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장이가 빚은 천한 질그릇
옹기장이가 빚은 천한 질그릇
  • 김종희
  • 승인 2009.02.13 12: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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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문재린·김신묵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

 

이 글은 2006년 4월 쓴 것입니다.
오래된 글인지만, 문동환 목사 인터뷰와 함께 읽으면 유익할 것 같아서 같이 올립니다.

올 여름 두 분의 죽음을 접하면서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7월 노환으로 별세한 세계선린회 고 이수민 회장은 북간도의 용정에서 태어나 그곳의 은진중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개발 사업에 마지막까지 헌신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8월 타계한 고 강원룡 목사는 함경도에서 태어났으나 은진중학교에 가서 스승 김재준 목사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용정과 은진중학교는 그의 널따란 신앙과 신학의 자궁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기독교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 별과 같은 존재였던 북간도 출신 인사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과 가문과 민족에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건들이 그득한 곳이 북간도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배움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기도 전에 북간도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들과 사람들이 우리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말 것 같아 안타깝다.

가족사 뛰어넘는 민족사적 가치 소유

▲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문영금·문영미 엮음 / 도서출판 삼인 / 28,000원)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최근 출간된 <기린갑이와 고만녜의 꿈>은 그래서 더없이 반갑다. '만화책 이름인가' 하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은 문익환 목사의 부모인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사모의 회고록이다('기린갑이'와 '고만녜'는 두 분이 어릴 때 불리던 이름이다). 비록 사람들은 하나둘 이 땅에서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들이 남긴 위대한 사건들은 선명한 그림으로 눈앞에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한 집안의 문중사만은 아니다. …… 민족사·정치사·사회사·교육사·여성사·종교사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한겨레신문>), "두 사람의 삶의 역사를 넘어 분단이라는 민족적 비극으로 인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으며, 두 사람의 삶을 지탱한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가 한반도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독교 운동사이기도 하다"(<프레시안>)고 평가한 것 외에도, 대부분 언론들은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입을 빌려 '가족사'를 뛰어넘는 '민족사'적 가치가 있다고 이 책을 소개했다.

나도 세 번이나 읽었지만, 언론들의 공통된 관점보다 걸출한 평가를 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다만 '문익환'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절절 흔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꼭 들려주고픈 값진 교훈들이 이 책 곳곳에 숨어 있는데, 그 얘기를 하고 싶다. <기린갑이…>를 통해 배우는 문익환·문동환 형제 목사 부모의 신앙.

남편은 옹기장이 신앙, 아내는 밀알 신앙

문재린 목사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관통하는 사상은 '옹기장이 신앙'이다. 그는 원래 회고록 제목을 '옹기장이 손의 흙덩이'로 하려 했다. 자신의 90 평생을 하나님이 빚으셨다는 신앙고백이 그의 한생을 장악하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은 그의 옹기장이 신앙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서 매듭짓는다. 김신묵 사모는 한 알의 밀알이 스스로를 썩혀서 열매를 맺게 하는 '밀알 신앙'을 갖고 살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이 손수 빚으신 이 두 분의 생애를 간단히 훑어보자.

문재린 목사는 북간도 명동의 다른 가문과 마찬가지로 1910년 15살 나이에 정재면 목사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년 뒤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북경에서 공부하다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주기철 목사와 동기였다. 그리고 캐나다에 있는 임마누엘신학교로 유학을 갔다. 평양신학교의 교육 덕분에 보수적 색채는 그대로였으나 사상적 태도는 관대해졌다.

명동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엉망진창이 되자 그곳을 일구었던 가문들이 1931년 용정으로 옮겼다. 1932년 귀국한 문 목사는 1946년까지 용정중앙교회에서 목회했다. 당시 5개 교파로 갈라져 있던 간도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을 한데 모아 1942년 만주조선기독교회라는 이름으로 교파 통합을 이뤘다. 그는 나중에 남한에 내려와 교파가 갈라진 모습을 보고는 만주 생각을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남편이 집을 떠나 공부하는 동안 김신묵 사모는 집만 지키고 앉아 있지 않았다. 1916년 명동교회 교인들끼리 '여자 비밀 결사대'를 만들어 모금 운동을 벌여서 독립군을 지원했다. 명동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해 해방이 되는 해까지 20년간 회장직을 맡았다. 당시 여전도회는 여성들을 위해 각 지역에 여전도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명동에서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다섯 군데 세웠다. 1919년 3·13 만세운동 때는 갓난아기 문익환을 등에 업고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남편의 목회를 도우면서도 여자들만의 고유한 사역을 열심히 벌여나갔다.

툭 하면 감옥 갇히는 아들, 흐뭇하게 여기는 부모

▲ 문익환이 찍은 사진으로, 김신묵은 이 사진을 참 좋아했다. 1960년대 수유리 사택에서.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1946년 해방이 되었지만 문 목사는 용정에 남아 목회할 결심을 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열리는 기독교대회에 2주일 동안 참석한 다음 용정에 돌아왔을 때, 그 사이 분위기는 매우 험악해져 있었다. 이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문 목사를 미국의 스파이로 의심하고 감옥에 가뒀다. 그렇게 투옥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중앙교회를 목회할 때 문 목사가 책임을 맡던 은진중학교·명신여학교·제창병원 등을 일본에 하나씩 둘씩 빼앗겼는데, 소련이 지배를 하고서는 목회 자체가 아예 불가능해졌다. 할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김천에 있는 황금동교회, 서울에 있는 신암교회 등에서 목회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그는 다른 목사들과 함께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 김신묵 사모는 목사 부인들과 '목사 부인회'를 만들어 부상한 군인들을 치료하고 전도하는 일에 나섰다. 이들은 거제도로 옮겨 피난민을 돕다가 옥포교회에서 목회했다. 그때 육영학교라는 피난민 중학교를 설립했다. 북간도에서 교회가 들어서면 당연히 학교가 세워졌던 경험이 전쟁터에서도 중학교를 세우도록 한 것이다. 휴전이 되고 서울에 올라온 문 목사는 강원도 일대를 돌면서 선교 활동을 벌여 일곱 군데의 교회를 세웠다(김신묵 사모는 여덟 군데로 기억했다).

1955년에 북간도 출신 교인들과 함께 중앙교회를 세웠는데, 이 교회가 나중에 민주화 운동의 산실로 유명한(당시는 악명 높은) 한빛교회가 되었다. 1961년 현역에서 은퇴한 문 목사는 1971년까지 평신도 운동에 전념했다. 전국의 각 교회와 노회에 평신도회를 조직하도록 독려했고,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장학금을 주어 육성했다. 이것이 기장 교단의 남신도회전국연합회의 출발이다.

젊어서 일본에, 소련에, 북한에 시달린 그가 노년에는 결국 남한에도 시달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1965년 한일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70이 넘은 나이에 금식 기도와 시위를 하면서 반대 대열에 참여했다. 심지어는 국회 앞에서 분신할 것을 결심하고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1971년 셋째아들 문영환의 초청으로 캐나다로 건너갔지만 고뇌는 끝나지 않았다. 1976년 그 유명한 3·1민주구국선언으로 두 아들 문익환·문동환이 감옥에 갇히고 며느리와 손자 박용길·문호근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먼 곳에서 전해 들었다.

이미 네 번의 옥고를 치른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한마디일까. "우리 집에 애국자가 넷이 있으니 흐뭇하다"고 했다. 김신묵 사모는 한술 더 떠 "두 아들이 3·1운동과 4·19 정신을 이어받아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예언자처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갔으니 장한 일이다"고 했다.

▲ 1982년 12월 문재린이 위독해지자 아들 문익환이 감옥에서 병문안을 나왔다. 그러나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귀한 질그릇보다 천한 질그릇 되라

일생 동안 네 차례 옥살이를 치렀던 아버지의 기록을 경신하려고 했는지 큰아들 문익환 목사는 여섯 번이나 감옥에 갇히는 형극의 길을 걸었다. 두 아들의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는 용기, 민주화를 위해 육신을 던진 수많은 조국의 아들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아파하는 사랑, 이 부부가 갖고 있는 힘의 근원은 대체 무엇일까.

'옹기장이 신앙'이고 '밀알 신앙'이다. 문재린 목사는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뿐만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또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는 디모데후서 2장 20절을 인용하면서, "1년에 한 번이나 쓰이는 금그릇보다 언제나 없으면 안 되는 천한 질그릇이 실제로는 가장 필요한 것이다"고 발상의 전환을 역설했다. 너도나도 금그릇이 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이 땅에서 질그릇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내가 열매가 되려고 하기보다 내가 썩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자신의 삶을 천한 질그릇으로 받아들인 문 목사는 "깨진 그릇을 내버리지 않고 다시 새것으로 쓰시는" 옹기장이의 은혜 덕분에 자신의 일생이 역사와 민족을 위해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고 믿으면서 살았다. 두 부부가 이 세상을 떠나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의 시신을 미련 없이 기증한 것도 질그릇으로, 밀알로 마지막까지 쓰이고자 하는 신앙을 몸으로 고백한 것이다.

옹기장이 신앙에 뿌리박힌 그의 일생에서 여러 열매들을 보게 된다.

두 부부의 신앙은 기도에서 출발한다. 문 목사가 1946년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시베리아로 끌려가면 선교하다가 순교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자식들이 옥고를 치를 때에도 감사하며 기도했다. 박정희 시대에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가슴을 뜯으며 기도했다. 전두환 시절 광주에서 처참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눈물로 기도했다. 옹기장이 신앙은 그로 하여금 갖은 역경 앞에서 기도하게 했다. 기도의 힘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간 것이다.

김신묵 사모의 기도는 더욱 간절하고 웅숭깊었다. "내 아들들은 유명해서 고문도 안 받겠지만, 학생들은 불쌍해" 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했다. 자식들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어머니를 회상했지만, 뛰어난 기억력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힘으로 젊은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머리가 아닌 심장에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 문익환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문재린이 벌떡 일어나 아들을 안았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목사 장례식 조문객의 절반 이상이 비신자

다음으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문 목사의 생각을 보자. 그는 하나님나라가 세 가지 차원에서 이룩된다고 믿었다. 첫째는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이다. 둘째는 그의 뜻에 따라서 사는 사람이 모여서 사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나라다. 셋째는 죽은 다음에 가는 천당이다. 문 목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목표를 위해 달리면 세 번째 천국은 하나님이 마련해두었다가 주실 것이라고 흔들림 없이 믿었다.

두 번째 하나님나라를 위한 실천은 그에게 시대적 과제를 감당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젊어서는 명동의 교회와 학교에서 민족 교육을 시켰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인이 "조선의 기독교는 민족 운동이지 기독교의 본질에서 떠났다"고 비판하자 "기독교란 단순히 천당으로 안내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상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사회 정의를 강조한다"고 반박했다.

박정희 시대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뛰었다. 캐나다에 가서도 안락한 노년을 보내지 않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일본의 제국주의나 중국·소련·북한의 공산주의 못지않게 미국의 이기주의가 우리 민족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지 이때 절절히 깨달았다. 소련과 흥정해서 남북을 갈라놓고, 자기들 말 잘 듣는 박정희를 세워서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일본이 아시아에서 자신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 1990년 9월, 위독한 어머니를 뵈러 안동교도소에서 나온 문익환. 그러나 다시 의정부교도소로 수감돼 결국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삼인)
1985년 12월 문재린 목사는 죽음을 앞두고 "의정부는 지났지? 동두천도 지났지? 평양은 아직 멀었지?" 했다 한다. 1990년 9월 김신묵 사모는 손을 번쩍 들고 "통일은 다 됐어" 외치고는 눈을 감았다 한다. 이것을 그저 의식이 혼미한 상황에서 내뱉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을까.

85년 문재린 목사의 장례식이 열린 수유리 한신대 강당에 1,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참석했다. 문익환 목사는 "절반 이상이 교회와 무관한 사람들"이라면서 "교회의 울타리를 깨려고 살아오신 아버님의 마음이 교회 안팎에 고루 울려 퍼졌다"고 흐뭇해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한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 한 시대의 목사였던 것이다.

<기린갑이…>는 부제처럼 '북간도 독립운동과 기독교 운동사'에 있어서 주옥같은 가치가 있다. 한편 한 부모의 튼실한 신앙이 그 가문을 어떻게 이끄는지 교훈을 준다. 이러한 씨줄과 날줄은 이 시대를 살아가며 신앙을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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