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로부터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
인디언들로부터 기독교가 배워야 할 것
  • 권성권
  • 승인 2009.11.30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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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를 읽고

민주주의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다. 그 나라와 사회의 힘과 추진력이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뜻한다. 예전에는 총과 칼에 좌우되었지만 지금은 백성들의 여론이 크게 부각되는 이유도 그 같은 흐름에서다. 그렇지만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의 힘과 추진력은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다.

이는 미국도 마찬가지요, 미국을 추앙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서로가 대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것은 선거철에만 존재할 뿐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오직 위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이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와 사회는 물론이요, 종교 부분에서도 예외이지 않다.

이런 상황에 인디언들이 추구한 참된 민주주의를 엿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박홍규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홍성사)가 그것이다. 이는 서양식 우월주의 관점에서 바라본 인디언들의 미개 문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문명이야말로 참된 민주주의의 실체였음을 보고하고 있다. 미국이 인디언들을 살육하고 추방시켰지만 오히려 그들의 법을 수용한 예를 통해서, 인디언들의 아나키 민주주의를 재평가하고 재창조해야 할 때임을 역설하고 있다.

   
 
  ▲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박홍규 지음, 홍성사 펴냄.  
 
누가 인디언 역사를 왜곡시켰나?
 
서부영화를 보면 언제나 미국 카우보이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그에 반해 인디언 족속들은 미개인들로 죽어 없어져야 할 사람들이었다. 인디언들은 어떠한 법도 문맹도 없고, 단지 살육과 전쟁에만 밝은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카우보이들은 당연히 그들을 퇴치하고 추방시켜야 할 정의의 사도들이었다.

이 책은 그것이 꾸며 낸 허구일 뿐 인디언들의 진정한 면은 다르다고 한다. 이른바 그들이 전쟁을 좋아한 족속으로 비친 이유는 생존과 부족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전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 내부의 법률을 이끄는 수장 역시 재판관이 아니라 중재자일 뿐, 어떠한 권력을 탐하는 순간 모든 지도권을 박탈당했던 게 그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그들이 느려 터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게으름뱅이였기 때문이 아니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듯 더 많이 쌓고 더 많이 채워 놓지 않는다고 한다. 경쟁하거나 인권을 짓밟는 행위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들은 있는 만큼의 자급자족에 그저 감사하며 살 뿐이라고 한다.

"문명사회란 권력과 부에 제한이 없는 것이고, 원시사회란 그것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권력과 부가 무한해서는 안 되고 적절히 제한할 필요가 있다면 그것은 문명사회가 아니라 원시사회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문명사회란 비판되어야 하고, 따라서 그것과 다른 원시 사회를 우리의 새로운 이상 사회로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78쪽)

그런데도 그들의 역사는 왜 왜곡되었을까? 콜럼버스의 신대륙 개발을 정당화하기 위한 차원에서다. 지리상의 발견이라는 것도, 르네상스라는 것도, 종교개혁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도, 실은 인디언들을 향한 미국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차원이라는 점이다. 한국인들의 문맹률을 높이고 경제 번영을 주도하길 원한다는 일제의 침략과 다를 바 없는 행위였던 것이다.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흔히 '아나키'란 무정부주의를 일컫는다. 정부란 법률이 정한 테두리에서 한 나라의 체제를 이끄는 섬김의 주체다. 법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지만 권력을 등에 업은 정부가 무고한 백성들을 옥죄는 현실로 나타나는 게 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면이기도 하다.

인디언들의 아나키 민주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인디언들의 법은 온전히 그 나라 백성들의 자유와 자치와 자연의 정치를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 그것은 1142년에 다섯 민족을 하나의 연방 정부로 구성한 '호데노소니 연방' 제도를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연방은 연방 밑에 민족이 있고, 민족 밑에 씨족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연방은 전쟁과 평화조약 체결과 같은 대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민족 내부는 씨족 자치에 맡길 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른바 연방이 그 나라의 씽크 탱크로서, 연방 회의를 주도하는 집과 보호막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민족장은 평상시에는 원로회의에 의해 엄중히 통제되어 권력이 거의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전시에는 그 민족의 유익을 위해 때론 전쟁을, 때론 화평을 주도했다고 한다. 그것도 개인의 의사가 아니라 전체 씨족의 협의로 처리했다고 한다. 더욱이 민족장은 어떠한 물질적 특권도 없이 일반 사람들처럼 경작과 사냥을 하며 살아야 했다고 한다. 무위도식하던 유럽의 왕들과는 달라도 한참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인디언들을 침략하고 살육한 미국이 그들의 법을 수용해?

프랭클린은 미국의 헌법 제정 과정에서 호데노소니 제도를 채택하고자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호데노소니의 일원제를 주장했으나 30년 뒤 미국 헌법에서는 양원제가 채택되었다고 한다. 또한 호데노소니처럼 평의원이 공공복지를 위해 토지나 돈을 받지 않는 것처럼 미국 공무원에게 급료를 주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역시 채택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 거절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전체적인 틀은 그것을 모두 수용한 셈이라고 한다. 미국 헌법의 대통령 선거인단은 연방 평의회를 모방한 사례이고, 새로운 주를 식민지로 삼던 유럽과 달리 동등한 구성원으로 인정한 것도, 문무의 권위를 구별한 제도도, 당시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탄핵 제도, 그리고 미국 의회의 발언 뒤 기록을 수정하거나 부연토록 했던 것 역시 인디언들의 호데노소니 전통 법안을 따른 것이라 한다.

"의회에 대한 호데노소니의 가장 큰 공헌은 정파의 대립이 아니라, 타협을 통한 합의에 이른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미국에서는 논점마다 의원이 입장을 달리하지만, 유럽에서는 정당이 의원들의 투표를 통제한다. 이는 유럽의 의회가 아닌 미국의 의회를 모방한 한국의 의회에서도 볼 수 있는 점이다." (287쪽)

그럼 오늘의 기독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는 현대 문명의 관점에서 원시 미개사회라 하지만 잘못된 관점이요, 오히려 그때야말로 참된 민주주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권력과 부가 오늘날처럼 편중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산주의 사회와도 분명 달랐다. 권력의 핵심이 일반 평민들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처럼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 모든 체제가 한쪽에 치우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세종시 문제만 봐도 서울시에 예속된 지역이 아니라 충청도민 스스로의 자치가 되도록 하는 게 바람직할 일인데도, 여전히 중앙 정치에 귀속시키려 하고 있지 않는가.

이는 내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도 예외이지 않다. 기독교를 개독교라 비난하는 이유도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를 인민의 아편쯤으로 만들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렇기에 종교 내부의 추진력이 목사나 장로 체제로부터 나오게 할 게 아니라 일반 평의회로부터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숭고한 기독교로 다시 서는 기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권성권/ 주님의교회 목사

* 한국 <뉴스앤조이>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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