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교만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
  • 최태선
  • 승인 2009.12.11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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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람들⑫ '나'를 일깨워주는 사랑의 도구

왜? 나는 늘…
남을 미워하는가.
작은 일에도 분노가 치미는가.
남에게 상처를 받는가.
불평하는가.
조급한 마음으로 일을 그르치는가.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가.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가는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규정하려 드는가.
다른 이의 인정에 목말라하는가?
모든 것을 합리화 하는가?
말이 많은가?
왜? 나는 늘…

힘들고 어려운 삶의 정황 속에서 우리가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질문이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질문 하나, 하나가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그 질문하는 '나'가 없다면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안다는 건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라면 도대체 어떻게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알겠습니까? 뭔가를 아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내가 될 수 없기에 하는 말입니다. 정말 '나'라는 존재는 '나'에게 어려운 존재입니다.

그런 '나'가 던진 질문들의 이유를 하나씩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은 겸손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정말 겸손하다면 나는 미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겸손하다면 나는 분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겸손하다면 나는 상처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정말 겸손하다면 나는 말이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겸손이란 단어가 그 모든 것의 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가 그런 질문들 속에 살게 되는 것은 제가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걸 작은 깨달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겸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해서 제가 겸손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반드시 변화로 이어져야 합니다. 깨닫고 변화하지 않는 일처럼 삶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깨달아 안다는 것은 깨달은 것이 자기 삶 속에서 실천되고 구현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난관이 존재합니다. 깨달은 '나'가 그 깨달음을 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라고 여기고 있는 '나'가 실상은 하나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거부가 너무도 은밀하기 때문에 실천하고자 하는 '나'가 거부하고 있는 '나'를 인식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 '나'를 파악했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또 다시 다른 '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내가 아는 '나'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만큼 '나'라는 존재는 전체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 '나'를 일반적으로는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그것을 '닫힌 의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것을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것으로 부르건 그것은 '나'이면서도 내가 알 수 없고 또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나'임에 틀림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나를 움직여 가는 동인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어떤 것으로 부르거나 규정하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그것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이후의 모든 인간의 숨겨진 마음속 공간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

범죄한 후 인간의 타락한 심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숨습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그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로 규정합니다. 그 마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처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3:9-18)

이런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가장 총체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마귀는 우리와 함께 태어나서 우리보다 조금도 더 빨리 죽지 않는다. 이 마귀는 우리의 성품이라는 천에, 그 천의 씨줄과 날줄처럼 근본적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어서 수의를 입기 전에는 교만이라는 단어가 죽었다는 소식을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찰스 스펄전)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지독한 묘사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정확한 인간 실존의 묘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 막8:34, 눅9:23)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안의 죄를(교만을) 보고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기 십자가를 지거나, 주님의 이름으로 어떤 위대한 일을 하거나(마7:15-23 참조), 남을 위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고전 13장 참조)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결국 '왜'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은 내가 자기를 부인하지 않아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정말 겸손하다면'이라는 대답은 정답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말대로 우리의 마음은 교만이라는 씨줄과 날줄로 엮어져 있기에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삶이란 쉼 없는 투쟁이며 선택의 연속입니다. 깨어 있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입니다.

겸손이라는 영어 'humility'라는 단어는 라틴어 후밀리따스(humilitas)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후밀리따스는 땅이라는 단어 후무스(humus)에서 온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겸손이란 땅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저 땅에 떨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맺은 열매라야 좋은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견주어 보려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제 위치인 피조물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모든 존재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듣고 보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안에 심어주신 거룩함에 몸을 굽히는 마음입니다.

이 굴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자기를 의도적으로 낮추는 위선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경외하는 인간의 고귀한 자세에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 앞에 어찌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무릎을 꿇고 경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땅에 엎드려 큰절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인상을 주는 말이나 행동으로 거만하지 않으며 빈과 부, 귀와 천을 떠나 다른 이들을 하나님 대하듯 합니다.

남의 행동에 멸시하는 말로 시비를 걸거나 품위를 떨어뜨리는 말로 남을 무시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힘 센 자 앞에서 비겁하거나 비굴한 행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겸손할 때 인간은 '나'의 소리를 넘어 모든 것 안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진정 겸손의 땅에서만 자랄 수 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왜라는 질문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삶의 정황이 감사입니다. 만족과 기쁨, 성취와 승리, 쾌락과 행복뿐만 아니라 멸시와 천대, 실패와 좌절, 아픔과 고통, 이 모두가 '나'를 일깨워주는 사랑의 도구입니다. 남은 문제는 이제 어떻게 늘 깨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 듣고 늘 몸을 굽히면서 겸손한 자의 삶을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야할 길이 아직도 먼데 벌써부터 알 수 없는 평안이 밀려듭니다. 역시 교만의 씨줄과 날줄로 엮여진 제 마음입니다. 이럴 땐 또 예의 그 화살 기도를 날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최태선 / 어지니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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