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축복송' 아닌 '삶'으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축복송' 아닌 '삶'으로
  • 박지호
  • 승인 2010.01.05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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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하람비 설립자 존 퍼킨스 박사

   
 
  ▲ 존 퍼킨스 박사는 미시시피 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 형이 지역 보안관에게 살해당하자, 17살 되던 해에 캘리포니아로 도망쳤다. 고향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예수를 만난 후 다시 미시시피로 돌아가 복음 전파와 민권운동에 앞장서며 구타와 투옥 당하기를 반복했다.  
 
13년 전 파사데나경찰국을 퇴직한 케를 무디 경사는 하람비가 있는 파사데나 북서쪽 빈민가를 "마약과 갱들이 넘쳐나던 곳"으로 추억했다. 그는 "이제 여기서 그런 것들(마약과 갱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하람비가 모두 그 짐을 짊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린이들이 길거리에서 다시 뛰어놀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1982년 퍼킨스 박사 부부가  하람비(Harambee Ministries)를 세우면서 가졌던 바람이다. 소박하게만 보이는 꿈이 무모해보였던 이유는 당시 그 곳은 남가주 전 지역을 통틀어 낮 시간 동안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하람비가 위치한 LA 근교 패서디나 북서쪽, 특히 하워드와 나바로 거리가 만나는 곳은 '피의 교차로'(blood corner)라 불릴 정도로 폭력과 마약과 매춘이 번성하던 곳이었다.

27년이 흘렀다. 작년 12월 15일, 하람비 강당에서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렸다. 퍼킨스 박사를 비롯해 학생, 졸업생, 학부모, 교사, 자원봉사자 등 50여 명이 하람비의 어제와 오늘과 미래를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성탄을 축하하며 노래했고, 아이들의 합창을 지켜보던 퍼킨스 박사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행사 이후 퍼킨스 박사와 마주한 곳은 공교롭게도 27년 전 지역 최대 규모의 마약 판매처였던 곳(현재 하람비 교실)이었다.

"바로 이 집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약 판매처였다.(집 안을 둘러보며) 한창 손님이 많을 때는 마약을 사기 위해 들렀다 가는 차만 한 시간 동안 20대에서 30대가 넘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기 뒤뜰에는 매매춘하는 텐트가 줄지어 있었고."

   
 
  ▲ 올해로 27년째를 맞은 하람비. 작년 12월 15일, 하람비 강당에서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렸다.   
 
1960년대부터 도시 빈민 사역을 해온 퍼킨스 박사. 그는 자신의 고향인 미시시피 지역 흑인 빈민가로 들어가 The Mendenhall Ministries와 Voice of Calvary Ministries를 차례로 세우며 도시 빈민 사역의 기틀을 마련했다. 열악한 주거 환경과 교육 환경 개선 등 총체적인 차원의 회복을 시도하며 지역사회를 변화시켰다. 하람비 사역을 후임자에게 넘겨준 뒤1989년에 CCDA(Christian Community Development Association)라는 연합 단체를 설립했다. 가난한 지역사회를 섬기는 개인과 풀뿌리 운동 단체들을 지원하고 연합하는 조직이다. 현재 CCDA는 개인 회원 3,000여 명과 500여 개의 단체들이 연대하고 있다.

1982년 퍼킨스 박사는 미시시피의 사역을 뒤로하고, 은퇴 후 여생을 보낼 요량으로 캘리포니아로 건너왔다. 친구의 손에 이끌려 지금의 하람비가 위치한 파사데나 북서쪽 빈민가를 방문했던 것이 하람비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좌고우면할 것도 없었다. 퍼킨스 박사는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 학생 중 한 명이 퍼킨스 박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자, 퍼킨스 박사가 학생을 안아주고 있다. 이 학생의 아버지 또한 하람비 졸업생이다. 이날 퍼킨스 박사와 아들의 만남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혔다.  
 
퍼킨스 박사는 "아이들이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회상했다. 갱들의 꾐에 빠진 아이들은 쉽게 돈을 벌겠다며 마약을 배달에 나섰다 목숨을 잃곤 했다.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고 마약 거래상과 갱단으로 활동하며 감옥과 무덤의 경계선을 오가는 어린아이들의 삶이 퍼킨스 박사의 마음을 짓눌렀던 것이다.

퍼킨스 박사는 이사하자마자 Good News Club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차고에서 기도 모임을 시작했다. 지역 어린이들을 열악한 환경으로부터 구출해내는 것이 당면 과제였지만, 아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였다.

"집 앞에서 소규모 집회를 시작했다. 찬양도 하고, 말씀도 전하고, 주변 음식점으로부터 제공받은 음식도 나눠줬다. 시 당국으로부터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집회를 하는 동안 경찰이 함께 자리를 지켰는데, 그게 마약상들의 반발을 불렀다."
 
퍼킨스 박사는 그 일로 하람비 사역 중에 가장 힘든 순간을 맞게 된다.

"주변 마약상들이 화가 단단히 났었다. 화염병을 던지고, 집의 문을 부수곤 했다.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다. 족히 1년 동안 지속됐던 것 같다. 아들까지 그 싸움에 휘말리면서 큰 곤혹을 치렀다."

경찰이 나서서 경고할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 '무섭지 않았냐'는 물음에 퍼킨스 박사는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시고, 지역사회가 지지하고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퍼킨스 박사는 "대부분의 청소년 범죄는 건설적인 놀이 문화가 없을 때 발생한다"고 봤다. 하람비 창립멤버이자 이사 중 한 명이 파사데나대학의 농구팀 코치였다. 퍼킨스 박사는 그와 함께 뒷마당에 야외 농구 코트를 만들고,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주중 오후나 주말마다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와서 농구를 했다. 농구 열기가 무르익으면서 갱들의 시비도 잦아들었다.

   
 
  ▲ 30년이 넘게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인지 물었다. 퍼킨스 박사는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고 생각하며 금방 소진되고 말겠지만, 자신의 문제였고 삶이었다"고 대답했다.   
 
'하람비 사역 중에 가장 아름다운 기억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누구도 오길 꺼리던 곳이,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매력적인 곳으로 바뀐 것, 그래서 하람비를 통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퍼킨스 박사는 말했다.
 
"성경공부와 기도 모임이 끝나면 점심식사를 했는데, 식사를 준비하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동네 아이들부터 헐리우드 영화배우들까지. 영화배우가 많이 다니는 헐리우드에 있는 교회에 서 하람비를 자주 방문하곤 했는데, 하람비를 다녀간 뒤 그 교회에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는 작은 움직임이 생겼다. 이후 이곳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일종의 명소가 되었다. 성공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람비는 가난한 사람들과 사는 작은 공동체일 뿐이지만, 서로의 연대와 우정을 만들어낸 것이다."

퍼킨스 박사는 이웃을 향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며 손을 뻗어 축복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사람다운 삶을 살도록 지역사회를 조금씩 변화시켜 갔다.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잡초가 무성하던 동네에서 퍼킨스 박사는 틈틈이 정원을 가꿨다. 아이들이 아름다움을 누리는 존재로 자랄 수 있도록 꽃을 심고 길렀다.

"아이들이 꽃을 꺾도록 놔뒀다. 아름다움을 누리도록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팠을 때 하람비 아이들이 찾아와 노래를 불러주고, 우리 마당에 있는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주었다. 이미 아내의 방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내준 꽃이 있었지만, 그 꽃은 더욱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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