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자(流水者)들이 만들어가는 '위험한 교회'
유수자(流水者)들이 만들어가는 '위험한 교회'
  • 김성민
  • 승인 2009.10.19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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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이클 프로스트가 말하는 이머징처치운동의 본질

많은 그리스도인이 점점 전통적인 교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비단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기존 교회를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느낀다.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더 나은 사회로 발전하는 데 가로막고 있는 원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그 수가 적지 않다.

이런 사회적인 반작용은 기독교 신앙의 진정성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 소위 말해 '예수는 좋은데 교회는 싫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현상이 오늘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절대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 다원화된 시대에 복음의 새로운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아야 할 시점이다. 이머징처치(Emerging Church)운동의 본질을 잘 정리한 마이클 프로스트의 <위험한 교회>는 이 고민을 해결할 열쇠를 제시해준다.
 
기독교 왕국(christendom)의 악영향

   
 
  ▲ 마이클 프로스트의 <위험한교회>.  
 
이 책은 기독교 왕국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문제의식을 끌어내고 있다. '기독교 왕국'(크리스텐덤)이라는 용어는 사실 서구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봐야 하지만, 이미 서구화된 한국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국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대표적인 종교로 기독교를 이용하였다. 그 이후 기독교는 권력의 강력한 상징으로 부상했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을 절대시한다. 그래서 사실상 교회와 국가는 서구 세계에서 세상을 향한 절대 권력의 위상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다시 기독교 왕국 시대가 왔다. 국가의 강력한 권력에 교회는 생존하기 위해 국가에 예속되는 길을 택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득권적 권력을 행사하는 동안 교회는 국가를 닮아가고 있었고 그 체질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체스터톤의 말처럼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제국을 위해서는 좋은 것이었으나 교회를 위해서는 나쁜 것'이었다. 교회는 더욱 경직되어갔고, 제도적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교회주의'에 빠졌으며 의식과 다양한 프로그램은 시스템을 위해 봉사하는 시녀가 되었다. 설교 또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공동체적이고 실제적인 가르침보다는 목회적 필요와 교회의 시스템을 지속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가 국가와 같은 권력적 체계와 효율성을 지향하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존재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교회에서 탈출하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다행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유수자란 누구인가

유수자(流水者)는 탈출하는 자다. 고정적 위치에 머물지 않고 유동하는 자다. 저자는 '유수자'에 대한 신학적 분석을 월터 브루그만에게서 가져왔다고 한다. 브루그만은 바벨론으로 유수된 유대인들이 현대의 기독교인들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 시기는 절망적인 공동체의 상황으로 인해 암울한 시기였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는 극한의 시기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들 중 바벨론적 삶에 익숙해져 결국 그곳에 정착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진정한 유수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들은 그곳에 정착하지만 그곳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가진 공동체로 결집한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유수자들이 품고 있던 기억 때문이다. 이 기억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것이었다. 그 기억은 그들의 삶을 독특하게 만들었으며 다시 살아가도록 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대한 기억은 어떤 측면에서는 위험한 것이었다. 기독교 유수자들은 자신들이 품고 있는 기억 중에 가장 위험한 기억을 가진 자들이다. 이 기억은 인간 사회를 위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붙잡고 있었던 약속으로 급진적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유수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면서 세상의 지배적 가치를 극복할 약속을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실행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탐욕과 욕망, 이기심과 불평으로 점철되어 있는 사회에 대한 위험하고 생명력 있는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자신의 이상을 따라 창조적인 삶에 대해 위험한 노래를 부를 것이다.

한국 교회는 급진적인 예수의 이야기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있다. 현대 교회는 시장자본주의에 종속되면서 심각한 변질을 거듭하고 있다. 예수의 성육신 공동체는 스스로 게토화되는 것을 막을 뿐만 아니라 세속화되는 것도 막았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예수가 급진적으로 세속적인 가치를 극복하면서도 세상 속으로 들어간 유수자의 전형적인 모델이자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그를 따르는 유수자들이 공동체를 이룬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연적인 삶의 태도다.

유수자들에게 중요한 삶의 양식

기독교 왕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활발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그 진정한 가치에 대해 말하고 행동해야 할 자들이다. 이런 점에서 유수자들의 삶은 그들의 존재 의미와 선교적 목적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삶의 양식은 그들의 존재 방식이자 선교적 삶, 그 자체다.
   
가장 먼저 유수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종교적 삶의 통합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함께 한 식사는 종교적 식사와 일상적 식사가 어떻게 융합되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예수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셨고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셨다. 식사 후 제자들은 예수의 열정을 다시 회복한다. 예수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여기 오셨는지를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음 때문에 다시 뒤돌아선다.

유수자들은 세상의 두려움과 좌절 그리고 불행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복음을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 담아낸다. 나아가 복음이 섬김과 사랑의 관계, 그리고 선한 행위들을 통해 전달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행동이 말씀을 창조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 길은 공교롭게도 매우 일상적인 삶의 자리를 떠나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일상 가운데서 급진적인 생활양식을 구현함으로써 실행된다. 

그래서 유수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소가 바로 '제3의 장소'다. 제3의 장소는 일상과 영성이 만나는 곳이다.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장소이자, 우정을 개발하고 특정 이슈를 토론하며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곳이다. 그리고 서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함께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노출할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경계심을 늦추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 마음 문도 연다. 그래서 '자주 오는 곳이며, 자발성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선교적 접촉점이 있다. 현대의 교회라는 곳은 모든 모임이나 모든 사역에 참여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럼에도 거기에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없으며 자발성이 없고 자신이 가려져 있다. 그래서 냉랭한 시스템만 유지될 뿐, 선교적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코뮤니타스'로서의 선교적 공동체

저자는 유수자들의 공동체가 가진 이런 선교적 특성을 설명하기 위해 인류학자 빅터 터너의 용어인 '코뮤니타스'를 차용한다. 이 용어는 간단히 말해서 일정한 통과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는 자기들끼리 집약적 친밀감을 소유하고, 서로 평등함에 대해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그것을 실행한다.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 제한된 시기에 가까워지고 공동적 의식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러한 사회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이 공동체는 차별이 없고 평등한 공동체다. 이것은 일종의 새로운 경험을 한 자들이 개척하는 개척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반-일상적 삶이라는 특징도 갖는다. 하지만 '코뮤니타스'는 일상사회를 벗어나 있지 않다. 오히려 자신들이 경험한 이상을 통해 일상을 변혁하려고 한다. 그래서 일상 사회가 갖는 사회 양식과 코뮤니타스는 한 사회 내에 동시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변증법적 상관 관계를 통해 사회는 발전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공동체가 '코뮤니타스'를 많이 닮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경험하고 기억하는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의 안녕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최전선에서 경험한 자극들을 통해 게토를 박차고 나와 예언적이고 야생적인 언어와 삶의 양식을 개발하고 나누며 실천한다. 기존의 교회가 유사 공동체로 머무는 것을 경계하며 공동체를 자극하여 공동체가 원래 목표했던 선교적 목적을 자극하고 회복한다.

유수자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교회의 우선적 관심을 삶의 모든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래서 사회를 향해 위험한 형식의 비판을 실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회가 충분히 관대하지 못하고, 정의를 실천하지 못하며, 환경에 대한 청지기로서 직무를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 전체주의적 정권에 대항하고 인권의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동과 구체적인 선택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불굴의 헌신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혁명적인 헌신을 다짐하는 위험한 사랑의 노래이자 혁명적 삶의 양식이다.

이머징처치운동에 대한 한국 교회의 관심은 현재 대안적 목회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선교적 공동체의 회복은 목회적 방법론이 아니다. 끊임없이 일상을 탈출하면서도 일상을 구출하는 삶의 역설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교회가 더욱 겸손해져야 하고 제자도의 진정성을 공동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 그럴 때 급진적인 복음의 실천이 이 세상을 이롭게 할 것이다.

김성민 목사는 고신대 신학대학원과 서강대 대학원(철학 석사)을 졸업했다. 인문학이 세상과 교회가 소통할 수 있도록 도우며 변혁의 매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복음과상황>에 다양한 책을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다. SFC 간사로 캠퍼스와 연구소 그리고 출판부에서 사역하다가 현재는 미국 유학 중이다.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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