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아래 남은 마지막 새로움'
'해 아래 남은 마지막 새로움'
  • 김기대
  • 승인 2009.12.16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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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신학하기' (5)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전도서 1: 9-11)

"그것은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였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로마서 9: 13-16)

세상은 늘 악했지만, 사람들은 '내가 당하는' 현재의 악이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하며, 현대 문명이 위기에 직면했다고 선언한다. 반면 어떤 특정한 악은 문화적 재생산을 통해 가장 엄청난 악으로 기억된다. 

 

   
 
  ▲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악의 주관성을 숨기기 위해 악을 객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 : 위키디피아)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고난이 대표적인 예다. "유대인들의 수용소의 죽음이 엄청나고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의 주장은 옳다. 하지만 이 땅에서 살해당한 다른 사람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것이며, 그들도 비참하게 살육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이유 없이 처절하게 살해되었다"는 아더 코헨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Daniel Migliore, Faith seeking Understanding에서 재인용). 

그런데 이 문화적 재생산은 '내가' 속해 있는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결국 '나와'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가 저지른 다른 악에 대해서는 관대한 경향이 있다. 결국 악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악의 정도는 계측될 수 없다. 자신의 손에 찔린 장미 가시가 다른 억울한 죽음보다 더 아픈 이유도 이러한 주관성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악의 주관성을 숨기기 위해 악을 객관화 한다. 실제로는 자기의 이해관계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는 악을 객관화함으로써 사회와 연관 짓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나의 경험은 공공의 경험이 되어야 하며 현대 사회가 악으로 치닫고 있음을 나와 함께 모두 인정해야 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러한 악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모스는 어느 날 사냥터에서 모두가 죽어버린 범죄 현장을 목격하고 거액의 돈 가방을 손에 쥔다. 현장에 있던 유일한 생존자이지만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가망성이 없어 보이던 사람에게 물을 주지 않은 것이 내심 마음에 걸리던 모스는 밤에 그를 다시 찾아간다.

그러나 모스는 그로 인해 쫓기게 된다. 돈 가방과 관계된 범죄 조직의 부탁을 받은 살인청부업자 쉬거는 돈 가방을 찾아달라는 의뢰인도 죽여버린 채 모스를 찾아 나선다. 좇는 이와 좇기는 이 모두 돈 가방의 실제 주인은 아니다. 관객도 이 돈 가방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나 관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돈 가방을 모스에게 주고 싶어 한다. 삶에서 우연찮은 행운에 접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 속에 담긴 것이다.

따라서 모스는 악의 범주에서 제외된 채 유일하게 돈 가방을 좇는 냉혈한 청부업자 쉬거만 악인이 된다. 그는 악의 화신답게 이유 없는 살인을 저지른다. 돈 가방을 좇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잔혹한 살인에는 남의 돈을 들고 도망 다니는 모스의 책임도 있지만 관객들은 쉬거의 잔인함에만 집중한다. 산소통으로 사람을 살해하는 쉬거의 독특한 방식은 보안관 벨을 비웃는 장치다. 벨 보안관은 경찰이 총도 차고 다니지 않던 좋은 시설을 회상하는 퇴물급 보안관이다. 쉬거는 총이 없어도 산소통으로 사람을 죽인다. 생명의 필수 조건인 산소이지만 그것을 담은 용기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될 수 있다.

돈도 그 교환가치 이외의 가치로 취급될 때 무기가 된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는 총뿐이라고 단정하는 순진한 시골 보안관은 모스와 쉬거를 추적한다. 돈 때문에 목숨을 거는 도망자와 추적자를 바라보며 세태가 한심스럽다고 느끼는 도덕주의자 벨은 예전에는 도덕이 살아있었다고 단정 짓는다.

모스와 쉬거라는 두 범죄자보다 더욱 교묘한 범죄가 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나의 도덕 체계를 뒤흔들고 내가 담당한 공동체를 뒤흔듦으로써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악이 세상을 위협하는 가장 큰 악일 뿐이다.

그는 자본과 무기(기술)로 상징되는 근대적인 것과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가다가 근대적 도구에 말려드는 현실을 가장 큰 악이라고 여긴다. 예전에도 이유 없는 악의 전횡이 있었음을 주변 사람들은 벨에게 이야기해주지만 선뜻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예전이랄 것도 없이 영화 속 70년대 남부의 백인들은 멕시칸에 대한 인종차별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 '작은 악(?)'을 저지른다. 

범죄 현장에서 멕시칸 갱들의 시신보다 죽은 개를 더 안쓰러워하는 경찰의 모습은 월남 양민을 베트콩으로 오인해 죽이고서도 물에 빠진 개는 살리려고 했던 어느 월남전 소재 영화 속 미군을 떠올리게 만든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이유 없는 살인, 생략된 죽음의 장면, 동전 던지기를 통하여 인과관계가 가진 한계를 보여준다.  
 

전문 살인자와 시골 사냥꾼이 동일한 욕망으로 싸울 때 그 싸움은 치열하다. 비록 시골 사냥꾼이기는 하지만 그는 퇴역 군인이다. 국가적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는 만만치 않은 존재다. 게다가 모스 뒤에는 그의 편을 들어 주고 싶어 하는 제 3자(관객)들이 있기에 힘이 난다. 

전문 살인자의 추격을 잘 피해오던 모스는 시골 모텔에서 죽음으로 발견된다. 이 죽음은 또 다른 추격자와의 싸움으로 인한 것이다. 그 장면까지 손에 땀을 쥐던 관객들은 주인공의 이 장렬하지 못한 죽음 앞에 허탈해 한다. '돈에 목숨 건 인생이란 이렇게 허무한 것이구나'라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영화는 모스의 죽음을 생략해버린다. 모스의 죽음은 좇는 자 쉬거와 쫓기는 자 모스의 인과관계 밖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죽음의 장면이 생략될 수밖에 없다. 현대는 중심과 대의 없는 시대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이 영화는 가장 핵심적인 장면이 되어야 할 모스의 죽음을 생략해버린다. 

모스의 죽음에도 돈 가방은 쉬거의 것이 되지 않는다. 모스의 죽음 이후 돈 가방은 영화에서 사라진다. 어차피 돈 가방은 영화적 장치였을 뿐이기에 누구의 소유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은 중요한 것 같지만 어떤 시대에서도 주인공은 될 수 없다는 상징이다. 쉬거는 모스의 아내를 찾아가 그녀도 죽인다(영화는 이 장면도 생략한다).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은 쉬거는 길거리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돈을 주고 옷을 산다. 범죄자인줄 뻔히 보이는 이 낯선 사람에게 아이들은 돈을 받는다.

영화에는 범죄에 얽히게 되는 것인지 알면서도 돈에 매수되는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중에 커서 자신들이 범죄에 이용되었던 일은 기억에서 생략된 채 물질에만 매몰되고 도덕성이 결여된 '요즘 애'들을 탓하며 인생을 살아갈 것이다. 사람을 쉽게 죽이던 쉬거가 아이들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아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신들의 죄는 기억하지 않은 채 옛날의 도덕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쉬거가 저지른 악보다도 더 큰 악이 될 수 있기에 쉬거는 그들을 남겨 둔다.

여기서 영화 제목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을 향한 항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시작한다. 종교적 도시 비잔티움에는 시간이 초월된 채 늘 새로운 것에 대한 갈구만이 있는 도시이다. 영화와 예이츠의 시에서  노인은 규범과 질서 즉 옛것을 상징한다. 노인은 옛것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삼는다. 왜냐하면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운 세대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경험의 양'밖에 내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경험의 양으로 우월성을 내세우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영화에는 또 다른 '노인'이 나온다. 쉬거를 잡기 위해 고용된 또 다른 청부업자 카슨이다. 그는 모더니스트 살인자이다. 규칙과 규범을 강조하며 이론과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그도 쉬거에게 어이없게 당한다. 쉬거는 그를 죽이며 말한다. "너를 살리지 못하는 규칙이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 역시 법에 예속된 노인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법칙이 인과 관계, 또는 이론으로만 설명된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러나 영화는 이유 없는 살인, 생략된 죽음의 장면, 동전 던지기를 통하여 인과관계가 가진 한계를 보여준다.

 

   
 
  ▲ 쉬거는 총이 없어도 산소통으로 사람을 죽인다. 생명의 필수 조건인 산소이지만 그것을 담은 용기는 사람을 죽이는데 사용될 수 있다.  
 

시대가 갈수록 악은 더 극성을 부리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옛것을 뒤돌아보게 된다. 인과의 관계를 깨버리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에 대한 낯섦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범죄만 악이 아니라 새로운 낯선 것이 악이 될 때도 있다. 난데없이 바코드는 악의 상징이 된다. 줄기세포, 유전공학 등의 용어도 낯설고 악해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악은 예전에도 늘 있어왔던 것이지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한다. '해아래 새 것이 없다'는 것은 '옛것도 없다'는 것과 같은 말도 된다. 옛 것은 기억 이외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악에 대해 침묵하고 절망해야 하는가?  과거의 경험은 무엇인가?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옛것에 집착하는 순간, 새로운 것은 창문으로 들어왔다가 달아나버린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불안해하던 나머지 사무엘의 유령을 불러낸다(사무엘상 28장). 사울은 미래를 앞에 두고 과거로부터 해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러낸 과거(사무엘의 유령)는 미래의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린다. 그런 점에서 과거를 불러내는 것은 유령을 불러내는 것과 같다. 과거는 기억되어야 할 것이지 부활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보안관 벨은 유령을 불러내는 사람처럼 어둡다.

과거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지는 낯선 것에 대한 불안감은 악을 절대화 한다. 악은 하나님과 대등한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하는 악 앞에서 쉽게 절망한다. 물론 악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쉬운 것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은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이 된다. 세계 안에 있는 악의 실재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온전히 알 수 없고 파편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고전 13:12) 존재라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신학 전통에서 악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며 실체가 아니다. 아담을 통해서 죄가 세상이 들어 왔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악은 완전히 사람의 책임이다. 세상이 악한 것이 아니라 악이 세상을 악하게 만든 것뿐이고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영화에서 보안관 벨은 모스의 집에서 쉬거가 먹다 남은 우유병을 발견하고 컵에 따라 마신다. 인간의 기준에 따른 선과 악, 그것은 우유를 병째 마시느냐, 컵에 따라 마시느냐의 차이처럼 미세할지도 모른다. 

결국 악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의 선택의 문제다. 영화는 그것을 우연의 연속으로 설명하지만 신학은 섭리 또는 신정론으로 설명한다. 영화처럼 우연이 강조되면 허무가 따라 오지만 섭리에는 희망이 있다. 때로는 불공평해 보이는 섭리 앞에서 인간은 흔들리지만 선택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할 방법은 없다. 다만 이런 악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가 일어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악이 있지만 사물의 근본은 선이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는 은총의 길이 열려 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아 파편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분명한 것은 희망이라는 것이다.

선과 중심, 하나님, 유일한 것, 근본적인 것, 절대적인 것이 사라지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공포적일 수 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다. 어차피 운명(원죄)적으로 우리는 악 속에 던져져 있다. 악은 다 정복되지 않았지만 신앙은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 안에서 확인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다. 영화는 다가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는 희미한 메시지를 준다. 그것을 신앙으로 재해석하자면 이 악한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약속이다. 그것이 유일하게 남은 새로움이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악에 대해서 과장하지 말자. 어느 시대 어떤 '나' 또한 동일한 악에 대해서 고통 받아 왔고 또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짓는 악 또는 내가 속한 공동체가 짓는 악에 대해서 회개가 필요하다. 동시에 내가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이웃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 함께 기도하고 실천하는 신앙이 필요한 때이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악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종말을 향해 여전히 열려 있게 만든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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