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립문자(不立文字)'…중요한 건 '사랑'이야
'불립문자(不立文字)'…중요한 건 '사랑'이야
  • 김기대
  • 승인 2009.10.20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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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 Reader ]로 본 성서해석학의 원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표준새번역 고린도후서 3장 6절)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표준새번역 로마서 13장 10절)

 

   
 
  ▲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오는 모세. (사진 제공 : 뒤레판화집)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5000년경 이미 문자를 갖고 있었다. 문자를 가진 이들은 인생의 지혜를 담은 격언을 만들어내었고 격언과 교훈은 수메르 종교로 발전했다. 하지만 수메르는 고대 사회의 모순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만다.

상형문자가 발전했던 이집트 문명 역시 문자의 권력은 백성들을 피라미드 건축과 같은 노역으로 이끌었다. 문자는 고급 문명의 상징인데 최초의 문자를 가졌던 이들은 그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자를 지배의 도구로만 썼기 때문이다. 중세까지 라틴어를 쓰던 교회 전통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라틴어는 지배의 도구였다. 이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글을 깨우치거나, 아니면 문자의 권력을 가진 이들(성직자)과 상종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중세 민중들에게는 두 가지를 선택할 자유조차 없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다. 히브리인들과 글자의 첫 만남이 될 뻔했던 사건이다. 그러나 아론을 비롯한 남은 자들의 태도는 아직도 글자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린다. 모세가 돌판을 깨뜨린 진정한 의도는 문자가 가져올 후환 때문이 아니었을까? 쓰인 글은 우리를 속박한다.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말의 전달성에 대한 부정적인 비유이지만, 이미 뱉어진 말은 떠다닐 뿐 우리를 물리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글은 우리를 지배한다. 쓰인 법은 우리를 감옥에 넣을 수도 있으며 우리 자신은 쓰인 것(신분증, 졸업장, 자격증 등등)에 의해서만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 받는다. 모세는 황금 송아지를 놓고 축제를 벌이는 제 백성들이 밉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글자로 쓰인 돌판)으로 백성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싶지는 않았다. 글의 지배성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쓰인 글이 없어도 그들을 심판할 수 있었다. 결국 모세는 글에 굴복한다(두 번째 돌판). 율법 시대의 시작이었다. 글의 지배력을 확보한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 

셈족 종교 중 하나로 히브리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은 문자의 지배력을 기가 막히게 해석해내었다.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트는 문맹자다. 이슬람교는 그의 문맹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호메트의 문맹은 문자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호메트는 글에 예속되지 않는, 즉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대신 그를 제외한 모든 무슬림들은 글자에 예속되어야 한다. 해석학적 여유로움이 없는 코란의 절대성, 글의 지배력에 대한 가장 좋은 예이다. 그런 점에서 마호메트는 역설적으로 글을 몰랐기 때문에 모세보다 높은 종교적 위상을 확보한다. 

'쓰인 글'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또 읽는다는 행위는 또 무엇인가.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를 보자.

홍역 때문에 길에서 아파하던 마이클을 전차 검표원 한나가 도와줌으로써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아직 사랑이 뭔지 몰랐던 10대 소년에게 한나는 다정한 여자였다. 엄격함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독일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한나는 같은 독일인이어도 뭔가 다른 다정한 여자였다. 한참 누나뻘인 한나는 아는 사람도, 가족도 없다. 그녀에게 마이클의 등장은 역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 홍역 때문에 길에서 아파하던 마이클을 전차 검표원 한나가 도와줌으로써 이 둘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만남은 둘을 격정적인 사랑으로 이끈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자기와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성에 눈뜰 나이인 마이클은 그냥 어른인 한나의 교육법 정도로 생각하고 그녀를 위해(아니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위해) 책을 열심히 읽어 준다. 

둘 사이에는 사랑 같은 것이 싹트지만 어느 날 한나는 예고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한나의 성실함이 검표원에서 사무직으로 승진의 기회를 주었지만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그녀는 사무직을 맡을 수 없어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났던 것이다.

8년 뒤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다가 피고석에 있던 한나를 보게 된다. 한나는 여기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백함으로써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과중한 형을 받는다. 문맹인 한나는 그 사실이 알려지느니 무기징역을 택한 것이다.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제야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지만 10대의 기억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는 가정생활에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한나에 대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마이클은  책을 직접 읽어 녹음한 후 수감 중인 한나에게 보낸다. 전혀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한나는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그녀만의 방법으로 글을 깨우쳐 나간다. 한나가 출감할 때쯤 둘은 수십 년 만에 조우한다. 그러나 마이클이 그녀의 석방 일에 감옥에 갔을 때 한나가 자살로 생애를 마쳤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듣는다.

독일처럼 지적 풍토가 강한 사회에서 이 여인이 어떤 이유에서 글을 읽지 못하게 되었을까?  또는 글을 읽는다는 것이 그녀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그녀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글을 아는 이들의 위선도 알았기에 마치 어릴 때 경험했던 작은 공포가 평생 지속되는 경우처럼  글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 마이클을 글을 읽을 줄 모르는 한나를 위해 열심히 책을 읽어 준다.  
 

칸트, 헤겔 등 수많은 철학자들을 낳은 곳이 독일이다. 우리는 독일 철학을 관념철학이라고 부른다. 철학 자체가 관념이겠지만 프랑스 철학자들은 실천의 현장을 외면하는 독일 철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독일의 화려한 철학은 히틀러를 막지 못했다. 철학자 하이데거의  친나치 경력이 알려진 것처럼 독일의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 나아가 글을 생산해 내는 이들은 모두 히틀러의 잠재적 부역자이다. 비트겐슈타인이 관념을 벗어나 분석으로 문제를 풀려 했기에 그나마 반나치 운동을 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글을 읽을 줄 알았던 다른 부역자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간수였던 한나를  유대인 수용자들의 집단 살해 주범으로 지목한다. 명령은 글로 쓰인 문서로부터 나오는 것인데 글을 읽을 줄 모르던 '무식한' 그녀는 글을 읽을 줄 알던 이들이 시키는 대로 한 죄밖에 없었는데 오히려 문맹은 그녀의 위치를 명령권자로 바꾸어 놓았다. 글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는 그녀는 모든 비문맹자들의 증언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녀는 글을 모르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자신이 시킨 일이라고 자백한다. 그런 그녀에게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거짓말과 같은 개념으로 다가온다. 

지식인들이 막지 못한 만행을 글도 못 읽는 여인이 막을 수 없다. 오랫동안 들음(명령)에 익숙했던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전쟁의 만행은 읽을 수 있는 자들이 일으켜 놓고 그 하수인이 되었다고 그녀에게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다.

최근에 <양철북>의 저자 귄터 그라스는 자신의 나치 친위부대 전력에 대한 비판에 대해 “자신은 먹고 살기 위해 들어갔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마이클의 법정 참관수업의 담당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나치의 만행을 비판하고 있지만 2차 대전 당시에는 히틀러에 대해 침묵한 잠재적 부역자였을 것이다. 글을 읽는 것뿐 아니라 글을 생산해낼 정도의 지식인들이 이럴진대 우리는 한나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것과 같다. 

한나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의 만행을 어릴 때부터 많이 보아 왔을 것이다.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은 그녀에게 돌을 던지며 바보라고 놀렸을 것이고 꿈으로 가득 차 있을 시절에는 문맹 때문에 사랑하는 이로부터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 

 

   
 
  ▲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는 우리로 '쓰인 글'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읽는다는 행위는 또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도대체 글이 무엇이기에 그녀의 인생을 이토록 지난하게 만드는가? 그녀의 글에 대한 두려움은 가중된다. 그래서 그녀는 읽을 줄 아는 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지적인 욕구는 있으므로 읽을 줄 알되 아직 그것을 권력으로 삼지 않는 아이들로부터 책의 정보를 얻는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관리인일 때도 유대인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해서 책의 내용을 들었다. 새롭게 책 읽어주는 사람을 만났는데 마이클이었다. 그는 10대였기 때문에 문자의 권력을 갖지 않았고, 아픈 병자였기에 남성의 권력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또한 자신보다 어렸기에 사랑을 주도하려 하지 않았다.

영화는 독일작가 게른하르트 슐링크의 동명 소설을 영화한 것이다. 영어의 'reader'에 해당하는 독일어 'Vorleser'는 남성형 명사다. 그러기에 남성 정관사 Der가 붙는다. 그러므로 영화(책)의 제목은 책을 읽어주던 주인공이 남자였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은 남성의 역할이며, 그것은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붙여진 제목이다.

영어 <The Reader>가 그냥 '책 읽어주는 사람'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비해 우리말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어의 뉘앙스를 훨씬 정확하게 살렸다. 여성에 대한 교육권과 참정권이 남성들에 비해 훨씬 뒤에 이루어진 일임을 생각한다면 책의 제목이 가진 '남성 중심, 권력'의 이미지는 과장이 아니다.  

이제 권력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그래서 한나는 어른이 된 마이클을 계속 꼬마라고 부른다) 마이클이 보내준 테이프로 글을 배우게 된 한나는 마이클에게 편지를 쓸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어떤 제도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문자를 깨우쳤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  석방일은 가까워오고 아무 연고자도 없던 한나에게 마이클이 찾아온다. 마이클은 그녀에 대한 모든 사랑의 감정은 숨긴 채 문자의 권력을 가진 '먹물'로 그녀의 과거를 질책한다. 

문자가 권력이 아니라 사랑의 수단이 될 수 있었다고 처음 믿었던 한나, 그래서 그 문자로 사랑의 편지를 나누었던 한나, 그래서 이제 문자 공포증을 벗어나려던 한나에게 대뜸 마이클은 다른 문자의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이 말하고 행동한다. 한나는 생각한다. 문자의 권력을 가진 이들은 다 똑같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그녀는 죽음을 택한다.  그것도 책을 디딤돌 삼아.

한나는 적은 돈이지만 유대인 피해자에게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글을 몰랐던 한나를 죄인으로 지목했던 유대인 생존자 소녀는 성장해서 그 내용을 책으로 써(글로 만들어서) 유명 작가가 되어 있었다.

한나의 유언과 함께 마이클은 볼품없는 상자에 담긴 돈을 생존자에게 건넨다. 유대인 여인은 돈은 받지 않고 조그만 상자만 받는다. 그녀 역시 수용소에 있을 때 이러한 조그만 상자를 소중히 여겼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상자는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는 기호일 뿐이다.

 

   
 
  ▲ 문맹인 한나는 그 사실이 알려지느니 차라리 무기징역을 택한 것이다.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제야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문자도 기호일 뿐이다. 한낱 깡통과 같은 기호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였는가? 유대인 작가는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정말 중요한 건 사랑인데 말이다. 일찍이 선불교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모든 진리 과정에서 문자가 갖는 위치를 무시해버렸다.

영화는 글자로 쓰인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석학적 암시를 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오직 말씀으로'라고 외쳤지 '오직 문자로'라고 말하지 않았다. 루터는 일부 성경을 지푸라기라고 부르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몽주의적 근대(글의 지배력이 가장 왕성한 시대)의 공격 앞에 성서는 자기를 지켜야 했다. 이 과정에서 생긴 잘못된 방어벽이 성서문자주의다. 문자 무오설로 근대의 공격을 막아내며 마침 교황 무오설을 근대의 방어벽으로 내세운 가톨릭과 경쟁해야 했다. 결국 문자주의는 성경의 권위를 죽음의 권위주의로 바꾸어버렸다(다니엘 밀리오리).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 성서비평학은 성서를 경건한 소설로 축소시키거나 성서를 과거에 가두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성서비평론자들에게는 모욕적일지 몰라도 문자주의와 성서비평학은 그런 점에서 이란성 쌍생아다.

포스트모던 시대와 함께 부르주아 개인주의 편협함에 기초한 성서 읽기가 시작되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Q.T(Quiet Time)라고 부른다. 자신의 개별적 상황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편화시켜버리는 이 어이없는 해석학 앞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구를 위하여 읽을 것인가도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성경 읽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나의 부르주아적 만족을 위해서 읽으며 누구에게도 읽어주지 않는 읽기는 의미가 없다. 이것은 자신만 살고 남은 죽어도 괜찮다는 식의 성서읽기에 다름 아니다.

내가 봉사하려고 하는 계급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읽어주면서 계급적으로 읽어준다는 착각도 이제는 버려야 한다. 읽어준 것을 듣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보다는 내 권위 앞에 굴복하기를 원하는 목회자들처럼 읽는 것도 참 읽기는 아니다. 

성서해석학의 기본은 '사랑'이다. 조직신학자 다니엘 밀리오리는 "성서해석의 필수적인 맥락은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이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 사랑, 소망의 삶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다.

알랭 바디유는 '쓰인 법'(율법)에는 구원이 없다는 바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사랑은 율법(모든 쓰인 것)의 완성이기에(로마서 13:10), 읽은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믿은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로마서 10:8).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입과 마음에 가까이 있으므로(다시 말해 읽는 눈에 있지 않으므로 신명기 30:14)

구원은 철저하게 탈문자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바디유의 주장이다. 마이클은 문자로 된 모든 굴레(계몽주의적 옳고 그름, 인간 이성의 한계)로 고민하다가 결국 한나를 죽이고 만다. 그는 마지막에 가서야 유대인 작가 앞에서 한나를 사랑했었다고 고백한다.

성서는 누구에게 독점될 수 없으며 독점자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용될 수 없다. 성서의 세계관에서 소외되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성서는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성서의 살아 있는 권위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읽어주는 것 또는 들려주는 것을 통하여 일어나는 소통이 될 때 참 읽기가 된다.

쓰인 법을 선포하는 모세의 얼굴에도 광채가 났는데 영을 선포하는 데에는 더욱 더 영광이 넘치지 않겠느냐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묻는다(고린도후서 3:7-8).

죽임의 읽어주기를 할 것인가? 살림의 읽어주기를 할 것인가? 이 어리석은 질문에 답을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김기대 목사 / LA 평화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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