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 있는 동네'
'산 위에 있는 동네'
  • 최태선
  • 승인 2009.11.23 1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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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사람들⑪…가난한 시대를 사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

“내가 배가 고플 때 당신은 인도주의 단체를 만들어 내 배고픔에 대해 토론해 주었소. 정말 고맙소.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당신은 조용히 교회 안으로 들어가 내 석방을 위해 기도해 주었소. 정말 잘한 일이오.

내가 몸에 걸칠 옷 하나 없을 때 당신은 마음속으로 내 외모에 대해 도덕적인 논쟁을 벌였소. 그래서 내 옷차림이 달라진 게 뭐요? 내가 병들었을 때 당신은 무릎 꿇고 앉아 신에게 당신과 당신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소.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했소. 내가 집이 없을 때 당신은 사랑으로 가득한 신의 집에 머물라고 내게 충고를 했소. 난 당신이 날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길 원했소.

내가 외로웠을 때 당신은 날 위해 기도하려고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을 떠났소? 왜 내 곁에 있어주지 않았소?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하나님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하지만 난 아직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 받고 있소.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뉴욕 맨해튼의 어느 홈리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류시화 씨의 책에 수록된 글입니다. 글쓴이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여유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섭섭한 마음과 현실에 대한 어려움이 컸으리라 짐작이 됩니다. 글쓴이의 심정을 깊이 공감합니다.

현실의 벽은 언제나 넘을 수 없을 만큼 높고, 사람들은 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냉담합니다. 글쓴이 같은 사람들과 마주칠 기회가 없는 사람(부유하기 때문에)이나 무관심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사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글쓴이 같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아무런 미련도 남기지 않습니다.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사람들입니다. 기꺼이 자신의 가진 것 일부를 내놓을 의도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용의도 있습니다. 또 글의 내용에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난의 문제는 항상 있어 왔고 또 늘 그 해결이 쉽지 않았습니다. 아니 언제나 불가능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덮어두었습니다. 전혀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봉책이거나 늘 피상적이었습니다. 가난이 존재하는 이유가 실상은 나라님 같은 분들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가난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이유를 발견한 사람들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항상 너무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가난은 늘 인류와 함께 있었고 항상 한 옆으로 팽개쳐져 있었습니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49-51)

무심코 지나치는 마리아의 찬가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높은 자들을 낮추시고 낮은 자들을 높이시고,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도 하나님은 세상을 평등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성경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실현된 곳이 바로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회입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 (행 4:32-35)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사람들(초대 교회의 성도들) 중에는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기꺼이 가난해지기로 결심했을 때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난한 이 없는 사회가 이 땅에 구현된 것입니다.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가난을 복음이 마침내 해결한 것입니다. 모든 이를 평탄케 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마침내 그들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핍절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마침내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는 '산 위에 있는 동네'로(마5:14) 등장한 것입니다.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게 된 그 모습은 결코 이상이 아닙니다. 밤하늘의 달처럼 별처럼 절대로 딸 수 없는 동요 속에서나 가능한 그림의 떡이 아닙니다. 종말이 곧 다가올 것이라는 큰 위기감 속에서 이루어진 일회적 해프닝이 결단코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공동체나 사회도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람들도 있었고 그만도 못한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주 예수의 부활을 믿고 큰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 은혜에 제대로 반응한 결과물입니다. 그 말은 우리도 주 예수의 부활을 믿고 큰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에게도 그들과 같은 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그 비슷한 그림자라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거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청지기'로 바르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청지기'란 자신의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믿음을 표현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그 고백대로 자신이 '청지기'임을 믿고 있다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인이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고백은 입술만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위력을 잃고 가난은 변함없이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위에 소개한 글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신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 하지만 난 아직 배가 고프고, 외롭고, 춥고, 아직도 고통 받고 있소. 당신은 그걸 알고 있소?" 글쓴이의 마지막 질문이 송곳처럼 가슴을 찌릅니다.

"그런 '가난'의 광경들을 둘러보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조직가들을 돕는 것, 구제를 위해 당신이 소유한 것을 주는 것, 당신 자신이 자발적 가난의 생활을 서약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과 그들의 고통 역시 나누어야 한다"고 한 도로시데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모두가 나라님이 되려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도 은혜를 받아 복음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녀가 참 고맙습니다. 그녀 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고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 말씀대로 배고프고, 외롭고, 춥고 고통 받는 사람들은 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 백성 공동체는 초기 기독교 시기에 그랬듯이 빛이요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이 시대라면 경쟁에서 패하고 가능성마저 상실한 사람들이 쌓여간다면 그 빛은 더욱 밝게 빛나 어두운 이 세상에 희망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당신은 매우 경건하고 하나님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소"라는 이 뼈아픈 비아냥거림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도 교회가 많고, 그렇게도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핍절한 사람이 없는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그 빛과 희망은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 것일까요? 또 다시 겨울 추위가 몰려옵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습니다.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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