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동환 목사, "김 전 대통령의 정신 이어받아야"
문동환 목사, "김 전 대통령의 정신 이어받아야"
  • 이승규
  • 승인 2009.08.19 2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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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싱 열린 공간에 마련된 빈소 찾아 조문…빈소, 8월 22일까지

   
 
  ▲ 문동환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정치 목회자로 불렀다. 한신대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가장 앞장서서 돌봐주고, 격려해줬다는 이유에서다.  
 
문동환 목사가 플러싱 열린 공간에 마련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김 전 대통령과 문 목사는 1988년 김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에서 총재와 수석부총재를 지낸 사이다. 문 목사는 한국에서 김 전 대통령을 도와 4년 여 동안 정치 활동을 했다.

문 목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화 통일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의미에서 6·15공동선언은 세계사에 남을만한 기록이었다고 덧붙였다. 세계 역사에서 적대국으로 서로 으르렁 거리던 두 국가가 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문 목사는 이런 훌륭한 가치들을 이명박 정권이 훼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북조선'이 살아야 우리도 산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북을 돕는 것을 조공 바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란 얘기다.

문 목사는 김 전 대통령의 얼은 국민의 마음 속에 분명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이 주장했던 민주화와 통일, 대중경제론이 다시 국민 속에서 살아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문 목사는 8월 19일 뉴욕총영사관과 뉴저지 한인회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같은날 저녁 한국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빈소는 플러싱 대동연회장 지하에 있는 열린 공간에 8월 22일까지 마련된다.

다음은 문동환 목사가 쓴 추모사 전문이다.

김대중은 정치 목회자였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빈소는 플러싱 대동연회장 지하에 있는 열린 공간에 마련됐다.  
 
김대중 선생과 나의 인연은 너무나 많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우리가 1975년 유신독재에 항거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가장 앞장서서 돌봐주시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김대중 선생을 '정치 목회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뒤 김대중 선생과 우리는 1976년 3.1 구국선언 사건으로 투옥되어 재판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나아갈 길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토론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몸이 됐습니다.

1980년 서울에 봄이 오면서 나는 학교로 복직했는데, 그 후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김대중 선생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창출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함께 활동했습니다.

나는 당시 세계교회협의회(WCC) 예배·교육위원회의 멤버였는데 박정희 정권 때는 여권을 주지 않아 외국에서 회의가 있어도 참석하지 못하다가, 서울의 봄이 와서 비로소 해외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광주민중항쟁이 터졌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으로 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돕는 원거리 사격을 하면서 돌아다녔습니다. 워싱턴에서 민주화  동지들과 조그마한 교회도 만들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1980년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고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미국 정부가 전두환 정부에 압력을 넣어 1982년 석방된 뒤 미국으로 망명을 왔습니다. 나는 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2년 정도 계시는 동안 아주 가까이에 같이 있으면서 통역도 해 드리고 손님도 맞고 그랬었습니다.

그 후 김대중 선생은 1985년 12대 총선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신민당은 총선을 앞두고 맥을 쓰지 못하던 상황이었는데, 김대중 선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에 돌아가 선거 운동에 나서면서 신민당은 제1야당이 됐습니다.

나는 1986년 한국으로 귀국해 학교에서 1년 반 정도 더 있다가 은퇴했습니다. 나의 형님이신 문익환 목사는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던 청년 100여 명과 함께 '이제는 정당에 들어가서 민주화운동을 해야 한다'고 뜻을 모으고 김대중 선생의 평화민주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김대중 선생은 "문동환 목사도 같이 들어오라"고 요청했고, 나는 여러 차례 거부하다가 젊은이들과 김대중 선생을 접목시켜야한다는 생각으로 결국 당에 들어가서 88년부터 몇 년 간 평민당 수석부총재를 하게 됐습니다.

'체제 통합은 후손에게 맡기자'…6.15 공동선언의 정신

   
 
  ▲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 지방자치제 쟁취를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문동환 목사. ⓒ 문동환 목사 카페 '문동환의 조각달'  
 
나는 평민당에서 4년 가까이 있었는데, 김대중 선생과 다시 한 번 정말 가까운 거리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당시 '남북이 완전히 다른 이념으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갑자기 통일을 하면 안 되고 오래 두고 기다리고 대화하면서 평화를 이룩한 다음에야 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나는 정계를 은퇴하고 미국으로 다시 가서 기독자교수협의회를 만들어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많은 토론회를 열고 다양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북한의 전금철(조선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초청해서 통일에 대한 토론회를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전금철에게 통일에 대한 김대중의 생각을 전하니까 그는 "남쪽의 군사 정권들이 했던 생각하고 뭐가 다르냐"고 일언지하에 내쳐버렸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3단계 통일방안 중 1단계 평화공존과 2단계 평화교류는 좋은데 3단계 '남북 총선거에 의한 통일'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됐습니다. '오래 두고 기다리면서 체제 통합에 관해서는 후손이 결정하도록 당분간 보류해야 한다'는 김대중 선생의 말이 바로 그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마침 아태평화재단에서 강연을 좀 해 달라고 해서 서울에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김대중 선생이 외국에 계실 때라 나는 재단의 연구원들하고만 대화를 했는데 전금철 얘기와 내가 깨달은 생각을 연구원들에게 들려줬더니 "참 좋은 생각이다. 김대중 이사장께 여쭙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3주 후에 김대중 선생은 한 신문에 '3단계는 후손에게 맡기자'는 요지의 칼럼을 썼습니다.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6.15 공동선언은 바로 그런 생각이 밑바탕이 된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연방제는 것은 당분간 두 정부를 놔두자는 것이고, 남쪽에서 말하는 국가연합도 사실 마찬가지인데 6.15 선언 2항에 바로 그게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춤을 출 듯 기뻤습니다.

6.15 선언은 인류사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서로 싸움을 하던 적들이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다 망한다. 평화롭게 살자'고 해서 평화가 온 적은 없었습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짓누르고, 강자의 말대로 하는 평화를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6.15 선언은 '이대로 가면 둘 다 죽는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21세기에 인류가 가져야 할 평화 개념인데 그게 우리 한국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햇볕정책을 높이 평가했고, 6.15 공동선언 실천 해외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YH 사건에 연루되어 연행되는 모습(왼쪽). 택시를 타고 구치소에서 집으로 잠시 나오는 길. 장난기 어린 얼굴과 수의가 신기하게도 잘 어울린다. ⓒ 문동환 목사 카페 '문동환의 조각달'  
 
그렇게 김대중 선생과 내 심정은 하나로 일치됐습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등장해서 그런 가치들을 다 후퇴시키고 6.15 선언을 무시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병이 난 것도,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도 다 그것 때문입니다.

김대중 선생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돌아가셨을 때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하면서 권양숙 여사의 손을 잡고 통곡했습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아픔이 선생의 병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두 대통령을 죽인 겁니다.

그러나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에 국민들이 전부 일어났듯 김대중 선생 이후에도 그렇게 될 거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약점을 가지게 마련인데 돌아가시면 그런 것들은 다 잊혀지고 김대중 선생이 가졌던 소중한 심정만 남을 것입니다. 그가 주장했던 민주화와 통일, 대중경제론은 생각 있는 국민들 속에서 다시 살아 일어날 것입니다. 돌아가신 후에 나오는 여러 가지 반응을 봐도 그 분의 얼이 이미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고생한 백성들은 언제나 악(惡)에 대한 감수성이 강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국민들이 일어나는데 20년이 걸렸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와서는 국민들이 1년도 못돼 문제를 간파했습니다. 그렇게 김대중 선생의 정성스러운 빛은 다시 국민들에게서 살아날 것입니다.

문동환 목사의 추모사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 문 목사와 <프레시안>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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