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이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의심이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
  • 김기대
  • 승인 2009.09.02 17: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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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 (3) [다우트], 진리를 향한 의심이 진지해지려면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에 그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곧 손을 내밀어서, 그를 붙잡고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마태복음 14장 30~32절, 표준새번역)

"의심을 품는 사람들을 동정해주고, 불구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끌어내어 구원해주십시오. 또 본능적인 욕정에 빠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욕정으로 더럽혀진 그들의 속옷까지도 미워하되, 그들에게는 조심스럽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유다서 1장 22~23절, 표준새번역)

 

   
 
  ▲ 영화 <다우트>(Doubt, 2008). "활기에 가득한 플린 신부는 철의 여인이며, 공포와 징벌의 힘을 굳건히 믿고 있는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에 의해 한치의 빈틈도 없이 이어지던 학교의 엄격한 관습을 바꾸려고 한다. 당시 지역 사회에 급격히 퍼지던 정치적 변화의 바람과 함께 학교도 첫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입학을 허가한다. 하지만 희망에 부푼 순진무구한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도널드 밀러에게 지나치게 개인적인 호의를 베푼다며, 성폭행을 저지른 것 같다는 의심스러운 언급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고 플린 신부를 학교에서 쫓아 내려는 계획을 세운다. 자신의 도덕적 확신 이외에 단 하나의 증거 하나 없이, 알로이시스 수녀는 교회를 와해시키고 학교를 곤란에 빠트릴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플린 신부와의 은밀한 전쟁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우트> 홈페이지 줄거리 소개 중에서)  
 

1964년 미국 동부에 사는 천주교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일명 'WASP'(앵글로 색슨계열의 백인 개신교인)만이 대통령이 되어왔던 불문율을 깨고 1961년 존 에프 케네디가 천주교인으로는 첫 대통령이 되었다. 개신교에 의해 세워진 나라, 그것도 종교 박해를 피해서 온 개신교도들이 주류인 나라에서 천주교인들이 당했던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17세기 주류 개신교의 '관용' 덕분에 비주류 교단에 대해 종교적 자유가 허락되었을 때에도 천주교는 제외되었었다. 미국에서 천주교가 종교적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침례교 등과 같은 비주류 교단에 비해 훨씬 뒤의 일이다. 지금도 미국의 인구 센서스는 기독교와 천주교를 신교와 구교의 큰 범주로 구분하지 않는다. 천주교는 기독교의 양대 산맥 중 하나가 아니라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교파로 취급된다. 이런 환경에서 천주교 대통령의 탄생은 얼마나 기쁜 일이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한 번의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1963년 암살당하고 만다. 그러기에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에 보수 개신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음모론이 아직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이제 겨우 세상이 '보편적 교회'(가톨릭)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고 기뻐했지만, 케네디의 죽음은 천주교인들을 다시 깊은 두려움 속으로 빠뜨렸다.

1962년에 시작해서 1965년에 끝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들려지는 소식들도 보수적 천주교인들에게는 또 다른 비보였다. 시대의 적응을 내세워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탈피하고 예전을 개혁한다는 소문이 바티칸에서 들려 왔다. 제도의 과감한 개혁과 타종교에 대한 관심, 개신교 및 동방 교회와의 화해 무드는 보수적 천주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세속과 결탁한 사건이었다. 사회 참여를 권장하고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것 역시 교회의 변질을 의미했다. 

바로 그때 미국 뉴욕 브롱스(Bronx)에 있는 천주교 학교 성니콜라스에서는 신부가 흑인 학생을 성추행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 <다우트>(Doubt, 2008)의 배경이기도 하다. 다음은 <다우트>를 이끌어가는 네 명의 인물들이다.

[인물 1]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

동부의 겨울바람은 드세다. 이제 보수적 천주교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종말은 희망의 완성을 의미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보기 싫은 것들을 싹 쓸어버렸으면 하는 재편 욕구의 표현이다. 성니콜라스 학교의 교장 수녀 알로이시스는 나무도 뽑을 것 같은 매서운 동부의 겨울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그녀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맞선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어차피 말세는 오기로 되어 있는 것. 나라도 과감하게 세상의 말세적 징조와 맞서 싸울 것이다. 어차피 천국은 세상과 타협하는 비겁한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기에.

 

   
 
  ▲ 알로이시스 수녀.(출처 : <다우트> 홈페이지)  
 

[인물 2] 밀러 부인(바이올라 데이비스)

당시 흑인 천주교인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그들은 개신교인이 아니므로, 또 백인이 아니므로 이중의 멸시를 받는다. 세상은 그럴듯하게 흑백 차별이 없다고 '수사(rhetoric)'하지만 그들의 삶의 온도는 여전히 춥다. 흑인 게토 지역의 학교가 아닌 좋은 사립학교에서 공부시키는 것만이 자녀를 이중의 멸시로부터 탈출시키는 일이다. 흑백의 차별이 있건 없건, 사회적 이슈가 무엇이건, 내 아이가 학교에서 어떤 대접을 받던, 학교 안에 어떤 부조리가 있건 내 아이는 이  학교만 졸업하고 조금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면 된다. 흑인 모성의 목표는 그것이므로 누구도 그것을 방해하면 안 된다. 그녀는 그 일을 위해 오늘도 일하러 간다. 어쩌면 이 여인은 천주교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집 근처에 있는 가장 좋은 학교가 천주교 학교이기 때문에 그곳에 보낸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가 사제가 되고 싶어 하기에 조금은 불안하다.

 

   
 
  ▲ 밀러 부인(바이올라 데이비스). (출처 : <다우트> 홈페이지)  
 

오늘 가진 자들에 의해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서민들이 기득권을 대변하는 보수 정당에 오히려 투표하는 경향을 보고 진보성을 지닌 사람들은 그들의 무지와 무책임함을 비웃는다. 그러나 그들은 현명하다. 구조의 개선을 이야기하고 진보적 어젠다를 생산해내는 사람들만큼이라도 똑똑해지기 위해 그들은 어떠한 모멸도 감수하고 '출세'해야 한다. 구조적 모순에 대한 인식과 진보적 해결책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생존이 급선무인 이들에게 진보 지식인들은 어려운 수사만 늘어놓는다. 차라리 부잣집 머슴으로 사는 것이 현명하지 부잣집이 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의 보수적 논리가 그들에게는 오히려 호소력이 있다.

진보란 무엇인가? 사람에 대한 애정은 있다. 그러나 때로는 버거운 의무를 지운다. 백인에게만 가능한 일을 흑인에게 베푼다고 진보가 아니다. 지식인의 개념들을 노동자들에게 공유시킨다고 진보가 아니다. 천주교가 주류인 유럽과 달리 소수(소외)였던 미국의 천주교인들에게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은 그동안 힘들게 지켜온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진보 이전에 삶의 혼란이다. 

[인물 3]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그는 진보적 신부다. 그는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학교에서 소외당하는 흑인 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준다'(진정한 관심인지 그야말로 관심을 베풀어'주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기타를 치며, 아이들과 함께 농구하고, 연애 상담도 해준다. 그 어디서도 권위적인 신부의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들의 신부님'이다. 반대로 그들만의 공간에서는 플린 신부는 완전히 변신한다. 신부들의 화려한 저녁식사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잡담에서도 신부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역시 그들은 그들에게 속해 있다. 그 시간 수녀들은 검소한 식탁에서 경건하게 침묵으로 식사를 나누고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가 끊임없이 신부의 성추행 의혹을 이야기하고 다니자 신부는 강단에서 수녀를 '까는' 설교를 한다. 이미 하늘에 흩날려진 배게 깃털은 다시 모을 수 없듯이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수녀에 대한 경고이다. 그가 사용한 깃털의 예화는 탁월하고 교훈적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예화 앞에서 수녀의 의심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관객은 혹시 나의 언어생활에 문제가 없는지 성찰하며 감동받는다. 그러나 얼마 전 신부들만의 저녁식사에서 그들 역시 남의 험담을 하며 키득대었었다. 자신들은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강단에서는 근엄한 얼굴로 교훈하고 다른 이들을 '까는' 것을 업으로 삼는 나를 비롯한 종교 전업가들의 위선을 보여주는 장면에 소름이 돋는다.  

 

   
 
  ▲ 플린 신부. (출처 : <다우트> 홈페이지)  
 

[인물 4] 제임스 수녀 (에미미 아담스)

플린 신부의 성추행 의혹을 제일 먼저 제기한 그녀는 보는 대로 믿는 사람이다. 그녀가 처음 본 장면은 분명히 의심의 요소가 있었다. 그러나 일이 커질수록 그녀가 본 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며 혼란스러워 한다. 일이 커질 것 같아지자(가족의 병간호라는 불가피한 일이기는 하지만)제임스 수녀는 슬쩍 자리를 피한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론이 내려졌으면 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다. 진실에 혼란스러워하는 우리 관객을 대변한다. 

앞서 언급한 이 네 사람이 영화 <다우트>를 이끌어간다. 그 누구도 삶에서 철저하게 정직하지 못하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하나님과 삶에 대한 진지함이 있지만 그 진지함의 대상에 자신을 슬쩍 얹어서 함께 간다. 그녀의 판단은 설령 감각에 의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이 자기편이라고 확신하므로 진리다.

밀러 부인은 세상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 내 아이만 좋은 교육 받으면 된다. 어차피 백인과 그들만의 세상은 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우리 같은 흑인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들은 흑백이 함께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보다 흑인을 끊임없이 관심(관리)의 대상으로만 두려는 오만함을 가지고 있음을 이 엄마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흑인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려는 여타의 백인들보다야 낫겠지만 관리도 지배와 같은 종류다. 이 엄마에게 있어서 흑백 차별이 없어졌다는 것도, '좋은' 백인들의 과도한 관심도 의심의 대상이다. 설사 아이가 성추행을 당했더라도 졸업만 하면 된다. 졸업에 지장만 없다면 당한 것도 안 당했다고 말할 수 있고, 아이가 안 당했어도 학교 실세인 알로이시스 수녀의 입장이 신부를 궁지에 빠뜨리는 것이라면 당했다고 선뜻 동의해줄 수 있다.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졸업이 중요하다. 

플린 신부는 열려 있다. 그러나 그 열림이 어디까지인지 모른다. 그는 천주교를 개혁하는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동의하지만 동시에 천주교의 교권 구조 덕으로 의혹에도 불구하고 좋은 임지를 찾아 떠날 만큼 정치적이다. 그의 개방성에는 진지함과 헌신이 없다. 그는 진보가 될 수도 있고 자신의 입지를 위해 기득권에 줄 설 수도 있다. 

제임스 수녀는 보는 대로 믿다가 믿는 대로 보고 싶어 한다. 어차피 진실은 알 수 없는 것, 그냥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플린 신부가 학교에서 흑인 아이를 성추행했다는 오해를 수녀로부터 받기 시작하는 게 영화 초반이다. 영화 초반의 정황은 성추행을 했을 법하게 흘러간다. 교사로서의 신부는 복사(altar boy)일을 하는 흑인 소년에게 유별나게 관심이 많다. 그에게 흑인 아이는 흑인이 아니라 다른 백인 아이들과 똑같은 제자일 뿐이다. 오히려 소외당하는 그 아이를 종교인의 마음으로 보듬고 싶다. 그 마음이 진정성에 기초한 것인지, 당위성에 기초한 것인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1960년대 초반의 동부에서 흑인에게 특별한 총애를 베푼다는 것은 거의 성자에 가까운 결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신부의 성추행 사실을 의심하지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관객들은 알로이시스 수녀에게서 멀어지고 신부에 가까워진다.

얼마 전 필자가 가르치던 신학교 수업에서 학생들과 이 영화에 대해 토론하면서 '과연 신부가 성추행을 했을까'라고 물어 보았더니 대부분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결론이 쏠렸다. 성추행을 했을까? 안 했을까? 영화의 모든 정황은 애매하다. 

 

   
 
  ▲ 왼쪽이 신부가 성추행한 흑인 학생이다. (출처 : <다우트> 홈페이지)  
 

결국 진실은 하나님과 당사자들만 알 뿐이다. 관객들은 자신이 속한 삶의 콘텍스트와 편견에 따라 그 사건을 결론 내리고 만다. 특히 후반부에 갈수록 앞에서 소개한 깃털의 예화에서 종교적 감동이 아니라 도덕주의적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그 현란한 설교에 빨려 들어가면서 신부의 결백에 손들어 준다. 게다가 마지막에 신부가 아주 좋은 자리로 영전되어 가자 대부분의 관객들은 신부의 결백을 확신한다.

진실은 오간데 없고 윤리적 동감과 출세라는 결과에 따라 사건을 단정 짓는 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윤리적 잣대로 진리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좌파들이나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우파들이나 천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모범적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영원히 어떤 신념이 가능하냐는 것이 중요하다'는 알랭 바디유의 지적은 좌우 모두에게 적용된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부의 성추행 사실을 의심한다. 교회의 변질(바티칸 공의회)과 그것에 동의하는 신부의 타락은 이 세상이 말세임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요함이 도에 지나치자 사람들은 진실에 대한 문제보다는 그녀의 태도에 질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부 쪽으로 기울자 그는 상급 교구에 전화해서 신부의 과거를 알아보았다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알고 싶은 진실을 알기 위해 다른 것에 대한 거짓말은 윤리적 하자가 될 일이 없다. 그녀의 모든 의심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무사히 학교를 떠난다. 수녀는 자괴감에 눈물지으며 "나는 의심했어! 의심했어!"를 반복하며 영화는 끝맺는다.

 

   
 
  ▲ 제임스 수녀. (출처 : <다우트> 홈페이지)  
 

그녀가 했던 의심은 무엇에 대한 의심일까?

사람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한 알로이시스 수녀의 의심은 천주교 제도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플린 신부를 벌하지 않은 하나님에게로까지 이어진다. 인도에서 빈민 운동을 하던 테레사 수녀가 죽은 몇 해 뒤에  테레사 수녀의 서한이 공개된 적이 있다. 서한 중 일부는 테레사 수녀조차도 신앙에 회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앙의 깊이와 상관없이 의심은 우리 마음 한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의심은 진리에 이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폴틸리히의 말처럼 믿음과 의심의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정한 의심은 믿음을 확인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의심은 관심의 대상에게 진지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스캇 펙 역시 성스러움으로 향하는 길은 모든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알로이시스 수녀의 의심은 어떤 의심이었을까? 신부의 성추행을 의심할만한 정황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의심의 기초로 삼은 정황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한 정황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덧붙은 가공된 정황이었다. 그 가공에는 신부와 수녀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포함된다. 플린 신부 전에 많은 신부들이 그 학교를 거쳐 갔을 것이다. 진실한 신부도 있었을 것이고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기는 과정에서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생각했던 무책임한 신부들도 있었을 것이다. 플린 신부처럼 학생들에게 열정을 보이는 신부가 처음이기는 하지만 그녀의 교육 철학에 도전하는 것이 흠결 사항이다.

천주교 직제상 신부와 수녀는 상하 관계지만 학교에서는 수녀가 책임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린 신부는 교장실에 들어와 수녀 교장의 자리에 당연한 듯 앉는다. 수녀는 그 행동도 못마땅하기에 의심의 요인에 교장 의자를 뺏긴 수모도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녀는 플린 신부뿐 아니라 모든 신부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알로이시스 수녀의 의심에는 의심을 살만했던 그 상황 자체보다는 그녀의 편견과 해석과 전통이 들어가 있었다. 불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습(習)이라고 부른다. 이미 편견과 해석이 관습이 되어버렸고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 습이 제거되지 않는 한 어떤 진리 과정도 정직하지 못하다. 아무리 의심이 진리를 찾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할지라도 그녀의 의심은 의심이 아니라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습이 표출된 것뿐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의심의 본질을 깨달았기에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습은 플린 신부를 영전시킨 교회 정치 한 방에 날아가버릴 만큼 약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진리라고 믿고 평생을 살아 왔으니 회한의 눈물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 그 진지한 의심은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출처 : <다우트>)  
 

이제 그녀는 처음으로 바른 의심. 진지한 의심을 한다. 그 진지한 의심은 그녀를 진리의 세계로 안내할 것이다. 무엇에 대한 진지한 의심? 바로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부-교회-하나님으로 방황하던 의심의 여정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진지함을 찾는다. 중세의 신비가 엑카르트는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는다. 엑카르트는 '어떤 사람이 왕국이나 온 세계를 놓아버렸다 해도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다면 그는 아무것도 놓아버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에 집착했던 알로이시스 수녀는 자신을 이제 놓아야만 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의심하며 산다. 그러나 그 의심에는 내 '습'이 덕지덕지 뭍어 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호수에 대한 '습'이 그를 물에 빠뜨렸다. 이 습이 제거되지 않은 모든 의심은 진지하지 않다.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완벽하지 않으면서 모든 판단의 주체가 되려고 할 때 진지하지 못한 의심은 시작된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한계를 인식할 때 즉 나의 나 됨에 대한 의심이 시작될 때 진리를 향한 우리의 의심은 진지해진다.

정의와 평화가 훼손된 일로, 교회에서 상처받은 일로, 사업에 실패한 일로, 사랑에 실패한 일로 애꿎게 하나님을 의심하는 이들이여! 의심의 대상을 자신에게로 돌려보자. 거기 진리가 있다.

김기대 / LA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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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09-09-05 06:07:49
평을 읽다보니 갑자기 영화가 보고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