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적 가치 앞세우는 천박한 기독교 선교
세속적 가치 앞세우는 천박한 기독교 선교
  • 정민영
  • 승인 2009.12.17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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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직한 한국 선교를 위한 제언(3)…과시적·고지론적 접근의 문제

정민영 선교사(국제 위클리프 선임 부총재)는 한국 선교계를 "선교적 사사시대"라 일컬었다. 개인이나 개별 교회나 단체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피차 간섭하지 말자는 식의 백인백색의 주관주의가 판치고 있다는 것이다. 정 선교사는 한국 교회의 선교 행태를 전반적으로 평가하고 교정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안 도출을 위한 정리를 시도했다. 2007년 아프간 사태 직후 작성한 글이지만, 여전히 한국 선교계에 유효하기에 앞으로 6가지의 주제별로 연재해나갈 예정이다. (편집자 주)

1. 호전적·대결적 접근의 문제
2. 영적 전쟁의 무교적 해석 문제
3. 과시적·고지론적 접근의 문제
4. 선교적 동인(motivation) 및 문화 침식의 문제
5. 동원–훈련–현장 체제의 불균형 문제
6. 단기선교의 문제

과시적·고지론적 접근의 문제는 전도나 선교를 힘겨루기 구도로 본다는 점에서 앞에서 거론한 호전적·대결적 접근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그간 한국 교회와 선교계는 복음의 신빙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독교의 위력과 상대적 우위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십자가의 도가 아닌 과시적·고지론적 접근을 시도해왔다. 이런 빗나간 관점은 국내전도뿐 아니라 해외 선교의 행태에도 큰 영향력을 미쳤고, 최근에 그 정도가 더 이상 간과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참을 수 없는 기독교의 가벼움에 식상한 세상은 이제 교회를 향해 노골적으로 돌을 던지고 있다.

앞서 "낮아짐으로 높아지고 섬김으로 권위를 세우며 죽음으로 사는 역설적 십자가의 도"의 회복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가시적 행사나 대형집회로 기독교의 세력과 힘을 과시하려는 듯한 승리주의를 지양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겸허하게 빛과 소금으로 역사하는 선교의 정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시적 접근이 일견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질지 모르나, 사실상 십자가의 역설을 뒤집어 복음의 진정한 가치에 물 타기 하는 오류다. 소위 예수 믿으면 병 낫고 팔자 고친다거나, 기독교를 믿는 나라가 잘산다는 식의 화려한 포장이 선명한 복음을 흐리는 빗나간 접근인데, 이것이 바로 과시적이고 물량 공세적 선교의 뿌리다.

그런 방법이 옳다면 주님이 이 세상에서 그토록 초라하게 살다가셨을 리가 있을까. 한국 교회는 이제 복음 자체로 진검 승부를 해야지 비본질적 부산물로 복음의 신빙성을 증명하려는 구차한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복음 없이도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는 세속적 가치를 앞세우는 천박한 기독교가 아니라 역설적 복음의 가치로 차별화된 교회의 모습을 세상은 보기 원한다.

고지론(高地論)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지속적·반복적으로 나타나 교회를 실족시킨 시행착오로 그 대표적 사례는 313년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칙령 반포 이래 시작된 Christendom 시대의 도래다. 그렇지 않아도 위대했던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으니 바야흐로 로마 제국 제2전성기(Pax Romana)가 시작되고 기독교의 위력이 온 세상에 힘 있게 미치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 타락의 전주곡이자 "광명의 천사"(고후 11:14)의 모습으로 중세 암흑기를 준비하는 기만이었다. 메노나이트 신학교의 크라이더(Alan Kreider) 교수는 2000년 기독교 역사의 주요 패러다임 전환을 Christendom 시대의 도래로 보면서, 그때를 초대 교회(pre-Christendom)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전승한 복음을 왜곡한 시기로 보았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역사적 필연인 셈인데, Christendom 시대의 오류를 바로잡아 초대 교회의 진정한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post-Christendom)가 감당해야 할 책임인 셈이다.

Christendom 시대는 기독교 고지론을 낳았는데, 사회의 주변에 머물던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중심축으로 이동했고, 기독 공동체가 영적 흡인력 대신 권력과 출세와 명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세력 집단으로 부상했으며, 하나님보다 인간의 제도와 영향력을 신뢰하고, 자발적 회심이 아니라 개종을 강요하는 종교적 압력 집단으로 변했으며, 검소한 예배와 내적/영적 매력 대신 호화로운 건물과 현란한 예배 의식으로 세상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교회의 초점이 선교에서 현상 유지 및 몸집 불리기로 변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가 고지를 점령하면 복음 전파에 큰 힘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과 역사는 오히려 정반대임을 가르친다.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의 저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서 유사한 깨달음을 나눈다. 예일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엘리트 집단을 가르치던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홀연히 캐나다 토론토 교외의 정신지체 공동체(L'Arche Daybreak Community)로 들어가 여생을 보낸다.

이런 나우웬의 모습에 의분을 느낀 얀시는 나우웬을 찾아가 왜 고지의 엄청난 가능성을 버려두고 굳이 낮은 곳에 가서 기회를 낭비하는지 따진다. 이에 나우웬은 복음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테레사 수녀가 상류 사회 사역자이기 때문인지 캘커타의 빈민 대상 사역자이기 때문인지 되물음으로써 현안의 정곡을 찌른다. 얀시가 말하는 헨리 나우웬의 '거룩한 비효율'이 바로 그것이다.

정민영 / 국제 위클리프 선임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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