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구역 혹은 강제 지정 거주 지역
보호구역 혹은 강제 지정 거주 지역
  • 임태일
  • 승인 2009.10.23 2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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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와 기의를 운용하는 묘에 할당된 과제야말로 선교의 시작이 아닐까
호피 마을 사람들. (사진 제공 임태일)

호피 인디언 레저베이션(Hopi Indian Reservation). 이를 두고 우리말로 옮길 때 '호피 인디언 보호구역'이라 한다. 사전적 의미로 'Reservation'은 'U,C 금렵지, (특히 사냥용 새·짐승의) 사육지; 인디언 보호 거주지, 군사 용지'라 명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보호구역'이란 번역은 옳지 않다. 그것을 두고 어찌 '보호구역'이라 번역할 수 있느냐며 의문을 던지는 것은 이미 식상할 정도다. 호피 인디언 마을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사로서, 사전적 의미를 부여하고 최초로 우리말로 옮겼던 사람들에게 유감이 있다.  

우리 호피 마을 사람들에게 종종 듣게 되는 얘기에 따르면, 비단 수 십 년 전만 해도 이곳 호피 마을에서 가까운 도시 윈슬로우(Winslow)나 플랙스탭(Flagstaff)에 두 명 이상의 인디언들이 모여 다니면 총에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법으로까지 명시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확인할 길은 없지만, 그만큼 호피 사람들의 인권이 철저히 유린당했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는 거주 지역을 설정한 이유가 그 제한된 곳에서만 살도록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강제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이곳은 보호구역이 아니다. 이곳의 시작은 짐승 우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곳은 지정된 거주 지역이며, 그것도 '강제로' 지정된 거주 지역, 곧 'Reservation'을 옳게 번역한다면 '강제 지정 거주 지역'이라 해야 할 것이다.  

기실, 미국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을 뭐라 불러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다. 'Indian', 'Native American' 'Indigenous people' 등등의 용어가 있긴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딱히 부를 만 한 명칭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호피 마을 사람들조차도 스스로를 부를 때, 때로는 '인디언'이라고도 하고, '네이티브 어메리칸'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미국에 살고 있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다른 미국인들, 곧 백인이나 흑인 그리고 그 밖의 이주민들과 구별해서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Indian'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그 명칭의 탄생과 유래 그리고 'American'이란 명칭이 탄생했던 우스꽝스러운 역사의 유래를 볼 때에 이런 용어는 사실 적절한 용어는 아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 이제는 크게 거부하지 않는다는 현실 외에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 목사인 나는 그들을 부를 때에 그저 'Hopi'라고 하거나 또는 'Hopi people'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옳은 호칭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선교팀에게 호피 사람들을 부를 때는 다른 표현 보다는 호피라 하거나 혹은 각자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요청한다. 유럽 이주민들에 의해 생겨난 억지스런 명칭보다는 오래 전부터 다른 원주민들과 구분되어 스스로를 불렀던 그 고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훨씬 정겹고 아름다운 일인 까닭이다.  

한편 이보다 더 중요하고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한국인들끼리 얘기할 때다. 선교팀 대부분은 호피 사람들을 일컬어 '이 사람들'이라고 하는 경우가 보편적인데,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감'에 따라서 그다지 존중하는 표현이 아닐 수 있다. 글로 표현 할 때와 말로 표현할 때는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가끔 호피 사람들을 두고 말할 때, '얘네들'이란 표현을 왕왕 듣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언어의 습관에서 비롯된 실수(?)였을 것인데, 곧 '얘네들은 뭐 하면서 사나요?' '얘네들한테 필요한 게 뭔가요?'라는 식의 표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절대로 삼가야 할 표현이다. 우리가 그들을 두고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그들을 대상화하는 것이며, 타자로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굳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준다. 언어는 개체 존재가 살아가는 근거이며 방식인 까닭이다. 한국인들끼리 얘기할 때, 나는 제안하기로 가급적 그리고 의도적으로 '이분들'이란 표현을 써 달라고 정중히 요청한다. 다시 말하면 글로 쓰는 것과 말로 표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호칭에 대한 이런 고민과 더불어 2005년에 출판된 반가운 번역서를 하나 발견했다. 곧 <나의 삶, 끝나지 않은 선댄스>(레너드 펠티어 지음/ 문선유 옮김/ 돌베개)가 그것인데,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침없이 유려한 문체로 번역해 내려갔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는 단순한 번역 서적이 아니라 번역자가 미국 원주민의 삶과 역사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었는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번역자에게 있어서 이 책은 미국 원주민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열린 창문이었던가 보다.  

사실 미국에 처음 왔던 작년 초에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원서인 <Prison Writings : My Life is My Sun Dance>(Leonard Peltier / St. Martin's Griffin/ New York) 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책이 아니었음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참고 문헌들을 꼼꼼히 찾아 읽어야 했던 것은 미국 원주민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깊지 못했던 까닭인데, 원서를 읽었던 작년의 느낌과 번역서를 읽은 지난달의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은 번역자의 탁월한 번역 능력뿐만 아니라, 이 책과 깊이 공감하며 아프게 읽고 옮겼을 번역자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이 책에서 번역자는 Reservation을 '지정 거주 지역'이라 옮기고 있다. 호피 마을에 살고 있는 목사로서 이 작은(?) 배려에 심심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명목상 한국으로부터 ‘선교사’로 미국 땅에 왔으나 나는 선교사라는 호칭에 익숙하지 않다. 얼마 전 얘기를 나누었던 이웃 교회 교인인 투찌(Tootsie) 아저씨가 내게 “임 목사님, 선교사로 여기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시고, 목사로 있다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지금껏 다녀갔던 수없이 많은 선교사들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잘잘한 부분에서부터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도 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언어의 습관은 어떠할 것인가.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를 운용하는 묘에 할당된 과제야말로 선교의 시작이 아닐까.

임태일 목사 / 호피 강제 지정 거주 지역 First Mesa Church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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