신이다. 바람처럼 자유자재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다. 다양함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일을 통해 진정 풍부하고 알찬 인생을 만드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틀'이 있는 인생엔 대화가 없고, 남의 장점을 보려는 아량도 없으며, 세상을 온통 백안시해버리는 속단과 고집만이 남을 뿐이다.

그리스도는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완강한 형식주의를 거부하고 인생을 실로 자유롭게 사신 분이다.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였던 세리와 창기들과 사귀었고, 딱딱한 계율에서 인생을 해방하려 하신 분이다.

그의 가장 우수한 제자였던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서 삶의 터전을 폭넓게 잡고 살아 간 사람이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너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편지한 일이 있다. 사도 바울은 관용·아량, 곧 마음의 폭을 넓힐 때에 감사와 기쁨이 차고 넘친다고 설교하였다. 경색된 심정, 편파적인 견해,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속에서는 언제나 불평·원망· 시비·짜증만이 남을 수밖에 없다.

   
 
  ▲ 성령이란 자유로운 신이다. 바람처럼 자유자재로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다.  
 
구약 성서의 인물 가운데 다윗왕 이야기는 우리에게 너무도 깊은 감명을 준다. 다윗왕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 적이 있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왕은 부득이 충성된 신하들의 호위 하에 몽진(蒙塵)하게 된다. 그때 전왕 사울의 부하 중 게라의 아들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 피난하는 왕과 신하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와 욕설을 퍼부었다. "사람의 피를 흘린 악한 놈아, 가거라… 네가 피를 흘렸으니 네가 화를 자취하였도다"고 말했다.

한 신하가 분노하여 왕께 그를 당장 쳐 죽이자고 제안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그만두어라. 내 몸에서 난 아들도 오히려 내 생명을 해하려 들거늘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저를 버려 두어 저주하게 하라. 여호와가 저를 명하심이로다"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대왕다운, 명군다운 태도 아닌가?

싸움은 왕의 승리로 돌아갔다. 압살롬은 죽었고 반군은 제압되었다. 환궁한 왕은 부역자들을 처단해야 할 판이다. 이때 왕을 저주하던 시므이가 전날 자신의 행위로 화가 자기에게 올 것을 예측하여 겁을 먹고 왕 앞에 자수하였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 살려주옵소서."

옆에 섰던 군대 장관 아비새가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저주한 이놈은 마땅히 죽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타당한 제언이다. 그러나 왕은 대답하였다. "그게 무슨 소리냐? 오늘과 같이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이스라엘 중에서 사람을 살해하겠느냐?" 실로 통쾌한 소리다. 장부의 선언이다. 그것이 곧 크리스천의 금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 교회와 교인들이 이처럼 너그럽지 못하여 얼마나 큰 문제점들을 드러내고 있는지 모른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의 홍수 후 하나님은 노아에게 하늘에 뻗친 무지개를 보여 주시면서 새 희망을 약속해주셨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에 뻗친 무지개, 그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새 희망을 계시하신 것이다. 원래 무지개란 공중에 떠 있는 물방울에 햇빛이 닿아 안에서 전체적으로 반사하여 다시 나온 빛이 일곱 가지 색을 띠는 현상이다.

   
 
  ▲ 하늘에 뻗친 무지개, 그 찬란하고 황홀한 광경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새 희망을 계시하신 것이다.  
 
햇빛이란 얼른 보면 그것이 무색이거나 백색 정도로 보이는데 실은 그것이 그처럼 단조로운 빛깔이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일곱 가지 색깔로 형성된 것임을 과학적 분석으로 알게 된 것이다.

우리 인생도 무지개 속에서 발견한 희망처럼 삶의 참된 의미와 새로운 계시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무지개의 빛깔은 과연 우리가 생활 속에서 가능한 경험의 스펙트럼을 연상한다. 우리는 삶의 터전을 넓힐 필요가 있다. 옹색하고 협소한 가슴 속에 어찌 무한한 신의 은총이 자리 잡을 수 있겠는가?

남의 입장을 다 헤아릴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여유 있는 관용을 보이자.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는 아량을 갖자. 그것은 우리의 수양이나 지식으로 도달할 수 일는 세계가 아니요, 무한히 자유로우시고 넓은 금도를 지니신 그리스도를 배움으로 가능하다.
 
박철 / 좋은나무교회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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