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서광선
  • 승인 2009.02.0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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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새해에는 자발적 가난을 실천하는 우리가 됩시다

꼭 2년 만에 다시 새길교회 초청을 받고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반가운 분들 만나게 되어 참 좋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아침 정대현 교수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에 오는 데 같은 일산에 사시니까 차편을 주시기로 한 것을 확인하는 전화인줄 알았습니다. 그건 그렇고, "선생님, 내일 하실 설교 제목을 보았더니, 2년 전 우리 교회에서 했던 설교 제목과 꼭 같은데요. 제목만 같고 내용이 다르면 이제라도 제목을 새로 달면 어떨까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2년 전 오래간만에 새길교회에 와서 설교한 기억은 나는데, 신정하고 구정 사이에 온 기억도 없거니와, 같은 제목으로 설교한 기억이 없다고 자백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제 파일을 찾아 봤더니 2007년 2월 4일, '5복과 8복: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제목으로 설교한 것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읽어 봤더니, 오늘 또 되풀이해도 괜찮겠다 싶은 설교였습니다. 자고로 목사님들이 같은 교회에서 같은 계절에는 한번 했던 설교를 되풀이 합니다. 정대현 교수님도 그렇고 저도 목사 아들이어서 목사 아버지가 번번이 같은 설교 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제가 처음으로 구상했던 오늘의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정대현 교수님의 전화를 놓고, 토요일 아침에 배달 된 <한겨레> 신문을 보니 천주교의 박기호라는 이름의 신부님이 쓰신 칼럼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새해 가난합시다.' 오늘 제가 하려고 마음먹었던 설교 제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새해 벽두부터 "새해 가난합시다", "가난해 집시다" 하고 말하기가 좀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 대란이다, 공황이다, 파산이다, 실직이다, 온 나라와 세계가 떠들썩한 판에 불안에 떨고 있는 교인들에게 희망의 소리는 전하지 못할망정, 목사가 감히 불길한 소리하기가 안쓰러워 피했던 것뿐입니다.

'새해 부자 되세요'와 '새해 가난합시다'

▲ 작년까지만 해도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가난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새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었는데, 올해는 제가 과문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이 인사는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세계 경제 상황이나, 우리나라 정부의 경제팀으로는 부자 되는 희망사항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현실감각에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경제적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의 경제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성찰해야 할 것 같아, 종교와 경제, 혹은 '기독교와 경제' 문제를 제시하고 함께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먼저 우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경제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우리 아이들처럼 따뜻하고 시설이 완벽한 병원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추운 마구간에서 말구유 위에 하나님의 아들로 성육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왕의 학살을 피해 멀리 애굽 땅으로 피난길을 떠난 피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수 아버지 밑에서 목수 일을 하며 성장한 노동자 기술자였습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성경 말씀, 예수님이 선교 일선에 나서기 전 중동 지역 광야로 나가서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며 준비하는 동안,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모두가 다 인간의 욕심, 탐욕, 욕망 혹은 복에 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 유혹, 혹은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첫 번째 시험은 경제적 문제였습니다. 40일 동안 하신 금식으로 허기진 예수님에게 마귀는 "여기 널려 있는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먹어라"(눅4:3)고 유혹했습니다. 이 시험을 물리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눅4:4)"였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정치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이 땅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모두 주겠다(4:6,7)"는 마귀의 아주 매력 있는 유혹을 물리칩니다. 세 번째 시험은 종교적 시험이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는 "뛰어 내리라, 천사들이 와서 당신을 보호할 테니까, 절대로 다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마술사처럼 종교적인 기적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의 종교적 권위를 보여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경제적인 탐욕, 정치적인 권력욕, 종교적인 기사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모두 경제적인 축복이고, 부귀영화의 복인데, 예수님은 이 모두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가난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적 권력, 왕 중의 왕이라고 하는 정치적 권좌에 앉아서 천하를 호령하는 정치적 권력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상천외의 쇼를 해서 사람들을 믿게 하고 모여 들게 하는 종교적 연예인이 되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오늘 아침 교독문을 함께 읽었습니다만, 예수님의 삶이 가난했을 뿐 아니라 마태복음 5장과 누가복음 6장에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축복하고 부자들을 저주했습니다. 제자들에게 가난하게 살라고 당부하시기도 했지만,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 보다 더 어렵다는 과장의 말씀을 하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거지 나사로를 먹여 살린 부자 영감은 지옥에 보내면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앉아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 없는 한국 예수 교회

▲ 한완상 박사가 쓴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한완상 박사님이 최근 출판한 책 <예수 없는 한국의 예수 교회>가 교회 안과 밖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차일피일 하다가 아직 읽지 못했지만, 오늘의 한국 교회는 가난한 예수님을 쫓아내고, 부자 예수님을 모시고, 그 자리에 맘몬, 부자 되는 축복을 내리는 마귀와 돈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형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난한 예수님을 한국 교회에서 쫓아내면서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 우리 사회의 사회적 약자들, 노숙자들, 실직자들, 장애자들, 이주 노동자들, 모두 함께 쫓아내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에 밀착하여 세도를 부리는 교회가 되었고, 종교적 이벤트로 종교적 쇼에 전념하는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대형교회, 교회의 대형화를 축복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두 번째 말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6:24)."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닌 재물을 섬기는 것은 십계명을 어기고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마귀의 유혹대로 재물을 우상으로 받들고, 정치권력에 욕심을 내고 불의한 권력에 맹종하면서 종교적 쇼를 연출하는 한국 교회에 대해서 오늘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강조하는 가장 보수적이고 정통이라고 자랑하는 한국 교회는 왜 이 말씀을 듣지 않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자본주의의 정신 : 청빈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을 16세기 개혁 교회와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뱅의 청교도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발상이 기독교 개신교의 청교도 정신에 있다는, 얼핏 보기에 역설이고 모순적으로 느껴집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의 금욕주의는 자본을 생산하고 부를 창출한다는 논리입니다. 칼뱅이 제창한 개신교는 중세기 천주교의 가르침을 '세속화'한 것입니다. 천주교의 금욕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예수님의 금욕주의를 생활로 이어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 예수님의 종교는 인간의 물질적 탐욕을 무한대로 추구하는 자본주의와는 반대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칼뱅의 청교도 사상이 근대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묻게 됩니다. 근검절약, 물건을 아껴 쓰고, 열심히 노동하고, 주색잡기, 그야말로 술·담배 물리치고 도박하지 말고 깨끗하게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일하고 살다 보면, 결국 땅을 사게 되고 은행에 돈을 쌓아 둘 수 있게 된다. 가난하게 열심히 살다 보면 부자가 된다는 역설 아닌 역설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구원의 예정을 받은 사람이라야 그렇게 된다는 것이 칼뱅의 '예정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누가 구원의 예정을 받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난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서 부자가 된 것이 틀림없으니까, 결국 부자가 구원의 예정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금욕주의와 예정론은 이렇게 자본주의의 기초가 된 셈입니다. 구원의 예정은 금욕 생활을 하는 사람의 몫이라는 말인데,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깨끗한 삶은 살지도 않고 오히려 방탕하고 열심히 일하지도 않으면서, 교회에 나와서는 부자 되는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기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금욕과 가난이 그리스도인들이 축복 받는 전제 조건이고 필수 조건인데, 그것은 마다하고 부자 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맘몬이라고 하는 마귀에게 하는 기도임에 틀림없습니다.

경제 의식의 대전환 : 회개

고전적 자유주의 시장 자본주의를 제창한 18세기 영국의 아담 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이전에 철학자이며 신학자였습니다. 그의 자본주의 경제 이론 뒤에는 기독교적 인간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자기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탐욕과 무한대의 욕심이라는 것이고 그 탐욕이 바로 시장을 움직이게 하고,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잡아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탐욕의 죄는 기독교 개혁 교회가 주창한 인간관, 인간 개인은 개인으로 하나님과 직접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변질한데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세기적이며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는 참된 예수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경제 의식, 경제에 대한 생각, 돈과 축복과 가난에 대한 태도에 대대적인 전환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말하는 회개, 예수님께서 촉구하시는 회개는 의식의 전환이고 대안을 찾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 하나만, 우리 집만은 잘 살아야 하겠다는 이기주의적 물질적 탐욕을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경제 문제는 나 하나 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문제 우리 이웃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 마귀에게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님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가난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제생활을 따르는 것입니다. 스리랑카의 천주교 신학자이며 신부인 피어리스 교수는 가난을 '자발적 빈곤'과 '강제적 빈곤'으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우리는 60년대와 70년대를 살면서 강제적 빈곤으로부터 해방되기를 원했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이에는 강제적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많은 사람이 강제로 가난해 질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우리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버려야 하겠습니다. 이들에게 강요되는 빈곤이 최소화 되는 정책을 쓰도록 촉구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공교육의 지원, 빈곤층에 대한 의료 혜택, 감세와 빈민 주택 정책 등으로 가능하다고 많은 경제학자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유종일, <위기의 경제>, 2008년]

우리는 가난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난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자발적 가난'은 그래서 '아름다운 가난'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인간이 가난해 져야만, 우리의 자연, 생태계와 우리와 함께 생명을 이어가는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난해 지지 않으면 온 우주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특히 우리 새길교회의 대부분 교우들, '강부자'로 지탄받는 우리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성 프란시스코가 선택한 가난이고, 마더 테레사가 선택한 가난, 천주교 신부들과 수녀님들이 선택한 가난, 청교도들이 선택한 가난이고, 예수님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선택한 '자발적 가난', 이웃을 위한 가난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종부세'와 '보유세', '상속세'등을 감세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히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자들은 오늘날, 우리의 경제 위기에 감세를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부자들의 상속세를 감세하거나 없애겠다고 할 때, 몇몇 부자들이 이에 반대하고 계속 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여성 생태 신학자의 한사람인 샐리 맥페그 교수는 세계 50억의 가난한 사람이 인간답게 살게 되기 위해서는 10억의 서구 부자 나라 사람이 가난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멕페그 교수는 말하기를,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고, 나라는 무제한 성장을 지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간 복지 정책, 인간 안보 경제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샐리 막페그, <풍성한 생명>, 장윤재 등 역)

어제 아침 신문의 박기호 신부님의 글은 이렇게 마감하고 있습니다. "경제라는 이름의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돈에 대한 신봉을 버리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하고 소유욕에서 벗어나면 거기 삶의 풍요와 기품이 있다. 지난 10년의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의 성과를 결실 맺음에 사회 통합과 동아시아의 평화가 있고 진정한 위기의 해법이 있다. 독자 여러분, 새해 가난합시다." (<한겨레>, 2009년 1월 17일 여론 란)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 믿음의 새길,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여러분, 새해 가난의 복 받으시기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서광선 /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 기사는 서광선 교수가 2009년 1월 18일 평신도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에서 설교한 내용 전문입니다. 새길교회는 담임목사가 설교하지 않고, 평신도가 한주씩 돌아가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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