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때가 왔다" 100년 묵은 숙제 오바마가 푸나
"드디어 때가 왔다" 100년 묵은 숙제 오바마가 푸나
  • 신호철
  • 승인 2009.09.03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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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력 단체 로비에 번번히 좌절된 전 국민 의료보험 도입 시도

“아들이 중풍과 간질을 앓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해요.”(흑인 여성)
“직장에서 쫓겨나자 의료보험도 없어졌습니다.”(백인 남성)
“내가 아팠을 때 보험회사는 병원비를 보장해주지 않았어요.”(백인 여성)
“우리 장인은 다리를 저는데, 의료보험이 없습니다.”(흑인 남성)

인종과 성별을 달리한 미국인들이 각자 처지를 토로한 뒤 한마디를 외친다. “때가 왔어요(It’s time).” 이 동영상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홈페이지에 걸린 의료보험 개혁 광고다. 이 영상은 “의료보험을 개혁해야 할 때입니다”라는 흑인 여성의 읊조림으로 끝난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버락 오바마 진영의 캠페인 구호는 ‘예스 위 캔’이었다. 지금 오바마의 구호는 ‘이츠 타임’으로 바뀌었다. 예전 오바마 홈페이지 ‘Yes, we can’이 자리잡고 있던 자리에는 ‘It’s time’이라는 표어가 큼직하게 차지하고 있다.

오바마는 의료보험 개혁에 정치적 사활을 건다. 지난 7월22일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오바마는 “의료비를 낮추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매일 1만 4,000명 미국인이 보험 가입자에서 이탈하게 된다”라며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음 날인 7월23일에도 오바마는 오하이오 주의 한 병원을 방문한 뒤 인근 고등학교에서 의료보험 개혁을 외쳤다.

   
 
  ▲ 지난 6월 24일, 에서 진행한 국민 의료보험 개혁에 관한 토론회에서 청중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 (출처 : healthreform.gov)  
 
영화 <식코>를 본 사람이라면 미국 지식인이 왜 의료보험 개혁을 호소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선진국 가운데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가 없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3억 인구 가운데 5000만 명이 의료보험이 없다. 오바마 개혁안은 2019년까지 무보험자 가운데 3,700만 명에게 새로 의료보험을 줘서 가입률을 97%로 높이는 것이 목적이다. 재원 마련을 위해 개인 28만 달러, 부부 합산 35만 달러 고소득자에게 적용되는 세율을 높인다거나 연 소득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 가구에 대한 소득세를 올리는 안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츠 타임. 민주당으로서는 지금이 의료보험 개혁에 적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오바마의 민주당은 하원과 상원 모두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는 회의적인 여론이 팽배하다. 미국 민주당은 한국의 한나라당과 달리 대통령 뜻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블루 독’이라 불리는 보수적 민주당원이 하원 256명 가운데 52명이나 된다.

무엇보다 미국 진보 진영은 과거 실패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미국 현대사 100년 동안 네 번에 걸쳐 의료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난공불락 같은 이익단체의 벽을 넘지 못했다.

오바마는 미국 역사상 다섯 번째로 의료보험 개혁을 시도하는 대통령이다. 오바마의 모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 네 차례 실패 사례를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미국 민간 의료 보험의 폐해를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 (출처 : 홈페이지>)  
 
미국 역사상 첫 번째 의료보험 도입 논의는 1901년 미국 사회당 창립대회 때 있었다.  <미국의 의료보장>을 쓴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미국에서 처음 의료보험제도 논의가 시작된 때는 다른 유럽 선진국에 비해서 늦은 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테어도어 루스벨트가 이끄는 진보당도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공약으로 채택했다. 구체적인 법안 형태로는 1915년 미국 노동자입법협회(AALL)가 국민 의료보험 법안을 제안한 것이 최초다.

1900년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운동이 영향력을 발휘하던 때로 ‘진보의 시대’라고 불린다. 노동자 단체나 진보 정당이 활발히 움직이던 때였고 역사상 가장 의료보험제도가 도입되기 좋은 분위기였다. 만약 이때 의료보험이 도입되었다면 미국 100년 역사가 바뀔 뻔했다.

의사협회 로비에 좌절

하지만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당시 영향력이 컸던 노조는 국가가 노동 조건을 일률적으로 규제하려 한다며 반대했다. 뼈아픈 역사적 실책이었다. 무엇보다 의사들이 정부가 의료 기관을 통제하고 의료비를 정하는 방식에 크게 반대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의료보험 운동이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져 아예 논의가 사라졌다.

미국의사협회(AMA)는 종종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막는 장애물 노릇을 했다. 두 번째로 의료보험제도 논의가 시작된 193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네소타 주 하원의원이던 어니스트 런딘이 사회보장 법률(HR2827)을 제안했다. 하원을 통과한 이 법률은 실업보험과 여성 복지 등 노동자를 경제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었다. 1차 시도 때와는 달리, AFLCIO 등 미국 주요 노조연맹이 의료보험 도입을 찬성했다. 의료보장제도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시위와 집회가 이어졌다.

하지만 1930년대 노동운동은 끝내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의료보험 서비스를 넣는 데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거론된다. 정책학자 안느 엠마누엘은 “조직화된 의료단체와 그 동맹 세력 때문에 좌절됐다”라고 분석했다. 김창엽 교수는 “의료보험 개혁 문제를 대중적으로 공론화해 참여를 이끌어내는 방식보다 의회 상층부 정치권에 비밀리에 의견을 관철하려는 방식을 썼던 것이 패인이다”라고 말한다.

1934년 11월14일 워싱턴 DC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이 보장 제도가 당장 실현되든 나중에 이뤄지든(soon or later on), 미국의 의료 시스템을 발전시킬 제도는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가 미룬 숙제가 70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을 줄은 몰랐다.

세 번째 의료보험 개혁 시도는 1940년대 트루먼 행정부에서 이뤄졌다. 이번에는 AFLCIO로 대변되는 노동조합에서 주도적으로 의료보험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여전히 의사협회의 로비력이 노조를 압도했다. 역사학자 베아트릭스 호프먼의 조사에 따르면, 1948년 이후 미국의사협회는 전 국민 의료보장법안 반대운동 선전에 1억 달러 이상을 썼다. 신문에 반대 광고를 싣고 정치인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맡고 있는 환자에게 편지 쓰기 운동도 벌였다. 이런 의사협회의 선전 탓에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는 ‘사회주의 의료’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 매카시즘이 지나고 냉전 시대가 오면서 전 국민 의료보장제도 논의도 사라졌다.

네 번째 의료보험제도 개혁 논의는 1990년대에 시작됐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가 전 국민 의료보장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했다. 클린턴은 1993년 의료보험 개혁안을 제시하고 설득에 나섰지만, 결국 1994년 의회에서 부결됐다.

왜 클린턴이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많은 논쟁이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저서 <미래를 말하다>에서 클린턴의 실패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개혁안을 너무 늦게 추진했다는 점이다. 정치적 힘이 가장 큰 당선 초기에 개혁을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시간을 끌다가 정치적 동력을 잃어버렸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선거 유세 때 의료제도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제시하지 않았고, 어떤 여론도 형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트루먼·루스벨트·클린턴(맨 왼쪽부터) 등 과거 의료보험 개혁을 추진했던 미국 대통령은 많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출처 : WHITE HOUSE)  
 
오바마, 점진적 개혁 택해

지난 네 차례 실패 사례를 보면 몇 가지 공통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의사협회·제약사 등 이익집단의 로비를 물리쳐야 한다. 미국 의사협회의 로비력은 미국 총기협회(NRA)의 그것과 비견된다. 또한 엘리트 집단을 설득하는 일 못지않게 대중 여론의 지지도 받아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 임기 초반에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오바마의 다섯 번째 개혁 시도는 과거 어느 때보다 유리한 편이다. 김창엽 서울대 교수는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안은 기존 민간 의료보험 시장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공적 보험을 확장하는 형태를 띠고 있어서 과거 개혁안보다 온건하다”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의료보험 체제의 근간을 바꾸는 구조적인 개혁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일단 점진적인 개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론 면에서도 지금이 적기다. 영화 <식코> 이후 의료보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지난 선거 유세 과정에서 의료보험이 이슈가 되면서 인지도도 높아졌다. 다만 최근 여론조사에서 오바마의 의보 개혁을 반대한다는 응답률이 40%를 넘어서는 등 여전히 ‘사회주의 개혁’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은 장애물이다.

오바마는 임기 초반에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안다. 오바마는 8월 이전에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아무리 늦어도 올해를 넘기지는 않겠다고 강조한다. 오바마는 7월23일 연설에서 “상원이 시한을 맞추지 못해도 개의치 않지만 가을에는 법안에 서명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신호철 / <시사IN> 기자

* <시사IN>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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