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선교를 넘어 '예수'의 선교로
'바울'의 선교를 넘어 '예수'의 선교로
  • 윌버트 쉥크
  • 승인 2009.09.3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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쉥크 교수가 말하는 탈기독교국가체제에서 '선교적 교회론' (1)

   
 
  ▲ 윌버트 쉥크 교수. (출처 : 풀러신학교 홈페이지)  
 
윌버트 쉥크(Wilbert R. Shenk)는 미국 풀러신학교의 석좌교수로 선교 역사와 현대 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기독교 윤리를 재구성한 존 하워드 요더의 영향을 받은 쉥크 교수는 바울이 선교의 원형(prototype)이라는 통념을 깨고, 예수가 선교의 원형이 되어야 함을 줄곧 강조해왔다. 당시 정치·사회·문화 속에서 '보냄 받은'(being sent) 선교사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교회도 자신이 보냄 받은 상황 속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강조점이다. 저서로는 <선교의 새로운 영역>(Changing Frontiers of Mission), <Write the Vision>, <The Transfiguration of Mission> 등이 있다. 메노나이트 선교부 책임자, '미국 선교 사학' 회장을 역임했던 그는 선교 이론과 행정, 실천을 겸비한 학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번역자 주)

조직신학자 헨드리쿠스 벌코프(Hendrikus Berkhof)는 "수세기 동안 정적인 개념의 교회관이 지배적이었다"고 천 년이 넘는 교회사를 평가했다. 역사적 기독교국가체제(Christendom)는 교회의 제도적·목양적 성격을 강조했고, 계급적 리더십과 회중 위에 있는 교회의 권위를 강화했다.

신학이 교회의 지성적·목회적 관심에 선점되어 있었기에, 교회가 세상 속에 선교적으로 관계하도록(engagement) 돕지 못했다. 선교를 세상을 향한 의도적인 증거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얻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기독교국가교회 속에서 선교는 교회의 방향성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선교 운동이 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이나 선교회를 통해서 시작되었지만, 교회의 전통적 패턴과 구조는 동요되거나, 도전을 받거나, 변화되지 않았다. 교회가 '선교적 질문'들을 회피함으로써 선교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기 교정'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격리되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16세기 이래로 선교 운동은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오세아니아까지 교회를 확장하는 데 공헌해왔다.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권에 뿌리내릴 수 있었다. 1995년까지 적어도 성경 중 한 권의 책이 2,092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1750년에 60개의 언어로 번역되었던 것에 비교해 볼 때, 이것은 상당한 진전이다.

1800년 이후 기독교 선교는 기독교를 전 세계적인 운동으로 변형시키는 힘으로 작용하면서, 그 확장 범위와 속도가 상당히 넓어지고 빨라졌다. 이러한 기독교의 전 세계적인 발전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지배적인 생각의 습관을 거부하게 했다. 그중 하나가 교회의 본질에 관하여 모든 측면(성경적·신학적·역사적·사회학적·선교학적)에서 재고(再考)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만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런 교정 작업은 지금까지 주목할 만한 공헌을 해왔다. 역사적 기독교국가체제(Christendom)의 정적(static)이고 고립적인(insular) 교회관이 지배적이었던 곳에, 오직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만이 변화하고 있는 문화적 상황에 효과적이며, 역동적으로 관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이 증대되고 있다.

금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교회 모습은 광범위한 언어-문화적 상황의 다양성 속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들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수확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복음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통찰들(insights)과 신선한 관점들, 둘째는 전 세계를 가로질러 신자들이 복음을 경험해온 다양한 과정들, 셋째는 지역 교회들의 선교를 위해 이러한 재구성(reformation)이 지니고 있는 함의들을 인식한 것이다.

성서가 번역되지 못할 언어는 없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긴 하지만, 복음이 신뢰할 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자신의 문화-언어적(cultural-linguistic) 상황에 맞물려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 문화 특유의 어법(idiom)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내가 논의하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교회는 선교(mission)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셨다. 하지만, (2) 4세기에 콘스탄틴적 교회가 세워지면서 선교는 그 빛이 가려졌고 결과적으로 교회는 그 모습이 훼손되었다. 그러나 (3) 진정한 선교의 열매는 그리스도 몸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는 선교 행위가 교회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근대 선교 운동은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결과적으로 비선교적(nonmissionary) 교회 모델을 약화시키는 데 공헌했다. 마지막으로 (4) 어떤 교회가 선교적(missional)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징표는 그 교회의 삶의 질(quality), 곧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될 것이다.

글 · 윌버트 쉥크(풀러신학교 교수) / 번역 · 허현 목사(LA 이음교회)

* 이 글은 <New Wineskins for New Wine : Toward a Post-Christendom Ecclesiology,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29, no. 2> (April 2005)에 실린 글을 저자의 허락을 받아 번역한 것입니다. 앞으로 8차례에 걸쳐 나눠 실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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